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1. 주일 설교: 당김과 터뜨림(막2:18~22). 마가복음 13. 양은익 목사

 


말씀: 마가복음 13. 당김과 터뜨림(막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막2:18-22)

7월 첫째 주일입니다. 무더울 7월 한 달도 가정 가정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평안히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목사의 마음은 짚신 장사의 마음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은혜로 함께 해주실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귀한 주일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 들어가기 전 잠시 화면 사진 보겠습니다. 6살~7살 되는 여자 어린이와 남자 어린이입니다. 그 아이들 손에 놀랍게도 담배가 한가치씩 들려 있습니다. 아이들이 담배 피우는 어른들에게 다가가 ‘불 좀 빌려주시겠어요?’ ‘라이터 있으세요?’ 묻습니다. 그러자 담배 피우던 어른들이 하는 대답은 ‘응 그래 여기 있다’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열이면 열 모두 한결같이 ‘담배는 해롭단다. 그 어린 나이에 담배를 피우면 어떡하니? 담배 속에는 살충제가 들어 있단다. 폐암에 걸릴 수 있단다’ 하면서 한결같이 말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카메라로 찍은 실화입니다. 이런 대답을 해주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종이쪽지를 주고는 떠났습니다. 그 종이에는 ‘You worry about me, Why not about yourself?'(당신은 나를 걱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 자신에게는 그렇게 안 합니까?) 충고만 하지 말고 ‘끊어라’하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태국의 금연 홍보 영상입니다. 비단 이런 것이 금연에만 해당할까요? 안 좋은 것이니 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그냥 그대로 하는 것들이 금연만 해당하겠습니까? 우리 삶 속의 수많은 것들이 지금 혹시 이런 것은 아닐까요? 이 영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로서, 한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로서 나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생각이 교차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은 ‘버려야 할 것이 있으면 말만 하지 말고, 고집 피우지 말고 버려라!’입니다. 이것이 숨은 뜻입니다. 습관이라 어쩔 수 없다, 별거 아니니까 괜찮다 하십니까? 아닙니다. 버리라고 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고집부리고 버리기 망설이는 그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낡은 부대뿐 아니라 새 포도주도 망가집니다. 생 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내 삶에 지금 무엇을 전해 주고 싶어 하는지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사건의 발단은 금식이라는 종교적 문제입니다. 지난주에는 유대 정결법에서 금하는 자들과의 식사가 시빗거리였습니다. 오늘도 역시 먹는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금식은 전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종교적 행위입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면서 나라를 구원해 주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금식 안 하는 자들을 보면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며 많은 무리를 따르게 하는 예수님께서 그 무리와 도무지 금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이들 눈에 거슬리게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비를 걸며 예수님께 도전합니다. (18절)

한 가지 신앙 행위를 정해놓고 그것을 판단하는 척도로 삼아서, 그 행위를 하면 ‘잘했다’하고 안 하면 ‘잘못됐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정말 무모한 일입니다. 오늘 문제의 행위는 금식입니다. 금식하는 자를 A급 신자로 규정하고, 금식 안 하는 자는 B급 신자로 구분하는 이 판단의 행위는 우리도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렇게 행위를 하고, 안 하는 것으로 신앙의 등급을 나누는 무모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식하는 행위를 A급 신앙으로 구분 짓는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늘 먹기만 하고 금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이들이 볼 때 너무나 이상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들이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주님은 세 가지 비유로 답하십니다. 첫째는 잔칫집 비유이며, 두 번째는 생베 조각과 헌 옷 비유, 세 번째는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 비유입니다. 살펴보겠습니다

1. 잔칫집 비유
잔치는 구약적 배경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종말에 구원받고자 금식하는데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며 이미 종말의 구원이 임한 것이기에 지금은 잔치를 벌일 때라는 것입니다. 잔칫집에서 금식할 수 있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금식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0-21절)

