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9. 주일 설교. 성품론 6: 평화(갈5:22~23. 롬12:18). 양은익 목사.

 


말씀: 성품론 6.  평화(갈5:22~23, 롬12:18)

1.
오늘 대림절 2번째 주일입니다.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유대인 랍비가 숙제를 냈다고 합니다. 다음 시간까지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것 세 가지만 적어 오라 했습니다. 학생들이 적어온 것을 보니까 제일 많은 게 명예, 건강, 돈이었다고 합니다. 랍비는 ‘이거 가지고는 안된다. 정말 중요한 게 빠져 있다. 너희들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평화가 없으면 명예도, 건강도, 돈도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해줍니다. ‘가화만사성’. 화목하게 지내는 게 최고라는 것입니다.

평화는 참 귀한 가치이고, 귀하기에 우리가 가져야 하고, 품어야 할 성품입니다. 평화가 세 번째 성령의 열매로 주어진 이유일 겁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사랑과 기쁨이 있을 때 평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2.
평화를 만들고, 평화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평화를 말할 때 꼭 봐야 하는 기도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성 프란시스의 기도)

안타까운 것은 이토록 좋은 평화가 참 어렵고, 잘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평화라는 게 어떤 상태입니까? 갈등이 없이 화목한 상태가 평화인데 세상은 평화가 아니라 불안과 위험과 갈등과 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평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평화는 가능한가? 대단히 회의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묻고 있는 게 있습니다. 전쟁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은 왜 그치지 않고, 계속 반복되는가? 인간은 정말 전쟁을 넘어설 수 있는가?

통계 몇 개 가지고 나왔습니다. ① 2017년 세계 난민 동향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난민은 고향과 조국을 떠나 피해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난민이 2017년 한 해에 6800만입니다. 남한 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산으로, 사막으로 목숨 걸고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② 유명한 사진입니다. 2015년에 그리스 섬에서 발견된 아이의 시신입니다. 아일린 쿠르드(Aylan Kurdi)라는 3살짜리 시리아 난민의 아이입니다. 이 사진으로 인해서 많은 나라가 난민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지금은 ‘그때 우리가 순진했다’ 그러면서 다시 난민들을 막고 있습니다.

③ 이 표는 2000년부터 2016년까지의 테러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통계인데,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세계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긴 평화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하지만 평화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영토를 가지고 싸우는 고전적인 전쟁은 잘 안 보이지만 이제는 한 나라와 지역 안에서 이념과 종교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하고 있습니다.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외국 학자가 하는 뼈아픈 얘기 들었습니다. 한반도에는 세 개의 한국이 있다는 겁니다. 북한. 진보 남한. 보수 남한. 이런 싸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사는 것 차체가 전쟁입니다. 평화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평화는 심각한 상태입니다.

3.
예수님 탄생하던 날 밤, 천사들이 양치던 목자들에게 한 말 기억나십니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로다’ 평화가 없는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평화의 왕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직도 평화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여러분들은 평화의 왕을 따르는 분들인데 여러분들의 삶과 여러분들의 마음 결에는 평화가 어느 정도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의 마음과 가정에 평화가 있으십니까? 가지고 살던 이런저런 불화들이 깨지고 평화의 기미가 보이십니까?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더러 평화의 열매, 평화의 성품을 가지고 살라고 하십니다. 평화를 만들라 하십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에서 바울도 말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나와 네가 화목하고, 평화하는 게 얼마나 힘들면 ‘할 수 있거든’이라는 조건을 붙였겠습니까? 결국 무슨 얘기입니까? 평화하는 게 힘들지만, ‘가능하면’, ‘힘들더라도’ 평화하라는 것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추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 뜻깊은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쪽팔리더라도 싸우지 말라는 겁니다. 쪽팔려도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게 자존심 접지 않고, 싸우다 망하는 것보다 낫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존심에서 안 밀리려고 할 수 있거든, 가능한 싸우는데, 바울은 할 수 있거든,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4.
평화의 삼각형이 있습니다. 평화의 성품, 평화의 아름다운 결을 가진 자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 타자와 화목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때 자신과도 화목하고, 나 아닌 이웃, 타인에게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 싸우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싸우고, 이웃과도 싸웁니다. 너와 화평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힘듭니다. 평화는 이 세 관계가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만들어집니다. 하여, 여러분들 하나님과 잘 지내고, 가까이 지내십시오. 하나님과 화목할 때 평화의 하나님을 만나, 세상 사느냐 좁아지고, 불안했던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평화는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선물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게 이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빌 4:6~7. 새 번역) 무슨 말입니까? 염려가 있게 되면 평화할 수 없으니 ‘기도’로 염려를 이겨 내라는 것입니다.

