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7: 이제는 함께 해야 한다.(막3:13~19)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막3:13-19)
‘사람은 만날 때 배운다’(It’s when we meet someone that we learn something)는 격언이 있습니다. 평범한 말이지만 많은 가르침과 도전을 주는 말입니다. ‘배운다’를 ‘변한다’(change)로 바꿔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만날 때 배워 성장하고 변화될 가능성이 그만큼 많은 법입니다. 요즘은 만나면 서로 싸우고 다투며 갈등이 많기에 더더욱 마음 깊이 받아서 새겨야 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은 나 아닌 너, 타자입니다.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너, 타자를 만날 때 배우고 변하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만나든 우리는 잘 만나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들을 친구로, 연인으로, 스승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로 만나 위로를 주고, 연인으로 만나 사랑을 주고, 스승으로 만나 배움을 주게 되면 삶이 얼마나 풍성해지겠습니까! 주변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에게 위로를 주는지? 사랑을 주는지? 배움을 주는지? 친구와 연인과 스승 중에서 배움을 주는 스승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스승이 사라진 시대라고 하지만 뭘 하든 성장하려면 ‘앞선이’가 있어야 합니다. 앞선 이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이면 훨씬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스승이라는 존재는 거부해도 안 되고, 무시해도 안 됩니다.
영적 성장에도 스승, 멘토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영적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끊임없이 만나고,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오늘 설교는 자칫 밋밋하고 당연한 설교로 들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받아내시면 신앙의 성장에 크고 좋은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함께 봤던 격언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변한다.’ 이 명제를 오늘 아침 잘 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이제는 함께 해야 한다.’로 돼 있는데, ‘이제는’ 정말 더 늦기 전에, 스승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해서 배워야 하고, 변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열 두 명의 제자를 세우는 잘 알려진 장면입니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14절에 나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14~15절) 부르심의 첫 번째 이유는 ‘함께 하기 위해서’, 두 번째 이유는 ‘보내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제자들 옆에 거느리면서 경호원을 거느린 보스처럼 폼 잡기 위함도 아니고, 몰려드는 많은 사람을 정리하기 위한 차원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1. 주님과 함께 하기
주님께서 함께하려고 한 이유는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이 땅 가운데 나타나는지.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이들을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엎드려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지.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직접 보여 주면서 험한 세상, 상처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날까지 전할 것을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로 불렀으니 스승으로 가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고, 닮지 않고 이 중차대한 길을 갈 수 없기에 제자들과 同苦同樂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스승의 마음을 전해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의 마음은 같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 모두가, 자신과 함께하면서 그 마음을 본받고, 배우고, 따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첫 번째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스승이신 주님께 배우고, 배운 대로 살고, 그래서 예수님 만나 변했다는 소리 듣고, 스승의 성품과 섬세한 감정까지 닮아내야 합니다. 이 일을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주님과 깊게 동거해서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투철하고 명확한 신앙’이 절실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무너지고, 짓밟힌 교회의 영광과 신자 됨의 자부심과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교회 현장에서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자들인 우리 자신, 사람입니다. 건물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교인이 적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 개개인, 사람은 무너지면 안 됩니다. 사람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지금은 건물도 있고, 돈도 없지 않습니다. 목사도 많고, 교회 나오는 이들도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신자들, 우리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려 애쓰고, 주님을 경외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주님을 따르려는 신자가 많아져야 살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는 이 기본 신앙 자세를 견지하려는 겸손한 신앙인이 많아져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아찔한 사진 한 장입니다. 악보입니다. 서초동의 가장 유명한 교회, 가장 건물이 화려한 교회에서 만든 찬양곡입니다. 찬양 제목이 뭡니까? ‘주님께서 세운 목사님’. 1절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찬양 충만 우리 목사님. High Praise 깊은 기도로 온 성도 하나 되어 주께 영광 찬양 드리네. Vision Maker 우리 목사님. 창조 은사 아이디어 맨, 예배 속에 생기 불어 부흥 기대해. 목사님 뜨거운 찬양. 목사님 거대한 비전. 목사님 순수한 열정. 목사님 따뜻한 사랑. 주님께 감사해. 주님께 감사드리세’