2. 생베 조각 비유와 새 포도주 비유
(1) 생베 조각 비유
생베 조각을 헌 옷에 이어 붙여서 꿰매 놓으면 생베 조각의 새 힘으로 이어 놓은 부분이 당겨져서 결국 뜯겨 옷이 찢어지게 된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2)새 포도주 비유
새 포도주의 발효되는 강한 능력은 헌 부대를 터뜨린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헌 옷과 낡은 부대는 금식과 같은 그들이 고집하는 전통들입니다. 이런 것으로는 새로운 것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새 포도주와 새 옷의 힘이 너무 세기 때문에 낡은 것으로는 이 힘을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 힘을 오늘 본문은 당김(21절)과 터뜨림(22절)이라는 두 단어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김은 생베 조각이 가지고 있는 힘이고 터뜨림은 새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입니다. 이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힘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당김의 힘은 사람들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힘, 사람사이의 인력입니다. 복음의 전도시키는 능력과 사람을 감화시키고 감동시키며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새 포도주의 터뜨리는 힘은 세상의 악과 불의와 불행을 폭파시키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당김과 터뜨림’. 두 단어를 오늘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능력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영적 능력이 임해 사람들을 끌어당겨 구원에 이르게 하며,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 에너지로 세상의 악을 폭파할 능력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끌려다닙니다.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숨어다니며 움츠리기에 급급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은 새 포도주로 오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끌어당기는 능력, 악을 폭파하는 능력, 복음의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생베 조각의 탄탄함과 새 포도주의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이 새로운 힘이 복음이 주는 힘입니다. 이 당기고 터뜨리는 능력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당기지 못하고 세상의 문화와 세상일에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아무 소리 못 합니다. 당기는 능력이 없어졌습니다. 터뜨리지 못하고 얌전합니다. 숨기에 급급합니다. 여러분 예수님만 믿으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면 낡은 부대를 버리셔야 합니다. 앞에서 보았던 태국 금연 동영상에 나오는 어른처럼 ‘담배 피지마’ 하면서 자신은 담배를 피는 그 모습으로 그대로 살면 안 됩니다. 복음으로 새 생명을 받았으면 그 복음의 능력을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듯이 하면 안 됩니다. 과감히 낡은 것을 버리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 고집대로 살면서 그냥 교회만 다니시면 당김과 터뜨림의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헌 부대를 버리고자하는 각오가 이 시간 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상당히 심각한 도전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받기 어렵고 아픈 말씀이더라도 반드시 결단하고 순종하셔서 당김과 터뜨림의 복음의 능력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순종함으로 결단하고 낡은 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교회안에서는 은혜를 받았으나 세상에 나가면 맥없이 그냥 끌려다니고 숨기 바빠하는, 모양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버려야 할 낡은 것들은 나의 고집, 나의 관행, 하나님 보다 나 위주로 생각하며 무심코 살아가는 내 삶의 모든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죽여 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시기 위해 고난도 주시는 것입니다. 당김과 터뜨림은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전환점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받기 위한 조건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낡은 부대 버리기이고 두 번째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 닮아내기 입니다. 이 두 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낡은 부대 버리기
우리 모두에게는 고집스러운 자기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항복이 필요합니다. 고집하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항복하고 내려 놓아야 주의 길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각자 버려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살피시고 체크하십시오. 그리고 버리시는 결단과 순종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1)시간
시간 사용을 살피십시오. 시간이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살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입니다. ‘나는 너무 바빠!’ 너무 바빠서 도무지 하나님께 시간을 내드리지 못합니까? 하루를 다 쓰고 남은 쪼가리 시간을 그것도 이미 다 지쳐서 겨우 기도하고 말씀을 봅니까?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 그것 조차도 못합니까?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내 시간의 주인이라는 그 고집스런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2)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이 나의 것입니까? 내가 나의 주인입니까? 이 고집도 버리셔야 합니다

(3) 돈에 대한 고집
내 돈이 나의 것입니까? 평생을 십일조 한번 제대로 못하십니까? 망할 것 같다는 생각, 더 못살게 될 것 같다는 생각 모두 나의 버려야 할 고집입니다. 욥기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면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게 되는 교훈을 보면서도 내 돈은 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고집과 관행들이 복음의 능력을 막습니다.

우리는 이 고집과 관행을 못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하나님이 창대하게 펼쳐 보여주시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저축하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들만 경험하는 작은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평균값이 되어 버렸습니다. 낡은 부대를 찾아내어 버리시고 새 부대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될 때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낡은 것들을 버리고 바꾸기 위해서는 두번째 조건인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내기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닮아내는 강도가 커질수록 당김과 터뜨림의 강도도 커지게 됩니다

2. 예수님 닮아내기
예수님을 닮아가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당기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세상의 관행을 그대로 따르기에 급하면 우리에게 당기는 능력은 생기지 않습니다. 남편 구원의 문제도 우리에게 당기는 능력이 없으면 요원해집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얼마나 의도적으로 예수님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 그대로 닮고자 노력해 보셨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알기 위해 애쓰셨습니까?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닮고자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어떤 모습이 감격스러웠고 좋았습니까? 십자가 구원 사건만 좋아하시고 끝내셨습니까? 그것으로 끝내면 안 됩니다. 주님을 닮아 내셔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의 마음 닮기: 온유와 겸손
바울은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온유와 겸손은 능력이 강력하여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풍파를 이길 힘은 바로 주님의 마음인 이 온유와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찬송가 455장 1절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여러분의 찬송이 되고, 다짐이 되고,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말과 모습 닮기
예수님도 위선과 불의에 대해서는 불같이 화내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고는 따뜻했고, 부드럽고, 인자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도 분노와 정죄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심지어 옆에 있던 강도조차 거침없이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전혀 미움이 없으십니다. 분노가 많은 세상이지만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닮아 내고자 애쓸 때 우리는 많은 것들을 고쳐낼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 닮기
최후 만찬 자리에서 주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사랑할 줄 모르면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몇 번까지 용서하냐고 묻자 뭐라고 하셨습니까? 일곱 번을 일흔 번(마18:22)까지 하라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작은 사랑도, 한 번의 용서도 벅차하는 우리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신 손양원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으로 두 아들이 안재선이라는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하게 되는데 안재선이 체포되자 딸 동희 양이 아버지의 간절한 호소에 못 이겨 심문하던 곳으로 달려가 울며서 아버지의 말을 전합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동희 양은 단숨에 말을 토해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방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문하던 군인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위대하시다’ 하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냈다고 합니다. 안재선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손동희 권사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고 합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앞에 잊히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입니다’

당김과 터뜨림이 있는 복음의 능력 아닙니까? 그 많은 교회, 그 많은 건물, 그 많은 성도가 있어도 사람을 당기지 못하고, 세상 가운데서 쪼그라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제는 고민해 봐야 하고,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금식이 중요하고, 직분이 중요하고, 건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기고 터뜨리는 복음의 능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주님 진실하고, 깊게 따라는 새로움이 있기를 바랍니다.(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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