2019.1.20. 주일 설교. 성품론 11: 온유(갈5:22~23, 마11:28~30). 양은익 목사.

 


성품론 11: 온유(갈5:22~23. 마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1.
성품론 11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8번째 성품인 온유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한 문학 평론가가 온유에 대해 한 말이 기억납니다. ‘온유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거의 사라진 단어, 쓰지 않는 단어가 돼버렸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을 하면서 상당히 아쉬워하는 것을 봤습니다. 온유는 성품의 꽃입니다. 성품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품이 합해져서 나오는 성품이 온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나오고, 오래 참아야 나올 수 있고, 자비해야 나올 수 있는 게 온유입니다.

온유한 사람, 정말 좋습니다. 가지고 싶은 성품 중의 하나가 온유입니다. 연륜이 묻어나는 넉넉한 성품인데, 온유의 성품 놓치지 말고 가지시기 바랍니다. 귀한 온유인데 지금은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온유하면 만만하고 보고 있고, 물러터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 좋은 거보다 거칠더라도 제 밥그릇 악착같이 챙기고, 한번 따지는 것 보다 두 번, 세 번 따지는 사람이 대접받는 ‘정말 이상한 사회’가 돼버린 겁니다. 온유는 사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만만하게 보여도, 물러터졌다는 소리 들어도 온유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관두시겠습니까? 온유할까요? 말까요?

2.
온유하면 성경에서는 모세인데, 모세가 어떤 상황에서 온유했나를 보게 되면 답이 나올 겁니다. 민 12:3에 모세의 온유가 나옵니다. 어느 정도라고 얘기합니까?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 최고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간단히 넘길 구절이 아닙니다. 모세와 함께했던 사람이 몇 명입니까? 출애굽 인원만 2백만, 출애굽을 이끌어 가는 성인 남자 60만입니다. 이 사람들 고분고분한 사람들 아닙니다. 사사건건 시비 걸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까다로운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이런 사람들하고 40년을 광야에서 함께 하면서 약속의 땅에 가게 되는데, 말이 40년이지 1년도 버티기 힘든 상황에서 모세는 해냅니다.

뭐로 해냅니까? 민12:3. 온유로 해냅니다. 사람들이 시비 걸고, 반기 들 때마다 분노했다면 몇년가지 못하고 출애굽 공동체는 박살이 났을 겁니다. 근데 모세가 최고의 온유로 다 받아냈던 것 같습니다. 왕자 출신 모세, 한 성깔 했다는 거 아시지요. 사람 죽이고 도망쳐 나온 사람인데 온유하기 힘든 거친 환경, 거친 사람들 틈에서 ‘온유’로 이겨 냈던 것입니다.

온유가 뿜어내는 힘은 대단히 강합니다. 온유한 사람,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온유는 물러터짐도 아니고, 만만한 것도 아닙니다. 온유는 정말 강한 사람, 정말 센 사람이 나 할 수 있는 차원 높은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거칠어야 이긴다.’ ‘온유하면 진다.’는 세속의 속설을 믿지 마십시오. 모세가 오래전에 이미 다 깨버린 철 지난 공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온유는 어디서나, 언제나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고, 성품입니다.

3.
예수님 보게 되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모세는 장정 60만 명의 불평을 40년간 받아냈지만, 예수님은 어느 정도인지 아세요. 수십억 사람들의 거부와 비방과 조롱을 장장 2천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늘까지 받고 계십니다. 어떻게 받고 계십니까?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처럼 분노하지 않고, 온유하게 받아 내십니다. 십자가에서 수모 당할 때 하셨던 기도 기억나십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눅23:34).

예수님이 바보이신가요. 가장 강하신 분인데도, 전혀 분노하지 않고 받아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니까! 이런 말로 넘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이런 온유를 우리도 가질 수 있는 성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11장이 그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예수님만 가질 수 있는 성품이 아니라 너희도 가져야 하는 성품이라는 도전, 초청이 그 유명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부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말 그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살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살기 힘들면 거칠어지고 사나워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사람들을 향해 ‘내게로 오라’ ‘내게 와서 배우라’ 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거칠어지지 말라는 겁니다. 거칠어지지 말고 내게 와서 내가 가지고 있는 온유와 겸손, 너희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와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핑계할 수 없게 만드십니다. 세상이 거칠수록 더 온유하고, 더 겸손해야 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쌍말입니다. 온유한 자가 겸손하고, 겸손하면 온유합니다. 온유와 겸손은 비유하면 온유는 물이고, 겸손은 흙입니다. 물은 어떤 것도 다 품습니다. 강해 보이지 않지만 어디든 흘러갈 수 있고, 물의 부드러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겸손(humility-humus)은 어원이 흙입니다. 흙은 바닥이고 땅이기 때문에 겸손입니다. 겸손은 한마디로 하면 바닥 경험입니다. 바닥 경험이 뭡니까? 세상을 아는 경험이고, 인생을 아는 경험인데, 바닥 경험을 통해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예수님 보십시오. 예수님은 물이셨고, 흙이셨습니다. 누구든 다 만나셨고, 만난 이마다 품으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이가 바닥에서 밟히십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이 구원을 만들어 냅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와서 이 위대한 구원의 성품, 구원의 길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배워야 합니다.

4.
온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온유하지 않기 때문에 얻는 것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좋아하면 안 됩니다. 온유하지 않아서 얻는 것보다 온유하지 않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게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온유하지 않게 되면 깨져서는 안 되는 관계가 깨집니다. 치명적입니다. 온유하지 않은 것은,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습니다. 화낼 사람은 나 말고도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품어주는 사람, 온화한 사람은 깔려 있지 않습니다. 이걸 하라는 겁니다. 온유한 사람이 고수고, 실력자입니다. 溫柔는 따뜻할 溫 자에, 부드러울 柔, 순할 유자입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게 온유입니다. 영어로는 gentleness. 신사가 gentleman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신사라는 겁니다.

우리 안에는 악만 있지 않습니다. 악이 아무리 뿌리 깊더라도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는 선한 인격이 우리에게는 심어져 있습니다. 하나님도 인격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도 인격입니다. 인격과 인격은 통할 수 있기에 우리가 유한하고, 하나님은 무한하시더라도 단절되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할 수 있는 인격성 안에 바로 온유한 마음, 어진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온유함이 거친 세상 살다 보면 밑바닥에 가라앉게 되는데, 이걸 찾아서 끌어내야 합니다. 이 어진 마음을 끌어내는 작업이 영성이고, 기도고, 사랑이고,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내 안에 있는 선함, 어짐, 사랑을 찾아내야 합니다. 세상이 많이 거칩니다. 화 날 일도 많고, 속상한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아차 하는 순간 삶이 망가질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