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24. 주일 설교: 파격적인 부르심(막2:13~17). 마가복음 12. 양은익 목사

 

말씀: 마가복음 12. 파격적인 부르심(막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3-17)

무더위가 대단한 기세입니다. 무더위에 지치지 마시고 큰 은혜 받으시고 또 새로운 한 주 시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상당한 도전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편 가르기를 좋아합니다. 편을 가르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죽비로 우리를 깨우쳐 주셔서 편 가르는 우리를 ‘그러지 마!’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많은 것을 받아내시기 바랍니다.

제목이 ‘파격적인 부르심’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당시의 전통과 사회의 통념을 깨시는 대단히 파격적인 주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은 상당수의 많은 인파를 가시는 곳마다 몰고 다니십니다. 주님이 의도하시든 그렇지 않으시든 주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관심의 대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이신 파격적인 모습입니다. 두 장면인데, 첫 장면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 파격적인 장면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 두 가지 파격적인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째 파격적 사건: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심(14절)
세리가 어떤 직업의 사람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지금은 국세청 직원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습니다. 싫어하고 극도의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는 세무 조사받는 당사자들 정도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리는 그 사회에서 가장 혐오하는 직업이었습니다.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동족의 피를 빠는 흡혈귀, 자기 배를 채우고 로마를 위해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세리가 되면 회당에서도 출교 조치하고 제명해 버립니다. 그리고 재판 시 증인석에 설 자격도 박탈해 버립니다. 세리의 사회적 지위는 이방인과 창녀와 동급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많은 무리를 이끌고 다니시는 종교인 반열에 서신 위치에 서게 된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치에 계신 주님께서 그 당시 사회적으로 그렇게 무시당하고 혐오하는 직업을 가진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알면 당연히 천인공노할 사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편견을 깨는 충격적인 모습입니다.

주님의 부르심도 파격적이지만 부름을 받고 바로 따라나서는 세리 레위의 따름도 상당히 파격적입니다. 그 직업의 속성상 제자로 따를 수 없는데 따릅니다. 어떻게, 왜 세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바로 따를 수 있었을까요? 성경 본문에 기록이 나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많은 추측을 해 봅니다. 아마 그의 삶에 수많은 굴곡이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가 어떤 이유로 어떻게 해서 세리라는 직업을 택했는지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악명 높은 직업을 선택한 이유는 돈 욕심이 많았거나 그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무엇인가 절박한 상황이 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갈릴리는 정말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는 세리로 돈을 벌고 돈을 많이 만지게 됐겠지만, 세리로 동족들의 돈을 뜯어내는 그의 직업을 힘들어하고 회의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직업에 대한 이런 갈등과 실망으로 많은 고민을 한 젊은이가 아니면 이렇게 주님께서 부르신다고 바로 직업을 버리고 쫓기가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배 세리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같은 방법으로 일하며 심적으로 힘들어하던 젊은이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심적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도 여러 번 이 세리를 눈여겨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 세관에 있는 그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택하시는 기준은 당시의 사회적 평판이 아닙니다. 그 내면의 아픔, 그 내면의 간절함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께 이 시각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 사회적 평판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가까이할 사람, 아닌 사람을 구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시각을 보고 배워야 우리는 그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 세리 레위가 바로 마태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사회의 혐오 일 순위에 있던 자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약성경 첫 번째 복음의 저자가 된 것입니다. 마태의 뜻이 ‘하나님의 선물’(the Gift of God)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꺼리는 일 순위에 있던 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선물과 같은 존재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사람을 어떤 이유로 배제하지 않으시고, 그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그냥 안아주십니다. 주님의 안아 주심을 받은 자들은 다 살아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마태도 놀랐을 것입니다. ‘아니, 나 같은 사람을 불러주시다니?’ 그 당시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서 일어나기 힘든 부름이 일어난 것입니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다가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일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회개의 결단입니다. ‘이제 뒤돌아보지 않겠다’, ‘과거와 결별하겠다.’. 결단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레위는 몸으로 드리는 회개를 했습니다.

