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5. 성탄 설교: 성탄절에 들리는 소리(마2:13~18). 양은익 목사.

 

 

말씀: 성탄절에 들리는 소리(마2:13~18)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2:13~ 18)

1.
성탄절 아침입니다. 성탄의 큰 기쁨과 평화가 우리 교회와 이 땅 위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기쁨은 들뜬 기쁨이나, 철없는 기쁨은 아닐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이 들뜬 기쁨이 아니라면 그 기쁨은 캄캄한 밤에 길을 잃고 헤맬 때 길을 인도하는 하나의 밝은 빛과 같은 그런 빛남의 기쁨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도대체 무슨 권세를 누리시려고 이 땅에 오셨는가? 한순간도 편할 수 없는 이 땅에 왜 오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이 질문에 답을 하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해 듣는 마태가 전하는 예수께서 오신 삶의 풍경이 하도 기가 막혀서 드리는 얘기입니다. 예수는 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시고, the Son of God,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건데 분위기를 보면 밝지 않습니다.

경배하러 찾아온 박사들에게도, 또 천사의 소리를 들은 목자들에게도, 육신의 부모에게도 기뻤다는 기사는 전혀 없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셨건만 짙은 어둠으로 꽉 찬 배경이 있을 뿐입니다. 웃음과 환호 대신에 통곡 소리면 들린다고 오늘 읽은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2.
어떤 이들이 그리도 슬피 통곡하면서 울고 있습니까! 칼에 맞아 죽어가는 아이들이 울고 있고, 그 죽어가는 아이를 붙들고 절규하는 어미들이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웃들의 숨죽인 슬픔과 놀람이 가득합니다. 세상 울음 중 가장 아픈 울음이 죽은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우는 어미들의 울음일 것입니다. 이 울음은 너무나 구슬프고 애통한 울음인데 이런 울음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가 탄생하신 날, 슬픔과 울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 슬픈 모습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성탄 캐럴 중 이 슬픈 장면을 기억하고 부른 노래가 드뭅니다. 오늘 나누어 드린 코벤트리 캐럴(Coventry Carol)이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불렀던 성탄의 노래입니다. 외국에서는 이 캐럴을 상당히 장엄하게 부릅니다. 이 노래의 선율 속에 성탄의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아 소개해 드립니다. 죽어 있는 아이를 보내기 싫어 살아 있는 것처럼 품에 안고 부르는 어미들의 노래입니다. Kiri Te Kanawa 가 부른 노래로 들어 보겠습니다.

[Coventry Carol]
Lully, lullay. Thou liitle tiny Child. 자장, 자장. 내 작고 귀여운 아기
Bye,bye, lully, lullay lullay. 바이, 바이, 자장, 자장, 자장.
Thou little tiny Child. 내 작고 귀여운 아기
Bye, bye. Lully, lullay. 바이, 바이, 자장, 자장.

O sisters too, how may we do. 오 자매들 또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For to preserve this day 이날을 지키려면
This poor youngling for whom we do sing. 이 가엾은 어린 것들을 위해 우리는 노래하네
Bye, bye, lully, lullay. 바이, 바이, 자장, 자장.

Herod, the king, in his raging, 격노한 헤롯 왕은
Charged he hath this day 그로 인해 이루어질 이 날의 예언대로
His men of might, in his own sight, 힘세고 추종하는 자들에게
All young children to slay. 모든 어린아이들을 죽이라 했네.

That woe is me, poor Child for Thee! 비통하도다, 가엾은 아이들
And ever mourn and say, 슬퍼하지도 말하지도 마라.
For thy parting neither say nor sing, 작별을 고하지도 노래하지도 마라.
Bye, bye, lully, lullay. 바이, 바이, 자장, 자장.

어머니들은 눈물이 좀 나셔야 하는데… 이날 베들레헴에서 죽은 아이가 20명 정도이고 인근 지역까지 합하면 30명 정도의 아기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숫자가 작아서 실망했습니까? 아닙니다. 너무 작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아이 한 명은 그 어미에게는 전 우주입니다.

3.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봐야 할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삶의 정황, 삶의 현실입니다. 도대체 이 꼴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왜 이런 것입니까? 힘 있는 자, 헤롯입니다. 잔인한 사람입니다. 자기 아들과 아내도 죽였던 사람입니다. 죽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이 힘 있는 자가 자신의 권력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싹부터 자르겠다고 아이들을 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바로 이런 세상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의 현실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헤롯 같은 무자비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 휘두르는 칼에 맞아 죽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눈물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그렇게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 사이의 긴장을 성경은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일차적인 메시지는 세상에는 아픔이 있다는 것, 그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 세상은 불의하다는 것, 자신에게 불리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봐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이 성탄을 기뻐하면서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과시하지 말고, 영광과 욕망에 취하지 말고 진중하고 긴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현실 위에 교회와 성도들이 서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지금과 같은 수모를 계속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이런 세상의 불의와 아픔에 저항해야 하고, 눈물 가득한 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눈물을 씻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예수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뜻을 모두 다 놓치게 됩니다. 기독교는 이런 세상에 저항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검을 줄 테니 싸우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산속에 들어가 조용히 자신의 안락을 위해 수행하는 고요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싸움입니다. 싸우지 않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세상이 이러한데, 어떻게 싸우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생은 늘 싸움이었습니다. 싸우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탄은 이러한 기독교의 긴박한 시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예수님은 베들레헴 학살에서 살아남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습니까? 헤롯이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전달받고 애굽으로 피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가지 않았다면 그 죽어간 아기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의 도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는 무고한 아이들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 또한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으로 인해서 일어난 이런 비극적인 일을 나중에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비장하게 자신의 길을 가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는 말씀을 오늘 본문의 배경에서 읽게 되면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주님의 비장함을 보게 됩니다. 무고한 아기들의 피 값으로 자신이 살아난 것을 아셨기에, 이제는 자신의 피 값으로 자신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새롭게 보고 도전받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진입하시는 날부터 세상의 지독한 현실과 싸우셨고, 아프셨지만 결국은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이보다 위대한 사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위대한 일을 믿는다면 우리도 위대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악과 싸워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어떤 일로 힘들어하고 있고, 어떤 일로 눈물을 짓고 있습니까? 지지 말고 예수님처럼 이겨 냅시다. 성탄절 아침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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