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22. 주일 설교: 엎드린 사람들(막3:7~12). 마가복음 16.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16: 엎드린 사람들(막3:7~12)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막3:7-12)

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다섯 번의 격렬한 논쟁으로 충돌하신 후, 그들이 변화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자, 그들과의 논쟁을 그만두기로 하신 후 바다로 나가시는 장면을 배경으로 합니다. 7절에 ‘물러갔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물러감을 놓고 그들이 주님을 살해하고자 하는 모의를 시작하자 피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만일 주님께서 피할 목적으로 바다로 물러가셨다면 숨으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숨으신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아마 바다로 물러가신 이유는 이제 유대인들과의 논쟁은 그만 끝내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설득하려던 주님의 시도는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기 위해 바다로 물러갔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예수님 소문은 워낙 퍼져 있었기에 바다로 가시자 마자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유대와 예루살렘, 이두매 지역 -이 지역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사는 곳-, 요단 동편 지역 사람들, 그리고 북서쪽 지역의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에서까지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오고 있습니다(8절).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영향력이 넓게 퍼져 나갔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 와해 시대에 이런 모습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이 복음의 광대한 파급력과 전파력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선물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도 도전을 받읍시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당시의 모습은 권력자, 지배자들에게는 상당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기쁜 소식, 복음이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에 백성들은 새로운 꿈을 갖고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방에서 몰려드는 그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신나지 않습니까? 갈릴리 바다에 모여드는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입니다.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 의지할 것 없는 사람들, 고생을 너무나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소문을 듣고 만나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재촉하여 갈릴리 바다로 모여드는 것입니다.