동족들의 돈을 악착같이 갈취하던 그의 직업을 내팽개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이 마태의 회개는 몸으로 하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몸으로 하는 회개, 지금껏 해온 나쁜 행동, 나쁜 삶, 일순간에 끊어버리고 안 하는 이 몸으로의 회개가 진짜 회개입니다. 우리에게도 몸으로 드리는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레위는 그 진정한 회개를 하고 주님을 따라 세리 직업을 버리고 새 출발 하는 것입니다. 이 새 출발과 회복은 주님으로 인함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6) ‘오래 참으심’ 귀한 단어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를 오래 참아주십니다. 이 ‘오래 참아줌’은 우리들이 사람을 볼 때 가져야 할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핍박자이며 박해자였던 사울을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음’. 이 주님의 마음을 배워서 행하면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디딤돌이 될 수 있고 그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배제와 포용’의 마음이 소용돌이칩니다. 이 두 마음은 서로 긴장감을 조성하며 작용합니다. 배제는 참아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배제하면 그 사람의 구원은 없습니다. 반면 포용은 오래 참아 주는 것입니다. 포용하면 구원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세상에는 포용해줘도 끝까지 변화되지 않는 정말로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변화되지 않는 악한 이를 포기하면 정말 그 사람은 끝입니다. 기회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어미, 아비가 자식을 끌어안듯이 포용해 주는 일입니다. 이 일이 불러주신 우리와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는 구원에서는 상식적이 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세리 같은 자들을 참아주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 오래 참음과 포용을 통해 구원이 일어납니다. 내 성격대로 내가 편한 내 본능대로 하면 한 인생을 구원시키는 일은 요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포용해주고 오래 참아주면 한 인생을 그야말로 ‘파격적인 구원’으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은 그냥 쉽게 저절로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 문 앞에 ‘세리 사절’, ‘연봉 일억 미만 사절’이라고 써서 붙여 놓는다고 해 보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눈에 보이는 그런 글을 써 붙이지 않았어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언의 배타적인 메시지들이 교회에는 상당수 존재합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또한 유망한 결혼 시장이라는 개념이 존재합니다. 어느 교회 가면 학벌 좋고 부모 배경 좋은 신랑감, 신붓감이 많다는 소문들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는 미묘한 계층의 필터링이 존재합니다. 자녀의 인생 역전을 원하는 부모들은 얘들을 이 교회, 그 모임으로 밀어 넣기 위해 애들을 씁니다. 그러나 결과들은 별로입니다. 별 매력이 없습니다.

교회의 강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쓰셔서 자칭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교회의 강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어엎으십니다.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보기 싫은 사람, 그래서 망하면 좋겠다고 여기는 사람, 그래서 접근하기도 꺼려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그 싫어 죽겠는 사람을 참아 주시고 또 불러 주셔서 그를 하나님의 선물과 같은 인생으로 바꾸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 사람을 보고자 하는 것을 바꾸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오염된 죄 많은 세상을 살다 보면, 생각이 좁아지고 경직되어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편견을 조금만 깨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안 돼 그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하나님의 선물이 될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람을 보는 편견’ 이 시간 바꾸시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보는 시선, 편견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꾸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으시면서 기도해 주시는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은 가망 없다’ 정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고자 하는 오만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시간 겸손한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변해야 할 것은 내 안에 더 많습니다.

2. 두 번째 파격적 사건: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 (15절)
세리 마태는 주님의 제자로 불러 주심에 너무나도 감사하고 감격하여, 자신과 같은 세리들과 죄인들도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 일행을 초대합니다. 주님은 식사 초대에 응하셨고 유대 정결법에서 금하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파격적 행동을 통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 보고 있음에도 유대 율법을 어기면서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신 것에 대한 5가지 에피소드(막2:1~3:6)가 나옵니다. 율법적으로 따지며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나 주님은 두 가지 유명한 말로 제압해 버리십니다. 그들의 질문은 ‘왜 율법이 금하는 부정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함께 식사하냐?’(16절) 입니다. 답을 주신 주님의 2개의 유명한 어록이 나옵니다. 첫 번째 어록,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두 번째 어록,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2:17,새번역)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칭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너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리 죄인같은 거부받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르십니다. 일반 종교의 원리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면 안된다’입니다. 그래서 더 조용한 곳, 산속, 피정 등을 통해 세상과 떠나서 거룩해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까마귀 노는 세상 가운데로 가서 그들을 백로로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두면 빛으로, 그들이 썩어가면 소금 역할을 해서 그들을 살려내고 그들을 고쳐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이 주님의 원리를 잘 받으면 이 세상 가운데로 뛰어드는 투쟁적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한복판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소명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주변 사람들과 이 사회가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나’ 입니다. 내가 믿음 가운데 충만하면 내가 어디에 가더라도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죄인들과 어울리셨으나, 죄인이 되시지 않으셨습니다. 죄에 동화(同化,Assimilation)되어 죄인이 되지 않으시면서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의 정결법을 따르면서 고고하게 분리(分離, Isolation)해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대로 해야 합니다. 세상 속 곤고한 현장 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 가운데 들어가셔서 그분의 미션(Mission, 사명, 임무, 전도)을 수행하시면서 죄에 동화되지 않으셨고, 분리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세상 속에서 동화되지 말고, 분리되지 말고,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주님의 미션을 이루셔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미션을 어떻게 수행하시는지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유유상종하는 배제 공동체가 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편 가르기가 없는 유일한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오래 참으십시오. 함께 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순종하며 따르셔서, 오래 참고 함께 해 준 이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는 감격된 순간을 보고 기뻐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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