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30. 주일 설교. 성품론 9: 양선(Goodness, 갈5:22~23, 엡2:10). 양은익 목사.

 

 

성품론 9: 양선(良善)(갈5:22~23, 엡2:10)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1.
송년 주일입니다.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 속에 지낸 한 해였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격려를 송년 예배를 통해 놓치지 마시고 잘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소리보다 성령의 소리를 잘 들으시는 송년 주일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성품론 계속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양선입니다. 오래 참음, 자비, 양선입니다. 양선은 요즘은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 선하다, 착하다. 영어로 Goodness입니다. 요즘 한글 성경에는 선함, 선행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섯 번째 성령의 열매입니다.

지난 시간 꼬부랑 할머니 얘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일곱 모의 두부를 일곱 손주 주려고 만들어 산을 넘어가는 길에 배고픈 짐승들 만나 나눠 주던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자비(kindness)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자비를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양선입니다. 한결같이 좋은 모습들이지만 만만치 않은 세상이 가지도록 도와주지를 않습니다. 착한 이들을 보면 오히려 우습게 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이제는 선하게 살려면 웬만큼 각오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선하게 살려면, 죄송합니다. 쪽팔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본전 뽑을 생각도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잘해 좋으니 당신도 잘해 줘야지. 이런 기대도 접어야 합니다. 배신당할 각오도 해야 합니다. 선을 베풀지만, 악으로 돌아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선하게 산다는 것, 만만치 않은 일이 돼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포기할만한 상황이지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지독해지고, 사나워져도 착함과 선함을 그리스도인들은 포기하면 안 됩니다. 포기하기에는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세상이 악해질수록 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오기’를 가져야 합니다.

2.
바울은 엡2:10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재케 하신 이유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존재케 한 이유를 바울은 ‘선한 일’과 연결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고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창조 때 하나님은 매번 ‘좋다’ ’Good’ 하셨습니다. 창조하신 모든 것이 좋으며, 선하다는 것입니다. 악이 없었습니다. 선하게 창조된 사람은 선한 존재가 돼서 선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거듭난 새 사람으로 부르실 때도 하나님은 선한 존재로 부르시고 선한 일을 하게 하심으로 악한 세상을 고쳐 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디도서 2:14에서는 선한 일과 구원을 연결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불법과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보면 착함과 선행은 힘들다고 포기해도 되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안타깝게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원하는 바 선은 하나도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바, 악만 행할 정도로(롬7:19) 죄에 묶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았기 때문에 충분히 선할 수 있는 역량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성령께서 그 힘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사모하시고 적극적으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로 구하고, 그 능력으로 살아갈 때, 착함을 막고 있는 세상에서도 착하고,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착하지 않은 모습과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난리’가 납니다. 교회 다닌다는 죄(?)로 안 들어도 될 욕을 바가지로 듣습니다. 사람들이 입버릇 달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이 소리 앞에 우리는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욕을 듣지 않으려면 정말(레알) 착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뭘 믿는가를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우리의 겉모습, 하는 행동, 하는 말. 이런 걸 먼저 봅니다. 그래서 그 모습이 진실하고, 착하고, 남들 같지 않을 때 인정해 주는 겁니다. ‘저 사람 교회 다니는데… 까다로워. 착한 거 같지 않아. 별로야!’. 이러면 게임 끝나는 겁니다.

선함과 착함이 주는 영향력은 큽니다. 그 영향력에 들어선 이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구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5:16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벧전 2:12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착한 행실, 선한 일의 영향력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욕하다가도 ‘너희의’ 선한 모습을 보고 신앙의 길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뒤집으면 무슨 말입니까? ‘너희의’ 지독한 모습 보면, 정나미 떨어져 도망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 구원에 이르는 부르심의 과정에 우리의 선한 행위를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보잘것없는 나의 작은 선함이 놀랍게도 부르심의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바탕은 착해야 합니다. 선해야 합니다. 바보 같다는 소리 들어도 착한 게 좋습니다. 세상이 나빠지고, 힘들어질수록 어진 그리스도인,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순해 빠진, 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착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순해 빠진 이라는 말이 지금은 욕으로 변질하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순해 빠진, 어진 그리스도인 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4.
오늘은 1년의 마지막 주일인데 올 한해 손에 꼽을 만한 착한 일 얼마나 떠오르십니까? 많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더 많기를 바랍니다. 영상 한 편을 보겠습니다. 선행의 훈훈함을 느껴 보십시오. 선행을 하는 한 청년의 고군분투가 나옵니다. [영상]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 한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젖지만, 나중에는 함박웃음을 띠고 있습니다. 마지막 자막에 나온 것처럼, 선행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도 절실합니다. 거창할 필요 없습니다. 보신 것처럼 작은 몸짓, 작은 사랑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마 10:42절 말씀 기억해 보세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대단한 선행이 아닙니다.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만 줘도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선행은 규모가 아니라 자세고, 마음입니다. 작고, 크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 선은 작아도 충분히 귀하고,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영상이지만 저 청년이 우리들의 모습, 우리 자녀들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의 기도입니다. ‘주여 뜻하시는 것을 명하시고. 명하시는 것을 주시옵소서’. 주님은 선하게 살기 힘들다고 항변하는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어질게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 그리고 그 힘을 주십니다. 나중에는 상급까지 주십니다. 할 만합니다.

양선의 삼각형입니다. 첫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신뢰함이 없이는 악한 세상에서 선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저력이라고 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세상의 악에 대항해서 싸우시고 선함을 드러내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 두 번째 요소인 ‘너’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에서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고마웠다’라는 이야기를 배우자에게서, 이웃에게서 듣는다면 여러분들은 착하게 산 것입니다. 더 이상의 찬사는 없습니다. 이 고백을 많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꼭짓점은 ‘나’입니다. 선행의 주체는 나입니다. 내가 먼저 선해야 합니다. 독해지라는 세상의 압력에 지지 말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선해져야 합니다. 이 힘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어제가 새해를 시작한 날 같은데 어느덧 송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미운 짓, 아픈 짓 끊임없이 하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인생 육십, 칠십에 금방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어리석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선한 모습 가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 가십시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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