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17. 주일 설교: Before & After (막2:1~12). 마가복음 11.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11: Before and After(막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막2:1-12)

오늘부터 마가복음 2장입니다. 2장을 통해서도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귀한 메시지를 잘 받아 내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 들어가기 전에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 가운데 나오는 ‘아테네의 타이몬’의 대사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대사의 Before and After를 잘 보시고 대사 마지막에 나오는 ‘눈에 보이는 신’이 무엇인지 알아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이만큼만 있으면 검은 것은 희게, 추한 것은 아름답게 만든 나네. 나쁜 것은 좋게, 늙은 것은 젊게, 비천한 것은 고귀하게 만든다네…. 문둥병을 사랑스러워 보이게 하고, 도둑을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힌다네. 이것은 늙어 빠진 과부에게 청혼자를 데리고 온다네. 그 과부가 메스꺼움을 떨쳐버리고 향수를 발라 젊어져 오월의 청춘이 되어 청혼한 남자에게 간다네. 눈에 보이는 신은!’(셰익스피어, 아테네의 타이몬, Timon of Athens)

눈에 보이는 이 신은 무엇입니까? 황금(Money)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도 이 대사를 그의 [경제학 철학 수고]란 책에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타이몬은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그가 바닷가 동굴에서 금광을 발견한 후 읊었던 대사인데, 우리의 모습을 섬뜩할 정도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형 수술 전과 수술 후의 젊은 여성의 사진입니다. 수술 전(Before) 얼굴과 수술 후(After) 사진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술 후, 이분은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황금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황금을 발견한 후 말했던 타이몬의 대사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Before와 After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보셨습니까? 주인공은 사지가 마비된 중풍병자입니다. 중풍은 정신은 온전한데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여지지 않는 병입니다. 마비가 심할수록 장애 정도는 심해집니다. 정말 속상하고 좌절되는 힘든 병입니다. 이러한 중풍 병자가 네 명에 의해 들것에 실려서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3절) 그리고 결론에는 들것을 들고 당당하게 걸어 나갑니다.(12절) 이 치유받은 모습은 상징적인 모습입니다. 이 장면을 그린 만화를 한 장 보겠습니다.  Before의 모습은 4명의 사람에 의해 들것에 실려 오고 있습니다. After의 모습은 치유되어 발은 힘차게 앞으로 뻗으며 걷고 있고 팔은 힘차게 들것을 어깨에 메고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습에서 저는 교회의 소망과 희망을 보고 싶습니다. 치유되어 들것을 어깨에 힘차게 메고 당당하고 활기차게 걷는 그 모습이 저의 모습, 우리 가족의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를 원합니다. 이 After의 모습을 보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데도 다들 Before의 모습으로만 살아간다면 어떡하겠습니까? 교회마저 돈 이야기, 돈 번 이야기, 돈으로 성공한 이야기만 간증하고 매료된다면 어떡합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끌려야 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 중풍 병자는 돈 한 푼 안 쓰고 치유함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메시지를 듣고 깨닫고 여러분들의 삶에 잘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중풍 병자의 Before와 After 사이에(3절~12절)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떻게 치유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6월 17일 이 주일 아침, 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받아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장면은 마가복음에 기록된 사건 중 극적인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난주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너무 많은 사람이 주님을 찾아 몰려들기 때문에 잠시 피신해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가버나움에 오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다는 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중풍 병자 가족들도 예수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환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옵니다. 이미 많은 인파로 인해 문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할 수 없지 하면서 다음번에 오자라고 말했을 번한 상황인데도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고 가지 않고 땅의 문이 막히니 하늘을 봅니다. 그리고 지붕을 뚫을 궁리를 하는 기가 막힌 발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붕을 뚫어버립니다. 그 당시 지붕이 나무 지붕임을 고려하더라도 정말 대단한 발상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뚫고 환자를 수직 강하시켜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이 네 명의 저돌적인 시도로 중풍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치유하게 되는 결정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 After를 만드는 결정적인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중풍 병자의 치유 사건에서 두 개의 단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연민과 동행’ 입니다.

마비된 영혼들, 정신과 영혼이 마비되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들 주변에도 많습니다. 정신이나 영혼이나 몸이 병든 사람들과 연민의 마음으로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들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정말 힘들고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중풍 병자를 회복시키시며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힘들더라도 꼭 마음으로 깊이 받으시고 삶에서 순종함으로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적용할지는 각자 깊게 기도하며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중풍 병자의 치유는 주님의 단순한 치유의 결과가 아닙니다. 연민과 동행이라는 쉽지 않은 마음, 어려운 행동이 있었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정에 중풍 병자와 함께했던 4명처럼 우리도 동원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교회의 희망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살려내는데 있다면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연민과 동행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몸과 영혼, 정신이 마비된 사람들이 세상에는 부지기수입니다.