‘날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지만 날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타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날아 보고자 날갯짓을 시작한 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그래도 날아보겠다고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떼어 교회 문안에 들어섰을 때, 정말로 그들을 제대로 끌어안아 주어야 합니다. 쉬운 발걸음이 아닙니다. 귀한 발걸음이며 그들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끌어안아 주는 것은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됩니다. 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 찾아오는 장면은 정말 가슴 뭉클한 장면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똑같이 예수님 소문을 들은 후에도 ‘간다고 별수 있겠나?’ 하면서 발걸음을 떼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에 몰려든 사람들은 움직일 줄 아는 사람, 즉 반응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반응하며 움직인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복음의 소식이 들려올 때, 반응하며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기에 중요하며, 삶의 분위기가 반전될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여러분들도 반응하는 믿음의 소유자, 반응하는 영성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7~8절에는 이런 움직이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나옵니다. 복음의 소식에 대단한 반응을 보이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귀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제 마음을 강하게 두드린 구절은 찾아온 이들이 ‘예수님께 엎드렸다’는 구절입니다. 이 ‘엎드림’은 아주 귀한 모습입니다. 본문에는 두 번의 엎드림이 나옵니다. 병자들의 엎드림 (10절) 과 더러운 영 가진 자(귀신 들린 자)들의 엎드림입니다(11절). 귀신 들린 자들은 마음과 영혼이 아픈 자들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엎드렸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있는데, 10절 마지막에 나오는 단어 ‘몰려왔다’는 단어가 사실은 ‘엎드렸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10절. 11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는 그가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질병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그 앞에 엎드려 그를 만지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11. 그리고 더러운 영들이 그를 볼 때는 그 앞에 바싹 엎드렸다.’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이 아픈 이들이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앞에 엎드린 겁니다. 몸과 영혼의 아픔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분께 엎드린 겁니다. ‘엎드린다’는 의미는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엎드리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고, 얼굴을 땅에 대야 합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엎드린 그분을 향해 순복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의 표현입니다. 자존심 강한 사람은 엎드리지 못합니다. 피치 못해 엎드렸다 해도 그 엎드림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자존감을 무너뜨리면 자살도 시도합니다. 맨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엎드리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약자의 엎드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간절한 엎드림, 경배와 인정의 엎드림을 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처세술로 비굴하게 엎드리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엎드림의 순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우상들에게 지배당하며 굴복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엎드릴 유일한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이 엎드림은 우리를 살려냅니다. 여러분들은 요즘 얼마나 깊게, 간절하게 엎드리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이 엎드리시는 대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까? 누구에게 엎드린 줄도 모르고 엎드리셨습니까? 여러분들은 얼마나 자주 예수 그리스도께 엎드리셨습니까?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을 철저하게 엎드립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몸이 엎드리면 마음도 무릎 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몸의 엎드림만 엎드림이 아닙니다. 기도도 엎드림입니다. 예배도 엎드림입니다. 사람 앞에 엎드림은 수치가 될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엎드림은 영광이며,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여러분들 모두에게 이 엎드림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개신교는 엎드림의 은혜가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불편한 점들을 개선하면서 생긴 변화입니다. 무슬림 사원과 절에는 성전에 의자가 없습니다. 마루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불편해도 당연하게 생각하며 무릎 꿇고 엎드립니다. 우리 교회와 개신교는 성전에 의자를 놓음으로 인해 무릎을 꿇는 기회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이렇게 엎드림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1960년대 초반 대부분의 교회는 의자 없이 마룻바닥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성도 수가 많은 교회는 신발 찾아 신는 것도 큰일이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커가면서 의자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성도 수가 작은 장점을 살려 마룻바닥에서 무릎 꿇는 예배를 드릴 수 있지만 이렇게 하면 이단으로 보거나 불편함 때문에 성도 수가 줄게 되는 문제로 과감하게 시행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기도실이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는 곳, 기도원의 마룻바닥에서 무릎 꿇고 엎드려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그 엎드림의 은혜를 아실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로 예배하며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기쁨으로 큰 은혜를 부어 주실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릎 꿇음, 엎드림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구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더 온전히 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엎드리며 순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을수록 복음은 더 위대한 파급력을 갖고 확산하며 퍼져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린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십계명의 제일 계명이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엎드리라는 계명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도 엎드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내 삶 가운데서 오로지 주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인정과 다짐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시대의 가장 귀한 엎드림은 언제나 어디서나 기꺼이 신분을 노출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선언합니까? 자신이 신자인 것을 당당하게 드러냅니까? 이렇게 드러내고 선언하는 것이 제일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자로써의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와~ 하나님을 믿으면 저렇게 살 수 있구나! 그런 강렬한 이미지를 그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능력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보지 않으려 하고,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들에게 하나님을 보게 해줘야 하고, 복음을 듣게 해줘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손에 든 핸드폰만 보고 삽니다. 그 안에서 세계를 봅니다. 아이들, 청소년, 청년, 중년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핸드폰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들이 보는 것이 어떤 것 입니까? 연예프로, 재방송된 연속극, 게임, 만화, 영화 등 입니다. 모두 재미를 주고 흥미를 주는 것에 빠져 있습니다. 재미와 흥미를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이야기와 더 오래전의 하나님 이야기는 전혀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뚫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덧없는 것임을, 짧은 재미임을 알게 해줘야 합니다. 그들은 아주 단단하고 견고한 장벽을 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첫째, 보는 것, 둘째, 보게 하는 것, 셋째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방법은 오로지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이 사신 삶을 살아내면서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삶은 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재미와 이 세상의 것만을 보는 그들에게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순종의 삶을 살아냄으로 그들이 우리의 삶을 보게 하는 것,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 이것이 그들을 뚫고 들어가 복음을 전할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절대적 엎드림의 순복하는 순종의 삶, 천연기념물 같은 삶을 살아냄으로써 그들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갑니다. 똑같이 나이 들어가고, 똑같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똑같이 자녀들 교육 문제와 씨름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우리의 방법은 그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음을 통해 해결해 나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 줄 때 우리는 그들을 뚫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신앙의 출발이 무릎 꿇음, 엎드림입니다. 여러분, 엎드림은 많은 것을 변화시킵니다. 엎드리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자존심 강한 뻣뻣한 무릎을 엎드리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이 정말 엎드리실만한 분입니다. 엎드림을 ‘Up dream’이라고 표현합니다. 정말 맞는 표현입니다.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됩니다. 이루지 못한 꿈들을 다시 꿈꿀 수 있는 희망을 주실 것입니다. 엎드리지 않으면 일어나는 모든 일은 속상하고 섭섭하며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쌓게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Down dream’입니다.

엎드리시고 뚫고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게 하십시오. 왕 되시는 주님께 엎드리는 큰 특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해졌습니다. 엎드린 우리를 주님은 손잡아 주실 것입니다.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 찾아 삼만리로 반응한 그 믿음이 여러분들의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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