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다 함께 부활 (요20: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19~23)
오늘은 부활 주일 아침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끝난 줄로 알았던 이들에게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보란 듯이 깨시고 한 송이 부활의 아름다운 꽃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던 슬프고 허무한 곳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웅성거림만이 가득했던 세상에 생명의 웅성거림으로 시작되어 초대교회를 거쳐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소식입니다. 주님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사망은 생명을 이길 수 없다!’라는 부활의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모두 마음을 활짝 여셔서 새롭게 일어나는 부활의 큰 은혜가 있기 바랍니다.
설왕설래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부활의 소식은 허술한 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신비가 부활의 사건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창조된 위대한 사건이 부활입니다. 사람들 몇이 모여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까? 아이 때 모습일까? 아니면 가장 아름다웠던 처녀 때의 모습일까? 결혼 전의 모습? 아니면 결혼한 후의 모습일까? 늙었을 때의 모습일까? 건강할 때의 모습일까? 아니면 병들었을 때의 모습일까? 한 사람이 끼어듭니다. 여러분들은 성한 몸입니다. 나는 불편한 몸인데 그럼 나는 이 불편한 몸으로 부활해야 합니까? 도로 육체의 모습으로 부활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육체 그대로 그 성질 그대로이면 어떻합니까? 우리가 얘기하는 부활은 이 몸의 부활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새로워지는 부활입니다. 예전의 나는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워진 나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환골탈태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부활 이후 1차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1차 부활의 삶을 사는 우리는 부분적으로 예전의 ‘나’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1차 부활의 삶은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하지만 부활했기에 예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구원을 소망하며, 자기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섬기며 용서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을 인정하지만 부활하기 이전의 삶에 비교하면 우리의 삶은 많이 나아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예전처럼 살지 말고 부활을 본 자-경험한 자-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이 말씀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첫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안식후 첫날이니 주일입니다(19절). 부활하신 그날 밤 전격적으로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 예수의 추종자들을 잡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숨어 있습니다. 그 숨은 곳에서 언제 나갈 수 있는지? 나가면 살 수는 있는지 떨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 때 이미 배신하고 주님 곁을 떠났던 제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본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부활을 목격한 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목격한 자-체험한 자-로써의 삶을 5가지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 임재(come, 오심, 19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즉 하나님의 오심은 전격적으로 일어납니다. 누가 막을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오시고 나와 함께 머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고백하고 성령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 체험은 강력합니다. ‘아! 하나님’. 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key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전격적인 부활의 삶을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수록 우리와 공감하시고 우리 심령을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기 위해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일수록 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체험되면 부활의 삶이 시작됩니다. 우리를 은총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 은총으로 고난 가운데서 일어서게 됩니다.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이 강력한 임재의 체험은 구원의 삶, 부활의 삶을 출발케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주님 제게 임재하여 주셔서 부활의 삶, 구원의 삶을 살게 도와주십시오!’ 구하십시오.
모세의 선포입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14:13)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구합니다. 임재는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을 구하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부활의 삶을 위해 임재를 구하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뿐만이 아닙니다. 십자가 주님을 떠나온 죄책감, 배신감 등의 여러 복합적인 마음이 가슴 깊이 자리해 있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평생 상처로 남게 됩니다. 의식, 무의식 세계 모두에 트라우마로 남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들의 상처 한복판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평안하라’ 하시는 말씀으로 치유하십니다. 제자들뿐 아니라, 주님의 임재로 우리는 상처에서 회복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평안하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임재를 늘 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바쁘더라도 이 임재를 구하는 겸손한 기도는 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능력을 소유한 ‘신’적인 능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평화 (19절, 21절)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하십니다. 평화가 없는 곳이기에 평화가 필요합니다. 이 땅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신 제자들에게도 평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평화를 바라셨기에 또 평화의 축복을 주셨기에 우리는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버리고 떠난 제자들의 배신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전혀 꾸지람하지 않으시고 ‘평안하라’ 하십니다. 이미 십자가를 지심으로 낮아질 때까지 낮아지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이름 자체가 평화입니다. 주님은 부활의 평화를 가지고 평화를 전하러 나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평화가 없고 평화가 절실합니다. 우리는 부활을 아는 자들로 세상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주변의 불화를 다 평화로 만들라는 주님의 메시지, 받으십시오.
3. 사명 (21절)
부활을 경험한 자들은 주님이 주신 평화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굉장한 위로와 격려를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격 없는 제자들(우리)을 하나님과 주님의 동일 선상에 놓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메시지입니까? 부활의 삶을 사는 자들은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나가서 전하라’ 하십니다. 부활의 놀라운 소식, 이 생명을 뒤엎는 소식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해도 사랑과 평화와 용서를 하며 세상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내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숨을 내쉼으로 성령을 받으라 하십니다.
4. 성령 (22절)
주님의 숨은 영, 성령입니다. 부활의 영입니다. 주님께서 숨을 불어주시자 주님 부활의 영이 제자들에게 들어갔습니다. 부활의 영으로 가득한 큰 은혜가 제자들 모두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들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 생명입니다. 영적으로 죽어가던 제자들에게 생명의 숨, 부활의 영이 들어갔습니다. 이 숨은 흙으로 빚어진 아담에게 불어 넣어 주셨던 그 생명의 숨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 부활의 생명의 숨, 영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생명, 또 하나는 영의 생명입니다. 이 중 영의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영의 생명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계십니까? 혹시 육의 생명에게만 신경 쓰고 애쓰고 계십니까? 우리 내면 가장 밑바닥에서라도 영의 생명이 숨 쉬며 살아 있어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부활의 영, 성령을 받으십시오.
5. 용서 (23절)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해 대속제물로 십자가 죽음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제자들을 찾으셔서 또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엄청난 권세를 주십니다. 제자들(우리)이 용서하면, 그 용서함을 받은 자들의 죄는 사하여진다는 죄 사함의 권세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23절)
용서가 없으면 죄악이 만연한 세상은 구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우리)에게 그 크신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세상은 용서를 모릅니다. 국가, 교회 모든 왜곡된 문제들의 밑바닥에는 용서 없음이란 죄악이 있습니다. 용서가 없으면 치유도 없고, 회복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부활의 영을 받은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 용서의 삶을 살아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우리의 용서하는 삶으로 인해 세상은 그 죽을 운명에서 구원의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왜 용서의 권위를 주셨습니까?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처음 드린 기도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이 용서는 부활하신 주님의 가장 큰 메시지입니다. 용서와 사랑이 없으면 정의도 정의가 아닙니다. 주님은 몸소 십자가를 진심으로 용서를 실천하셨고 부활 후 찾은 제자들에게도 용서를 당부하셨습니다.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인가요? 다 함께 피어야 봄이지요!'(홍순관) 주님은 홀로 부활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다 함께 부활’을 원하십니다. 모두 부활의 영을 받고 능력 받아 부활의 삶 살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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