발달 장애인을 돌보는 ‘라르슈 공동체’를 설립했던 캐나다 신학자이며 철학자였던 장 바니에는 다음 같은 감동적일 글을 남겼습니다.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귀한 경험담입니다.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상처받은 불행한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질문을 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삶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세상의 이웃들을 사랑으로 돌아보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진지하게 묻고 답을 나름대로 얻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불행한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요? 무시하지 말고 겸손하세요. 판단하지 말고 사랑하세요. 지배하려 들지도 말고 다른 것을 주려 들지도 마세요. 오직 나 자신만, 나의 시간, 나의 힘, 나의 마음만 주세요. 더불어 놀기도 하면서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세요. 그 아이는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 예수님이 그 안에 거하십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세요. 가만히 평화롭게 상냥하게’(장 바니에,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 우리에게 들려주는 너무나 귀한 경험담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연민
이 연민은 중풍 병자를 데려온 네 명과 주님의 연민입니다. 이 네 명과 중풍 병자와의 관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일당을 받고 이동을 도와준 사람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친분 있거나 가족이었을 것입니다. 문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아지자 지붕을 뚫고 환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을 생각을 할 정도면 병자를 반드시 고쳐주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붕을 뚫을 생각을 했다는 것은 간절한 자에게 생기는 영적 창의력입니다. 간절하고 열망하는 영혼에 하나님은 창조적 생각을 주십니다. 이 생각은 갈망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들은 도와주는 척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고쳐주고 싶은 것입니다. 환자를 오랜 세월 옆에서 시중들고 도와주는 것은 어찌 보면 귀찮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 뛰어넘어 병자의 고통을 함께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연민입니다. 지금은 연민이 메말라가는 아주 귀한 시대입니다. 연민에 대한 잘못된 오해들이 있어서 연민이란 단어를 들으면 싫어합니다. 넉넉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딱하게 여기는 동정의 마음을 연민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은 우월감이 없습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나를 비록 힘들게 하는 사람이지만 함께 아파하고 함께 짐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연민, compassion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말씀 중이신 데 천장이 뜯기고 먼지가 날리며 어수선한 가운데 환자가 천장 지붕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실례되고 무례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들을 무례하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병자를 이토록 간절히 회복시키고자 하는 그들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병 치유에 대한 믿음)을 오히려 귀하게 보셨습니다. (5절) 그리고 치유해 주시기 시작합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 병의 문제인 죄의 뿌리를 먼저 벗겨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병은 죄로 인함으로 보았습니다. 죄가 그 안에 있어 병이 생긴 것으로 보기에 먼저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작은 자여’는 ‘tecknon’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 쓰는 호칭입니다. 아들아, 얘야. 이 부르시는 호칭에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의 따듯함, 사랑, 연민을 함께 느끼고 알게 됐을 것입니다. 죄인을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미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의 인생을 그렇게 아프게 한 죄를 먼저 사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절댓값으로 불러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렸던 음성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

이 중풍 병자 또한 여러분들 또한 세상의 마비된 영혼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용서와 용납하심으로 받아주십니다. 어느 인생도 예외가 없습니다. 따라붙는 서기관들이 신성모독으로 몰아붙일 것을 아시면서도 이들을 상관치 않으시고 치유의 2차 선언을 하십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2:11) 연민의 마음이 필요하지 않은 이들은 없습니다. 저에게도 필요하고 여러분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황금도 큰 힘이 있지만, 연민은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그 능력이 훨씬 더 큽니다. 나는 너무 어려워서 못할 거 같아…. 하지 마시고 마음에 품으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빵만으로 이웃에게 은혜를 끼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연민과 사랑을 줘야 합니다. 이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시혜이며 은혜입니다. 연민 가득한 마음으로 사랑과 소망을 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무기가 연민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는 그리 길지 않을 것입니다. 연민이라는 무기, 사랑이라는 무기를 많이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after 가 있을 것입니다.

2. 동행
이 네 명이 동행해 주었기에 중풍 병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붕까지라도 뚫어 줍니다. 이들은 순수하며 끈질기며 헌신적입니다. 순수함, 끈질김, 헌신 이 세 가지를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할 수 없지’가 아닙니다. 일말의 가능성조차도 포기 안 합니다. 동행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힘든 이와 -몸이든 마음이든 영혼이든- 동행하기란 더 어렵습니다. 이 네 명은 어려운 동행이지만 초지일관 끈질기게 함께 해줬습니다. 환자를 들것에 들고 먼 길을 힘들게 왔을 것입니다. 또한, 지붕을 망가뜨렸으니 베드로 장모에게 지붕 수리할 비용도 책임질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시간, 돈, 수고 다 감당했습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쉬운 치유는 없습니다. 애끓는 마음, 온 힘을 다하는 기도, 같이 아파하며 울다 하나님의 after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after를 애씀 없이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중풍 병자의 치유는 이들의 수고와 헌신과 노력에 주님께서 마지막에 함께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연민으로 동행하는 애씀과 수고와 헌신의 모습, 이 모습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의 그 모습에 주님은 들어오셔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before를 벗어나는 기쁨 꼭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황금과 돈이 아닌, 연민과 동행으로 우리는 좋은 after를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 네 명처럼 꺾이지 말고 우직하게 나가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막힌 문을 뚫어 버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