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15. 주일 설교: 오그라든 마음(막3:1~6). 마가복음 15.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15: 오그라든 마음(막3:1~6)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막3:1-6)

오늘도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두드려 주실 것입니다. 말씀이 들려질 때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말씀을 주시네’하는 감동과 감사가 여러분들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도 지난주 말씀처럼 안식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난주에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서 먹는 장면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논쟁이 있은 후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오늘 또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1절). 주님이 싸움 거는 것을 좋아하시는 싸움꾼이라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거대한 유대인 무리-주님을 고발하여 죄인으로 몰아붙이려 하는 무리-의 도전에 대해 정면 돌파할 각오를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 법에 의해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급한 환자가 아니면 환자를 고치는 행위를 엄하게 금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신 것처럼 또 안식일 법을 어기시고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고 고발할 현장을 잡기에 혈안이 돼 있는 상황에서 이런 치유의 행위를 일부러 하신 것을 보면 주님께서도 작정하시고 그렇게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병자를 고치되, 그 행위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안식일 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시고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시면서 어떤 메시지를 주시고자 하신 걸까요? 바로 안식일 정신을 알려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그들에게 주님은 안식일 정신을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 정신이 무엇입니까? 안식일 정신이란 자유와 생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의 이 싸움에서 이기셨습니까? 그들의 잘못된 안식일 정신에 대한 큰 깨달음을 줄 수 있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주님의 이 크신 메시지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면 그들 -바리새인과 헤롯 당-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절대 손잡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반 로마적 성향의 국수주의자들이고, 헤롯 당은 친 로마 세력입니다. 함께 손잡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고자 하는 목적에 서로 마음이 맞았기에 손잡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암살 모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전도할 때 사람 마음을 움직여 설득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만만치 않은지 경험하셔서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릇됨이 옳음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사람은 완고합니다. 옳고 맞은 것을 아는 순간에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장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안식일 논쟁 한 복판에 있는 손 마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오늘 회복되고 자아를 찾아가고 자신의 삶을 찾게 되는 우리의 주인공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감정을 이입하셔서 그 주인공이 ‘나’다, ‘내 자녀’다 하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실 때 하늘의 메시지를 듣고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 1절을 보십시오.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소개됩니다. 자세한 소개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손이 못쓰게 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외경에는 그가 석공 일을 하다가 손이 마비된 것으로 나옵니다. 그가 석수(石手)였던 아니던 오그라졌다는 단어가 수동형으로 나옵니다. 이는 이 질병이 선천적 질병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는 사고를 당했던지 질병에 의해서든지 살다가 그 일을 당했음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는 노동해서 먹고 살던 시절인데, 그런 시대를 살면서 손을 쓸 수 없게 된 것은 그의 삶 전체가 절망과 상심의 처절한 상황에 부닥쳐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는 상당히 방황했을 것입니다. 무기력한 상황에 빠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손 마른 사람의 예는 삶의 절망적 상황에서 절망하고 상심하고 방황하고 무기력에 빠진 사람을 대표하는 표본으로 설정된 인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그라든 손은 오그라든 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이 아니라 마음이 오그라든 것입니다. 오그라든 것이 손과 마음 중 어느 것이 더 힘들겠습니까? 마음이 오그라든 것이 더 힘듭니다. 마음이 위축되면 정말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어집니다.

손 오그라든 사람이 주님이 가신 회당에 앉아 있었던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덫을 놓기 위해 그 사람을 이용했다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 가설이 진실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에게 이용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인은 얼마나 비참하게 생각했을지 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인의 자유의사로가 아니고 미끼로 회당에 가야 했다면 당사자는 큰 모욕감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살면서 이런 무력감과 모욕감을 느끼는 상황이 저와 여러분에게는 없기를 바랍니다. 또한 위축되고 절망적인 상황에 계시더라도 오늘 그가 회복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를 들으시고 일어서시는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세 명의 주교가 질문을 받았습니다. ‘생명은 언제부터 시작입니까?’, ‘진정한 삶의 출발은 언제부터입니까?’ 한 주교는 ‘태어나면서부터죠’. 아주 솔직한 답을 했습니다. 두 번째 주교는 ‘잉태되는 순간부터죠’ 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주교가 얘기합니다. ‘삶이 시작되는 것은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 더는 이 세상에 살지 않으시고, 기르던 개도 죽고, 자녀들이 집을 떠나고부터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삶은 어려운 일이 생기는 순간부터가 진정 시작되고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말 잘 듣던 자녀가 말을 듣지 않고 속을 썩이기 시작할 때, 잘되던 일이 힘들어지기 시작할 때, 갑자기 건강을 잃게 됐을 때, 그때 비로소 삶이 진정으로 시작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손 마른 사람도 이 무력하고 위축된 상황, 이 상황이 바로 이제 그가 진정으로 삶을 마주 대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집회서라는 외경 18장 7절은 외경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줍니다. ‘사람이 모두 마쳤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When a man has finished, he is just beginning)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잃어버리게 된 그 절망과 위축의 순간 그것은 끝이 아니라 일어서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그때부터가 진짜 삶의 시작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또 중요하게 받으셔야 할 것이 영적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고 민감하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손 마른 사람에게 오늘 그 영적인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이 기회를 담대하고 용기 있게 붙잡습니다. 우리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상황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두 번의 명령을 하십니다. 3절. 일어나서 가운데 나와 서라 5절. 손을 내밀어라. 두 명령 다 쉬운 명령이 아닙니다. 손이 망가진 이후에 그림자처럼 살았을 사람인데 ‘가운데 나와 서라니요’. 늘 감춰뒀던 손일 텐데 그 손을 ‘내밀라니요’ 여러분 같으면 쉽게 하시겠습니까? 더구나 그 명령을 하는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들과 심각하게 대립하는 중입니다. 4절과 5절에서 논쟁하는 것 보십시오. 치열합니다. 줄 잘못 섰다가 회당을 지배하는 바리새인들의 눈 밖에 나면 가뜩이나 힘든 삶, 더 힘들어질 수 밖에 없는 아슬아슬한 상황입니다.