3절로 된 찬양으로 스승의 날 만들어서 부르려고 준비했던 찬양이라고 합니다. 자기 교회 목사님, 존경하고, 사랑하는 거야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교회 부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목사가, 연로하신 원로 목사님이 생존해 계시는데도 아무리 스승의 날이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낯 뜨거운 찬양을 예배 중에 부르겠다고 하는 ‘이상한’ 발상이, 최고의 교회라고 자부하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겁니다. 이 노래가 실제로 예배 중에 불렸다면 정말 큰 일 날 뻔했습니다. 다행히도 원로 권사님들이 막으셔서 이 찬양곡이 예배 때 불리는 불상사는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을 별 문제의식 없이 한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너지고 있는 증거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심기일전해야 합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제대로 다시 배워야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참된 스승으로 여기고 그분을 닮아내려 애쓰는 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애쓰며 주님과 만날 때 우리의 삶은 온전히 변화됩니다. 주님은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것. 기억하는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기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것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배우고 성장하듯이 동료 그리스도인들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12명의 제자는 주님이 부르는 순간 다른 제자들과도 함께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함께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십인십색(十人十色)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 다릅니다. 교회에서 다름의 문제로 고통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16절부터 나오는 제자들 명단에서 이들의 특징을 두 가지로 정리 할 수 있습니다. ① 별 볼 일 없다는 것과 ② 그들은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자 중에 특출난 사람 있나 찾아보십시오. 눈 씻고 봐도 없습니다. 스펙을 내 세울만한 제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 나가서 함께 해서는 안 되는 아슬아슬한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주님은 어울리기 힘든 사람들을 한 지붕 아래 모아 놓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평행본문에서 주님은 12명의 제자를 뽑으시기 위해 밤새 기도한 것으로 나옵니다.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12명을 선별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제자들을 다 알고 뽑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같이 할 수 없는 많이 다른 이들을 뽑으신 것입니다. 명단에는 극과 극인 사람이 섞여 있습니다. 가나나인 시몬과 세리 마태입니다. 한 사람은 로마에 무력으로 저항했던 열심 당원(가나나인) 출신이고, 한 사람은 로마를 가까이했던 세리 마태입니다. 과도한 애국자(시몬)와 과도한 매국노(마태)입니다. 같이 하기 힘든 사람들임에도 주님을 이들을 불러 제자 삼으시고,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모르고 이렇게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다 아시지만, 의도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극복해서 주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하는 사인일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단은 앞으로 태동할 교회의 모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중간에 막혀있는 수많은 담을 헐고 받아들이는 신비한 곳입니다. 극단적으로 다른 이들이라도 주 안에서 하나 됨을 배우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많이 반성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하나 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서로 ‘받아’ 주면 됩니다. 다름을 극복 할 수 있는 길은 ‘받아줌’에 있습니다. 잘난 사람도 배척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줘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도 받아줘야 합니다. 부자라고 거부하지 말고 받아줘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도 받아줘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아니라면 평생을 가도 만나지 못할 사람을 교회에서는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교회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투투(D.Tutu) 주교의 정의입니다. 교회는 ‘빨주노초파남보’의 각기 다른 색을 가진 이들로 이루어진 ‘무지개 공동체’라고 합니다. 무지개를 보면서 화를 내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무지개를 보면 누구나 좋아하듯이, 무지개 같은 교회를 보면 누구나 다 기뻐하고, 환영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함께해서 ‘하나 되면’ 훨씬 더 강해집니다.
이번 월드컵 우승팀은 프랑스였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사진은 그들이 크로아티아를 이겼을 때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하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마치 아프리카팀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23명의 참가자 중 21명이 이민자 가정 출신입니다. 이들 중에 15명은 아프리카 출신들입니다. 프랑스 대표적 선수인 음바페도 아프리카계입니다.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출신이라고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한 팀이 되어 함께 뛰었고 우승했습니다. 그들을 보고 CNN에서 붙여준 별명이 있습니다. 바로 ‘Rainbow team’ 입니다. CNN은 프랑스팀에게 이 이름을 헌정했습니다.
이 모습에서 강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 좋겠습니다. 서로 다르지만 다른 이들이 함께해서 강해져야 합니다. 만약 혼자라면, 한가지 색이라면 이 강함은 불가능합니다. 전도서에도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4:12)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좁은 마음을 넓게 넓게 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많이 다르지만, 사랑으로 함께하여 가정과 교회를 무지개 공동체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께 배우고, 다른 이들과 함께하면서 사랑으로 받아 줄 때 전도도 가능하고, 귀신도 내쫓는 권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 늦출 수도 없고, 더 늦춰서도 안 됩니다. ‘이제는 정말 함께 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합시다. 서로가 함께 합시다. 오늘 아침 이런 소망을 품고 교회 문을 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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