평화가 깨질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시 기도하는 분 계세요. 훌륭한 겁니다. 여행도 하고, 영화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도는 꼭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야말로 무너진 내 삶을 복구시키는 최고의 힘입니다. 무너진 내가 복구되야 평화가 살아납니다. 이게 안되면 위험합니다. 갈 5:15에서 바울이 경고합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게 조심하라’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한다는 겁니다.

삶을 망치지 않으려면 ‘사이좋게’ 지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이좋게’는 평화의 우리말입니다. 사이좋게 지내야 평화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고, 나와 사이좋게 지내고, 너와 사이좋게 지낼 때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만들어집니다.

5.
다른 이들을 대하는 내 마음의 심성, 내 마음의 결이 어떤가 한번 살펴보십시오. 부정할 때가 많으세요, 긍정할 때가 많으세요! 오해가 많으세요, 이해가 많으세요. 비난이 많습니까? 칭찬이 많습니까? 보복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십니까? 용서가 많으십니까? 편견이 많으세요. 인정이 많으세요. 모든 불화, 모든 분쟁의 밑에는 부정과 오해와 비난과 보복과 편견이 깔려 있습니다. 사이가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사이가 좋아지려면 별 수 없습니다. 나 아닌 너, 다른 사람에 대한 감각, 감수성, 감성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힘들 때 함께 아파해 주고. 너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을 때 평화가 만들어집니다. 평화의 성품을 갖는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감성,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기심이라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너를 인정하고, 받아 주는 것보다 인정하지 않고 제거하는 게 더 편합니다. 살인이 뭡니까? 타인을 제거하는 최고의 방법이 살인입니다. 제거해서 존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살인입니다. 증오와 혐오와 비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오와 혐오를 통해 그 대상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이런 악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고,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몸으로 끌어안으면서 배워나가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감성은 절대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6.
한 번에 한 번씩,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극진’(極盡) 하기 시작할 때, 극진이라는 말 오랜만에 들어 보지 않으십니까? 극진히 뭡니까? 마음과 힘을 다해 더 할 수 없는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극진인데, 이런 극진함이 있을 때 비로소 꽁꽁 닫혔있던 마음이 열리고, 풀려서 평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 대단하다는 것 아시지요. 대충 해서는 안 풀립니다. 극진해야 됩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와 너 사이에 평화가 만들어진다면 극진할만합니다. 극진한 것은 비굴한 것도 아니고, 손해 보는 것도 아닙니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모습 기억나십니까? 땅 때문에 문제가 생기자,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창 13:9) 롯에게 선택권을 줘 버립니다. 생존이 달린 문제인데도 그렇게 합니다. 얼마나 ‘극진’ 합니까? 이 극진함과 양보가 평화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십자가 보십시오. 십자가는 주님의 극진함입니다. 그 극진함이 극진함을 받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우리를 구원한 것이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 하나님과 나와 너의 평화를 가져다준 것입니다. 극진이라는 말이 다시 살아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극진하십시오. 자신에게도 극진하십시오. 극진히 필요한 사람들, 주변에 있다면 먼저 극진하십시오. 비둘기 같은 평화가 여러분들 머리 위로, 여러분들의 가정 위로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평화는 우리 시대의 숙제입니다. 평화하기 힘든 시대에 주님은 화목하고, 화평하며, 평화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숙제 잘 풀어내, 평화의 열매, 평화의 성품 가득한 여러분들 되시기를 성탄에 계절에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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