일어나 나가려니 사람들이 무섭고, 그대로 있자니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는 것 같고. 진퇴양난의 갈림길에서 고민되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위축된 사람이었기에 두려움은 더 컸을 겁니다. 사람은 두려우면 숨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두려움 앞에서 숨는 속성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이 두려워 숨게 된 사건 이후 아담의 유전자가 남아 있습니다. ‘내가 두려워 숨었나이다’(창3:10) 우리는 두려우면 문을 걸고 숨습니다. 위축되어도 숨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없어도 숨습니다.

숨으면 일단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숨으면 지킬 것은 일단 지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어떠한 변화도, 어떠한 새로운 출발도 어떠한 해결도 더는 없습니다. 숨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숨지 않고 이겨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깡과 오기로 버팁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위축되고 절망하고 두려움에 빠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처방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위험하지만, 그 위험 안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있습니다. 아브라함 보십시오. 누가 봐도 적지 않은 나이인데 있는 것 가지고, 살던 대로 편하게 살면 되지 고생스럽게 뭐하러 새길 떠납니까? 세속의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믿고 위험천만한 길 떠나 믿음의 조상이라는 대업을 이루게 됐던 것입니다.

다시 본문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주님께서 일어나라는 명령에 그는 일어납니다. 그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일어납니다. 손을 펴라고 하시자 감추었던 손을 드러내어 쭉 폅니다. 이 폈다는 의미는 자신의 부끄러운 곳, 감추고 싶은 치부, 무력함을 모두 다 open했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용기가 그에게 생겼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생한 음성(생음)이 큰 권위와 권세로 그를 압도하며 그를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들었습니까? ‘일어나라’.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권위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는 자신 있는 말씀도 듣게 됩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게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게 옳으냐! 단 한마디로 그들을 제압하는 모습과 음성을 듣습니다. 감추지 말고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담대한 소리도 듣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과 소리를 들으면서 안 일어날 수 없었고, 안 내밀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어나라’는 말은 ‘다시 살아나라’고 하는 부활의 용어입니다. ‘내밀라’는 말은 ‘힘을 내’라고 하는 격려와 용기의 말입니다. 이 두 마디의 소리, ‘일어나라’ ‘힘내’ 이 음성을 오늘 아침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오그라들고 힘이 빠져 절망하고 두려워 숨으려 할 때, 주님은 ‘일어나라’(부활해라), ‘힘을 내라’ 하십니다. 우리 성령님도 그렇게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이 음성을 듣고 받으십시오. 귀를 막으시면 안 됩니다. 하늘의 음성이 들릴 때 듣고 받고 일어나 부활하시고 회복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위축된 우리를 돕고자 원하십니다.

이 도움을 거절하고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가족입니까? 너입니까? 아닙니다. 막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내 안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내 안의 바리새인’이 최고의 장애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율법과 관습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막고 있다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 경험, 판단 상처 같은 것으로 회복을 막고, 새 출발을 막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겨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위축되고 오그라들 수 있는 삶의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진정으로 삶을 대면하면서 우리의 삶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이런 상황이 오면 오늘 주시는 메시지를 붙들고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함민복 시인의 시 한 편 보고 마칩니다. 미물인 잠자리도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잠자리도 이러할진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날개를 접어서야 되겠습니까?

살다가 힘이 들고 지칠 때면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되뇌어 보지요.

그러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처진 어깨에 힘이 붙기도 하지요.
(함민복,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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