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8. 주일 설교: 복음의 시작(막1:1).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1.

 

 

말씀: 복음의 시작(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1:1)

철학자 하이데거는 ‘世界-內-存在’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좋든 싫든 세계 내에 있기에 환경의 영향을 받고 그 영향에 매여 산다는 뜻입니다. 봄이 와서 봄을 만끽하고 싶지만 미세 먼지가 이 기쁨을 망치고 있습니다.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에 이 환경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기쁨으로 봄을 맞으시고 겨울은 마음속에서 떠나 보내시기 바랍니다. 옆에 계신 교우분들과 봄 인사 기쁘게 나누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마가복음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새벽 집중 기도회를 통해 ‘십자가’를 깊이 살펴봤습니다. 우리 믿음의 핵심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성찰은 우리를 믿음 가운데 든든히 서나가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삶을 성찰해 보면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신자란 (그리스도인) 누구입니까?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엄중함을 깊이 느끼고 계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잘 알고, 제대로 잘 따르기 위해 정말 많은 애를 써야 합니다. 요즘 세대는 신자들의 사는 모습이 ‘교회 안에서의 나’와 ‘교회 밖에 있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른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과 삶의 괴리를 없앨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는 노력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나가 신자로서의 명분을 지키지 못하고 實利를 최고로 우선하는 세상의 가치 앞에 맥을 추지 못함을 볼 때 정말 아주 속상합니다. ‘名分’이란 무엇입니까? 명분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때론 명분은 유대인들에게서 보듯이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실리와 유익을 우선 가치로 추구하고, 우리는 ‘세계-내-존재’ 이기에 실리를 완전히 무시하며 살 수는 없지만, 우리가 가진 신앙의 근거와 명분이 확실히 바로 서 있으면 우리는 ‘예, 아니요’를 분명히 할 수 있는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수 있습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 신앙인입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할 수가 없겠습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은 명분의 싸움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라’ ‘십자가를 지라’ 이 모든 주님의 말씀에 실리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의 명분, 이유를 알아야 욕망과 실리에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초되는 말씀 구절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근거요 기초요 명분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Good news입니다.

이제껏 들어 보지 못한 복된 소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메시아(구세주, 그리스도, 해방자)다! ‘라는 놀라운 선포입니다. 마가는 이 놀랍고 벅찬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전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 글을 접한 사람들의 가슴이 얼마나 뛰었을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가가 전해주는 이 예수님 이야기(일대기)로 여러분들의 마음도 예수님으로 인해 감동하고 뛰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입니다. 로마 시내의 화재 사건을 빌미로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화재 사건을 주동한 것을 그리스도인으로 혐의를 씌워 죽이고 감옥에 가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혼란의 시대에 베드로도 순교했고, 바울도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었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족을 밀고하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밀고했습니다. 순교를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밀고를 한 자들은 실패한 자들입니다. 비록 살아남았어도 그들의 고통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번민으로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막13:12-13)

마가는 이 혼란의 시대를 사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로마의 실패한 교회)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지금 실패를 경험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로마 그리스도인들처럼 한때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들에게 임한 복음의 위대한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고자 마가복음을 썼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서 승리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그래서 마가의 사랑과 위로와 따뜻한 마음이 넘칩니다. 마가복음의 기록 연대는 주 후 68~69년입니다.

1절 첫 문장부터 예수가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가 누구냐? 하는 깊은 질문과 심오한 고백으로 모든 실패에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그 당시 로마 시대에는 황제(시저)만 신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황제가 아닌 예수님을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주 위험하며 정치적이며 혁명적인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 제국주의에 대한 반항이며 저항입니다. 이 마가복음은 시작부터 발각되면 죽임을 피할 수 없는 불온문서입니다. 개인적인 삶을 볼 때 마가도 한때는 실패를 경험한 자입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마가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의견 차이가 생기고 힘들어 바울을 떠나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이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40년 후에 마가는 이 위대한 마가복음을 기록하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면서 마가복음을 써 내려 갑니다. 그리고 시저와 예수님 중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인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부터 마가복음에 깊이 빠져들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빠져든다 함은 예수님께 깊이 빠져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시작과 더불어 자신에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진정한 주는 누구입니까?’ 내가 매일의 삶에서 진정 두려움에 떠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추구하는 실리를 잃는 것이 두려워서 떨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진정한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제대로 순종하며 따르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하며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까?

앞으로 우리는 마가가 써 내려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병 고치심과 보여 주신 많은 기적과 말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시작하면서 나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 신앙 고백이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내 주인이 예수가 아니면 나의 신앙은 액세서리에 불과합니다. ‘나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이 고백을 강력하게 당당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의 자질구레한 실리들-돈, 편안함, 잠깐씩 느끼는 행복감, 기쁨들-, 욕망이 나를 위협해도 이겨 나갈 수 있는 엄청난 power를 내면에 소유하게 됩니다. 이 신앙고백이 나를 살리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를 만드는 출발점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며 신자의 삶을 살면서 여러분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자 함은 그분이 우리에게 부와 건강과 명예와 성공과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름은 예수님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점, 명분, 기초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그 날 심판관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실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주로 고백하며 따릅니다. 이 따르는 여정에는 고난과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꺾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넘어지지 않고 일어설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강한 자에게 비굴해지고, 약한 자에게 폭군처럼 군림하며 사는 자들에게 선포되는 복음입니다.

살다 보면 기쁜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잘될 때, 질병에서 회복되어서, 직장 취직이 돼서, 승진해서, 집을 새로이 장만해서, 집값이 무척 올라서..그러나 이 기쁨들은 잠시 잠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시고 세상을 다스리신다’라는 이 복음의 소식은 근원적 기쁨을 줍니다. 잠깐의 기쁨과 근원적인 기쁨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어두움이 짙게 깔린 세상에 예수님은 유일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을 앞으로 보면서 예수님께 깊이 들어가면서 이 빛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큰 감동과 기쁨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감동이 많은 사람은 세상의 실리에 잘 무너지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이번 마가복음 강해에 들어가면서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는 큰 감동과 은총을 경험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렇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아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갈수록 우리는 그 크신 은혜와 은총의 빛 가운데 흔들림 없는 주의 백성으로서 나가게 됩니다. 명분의 사람이 돼나가는 것입니다.

글을 읽다가 재미있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5개의 ‘깨’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즉 ‘깨짐, 깨달음, 깨어있음, 깨끗함, 깨부숨’입니다.

1. 깨짐: 우리 각자는 자신이 깨져야 할 것이 참으로 많음을 압니다. 깨십시오.

2. 깨달음: 그동안 내가 눈을 감고 있어서 보지 못했던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내가 깨달아 눈을 뜨는 순간 내 앞에 새로운 세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좀 더 젊었을 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3. 깨어 있음: 게으름은 육신뿐 아니라, 영혼에도 있습니다. 게으르면 자꾸 졸게 됩니다. 주님은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실존은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마25:1~13) 졸다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는 다섯 처녀처럼 되면 안 됩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4. 깨끗함(거룩함): 홍수철에 맑은 물이 귀합니다. 이 세상의 혼란스러움은 홍수 때와 같습니다. 우리는 쉽게 더러워집니다. 더러움은 주님의 보혈 피로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더러움으로 얼룩진 오염은 깨끗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얼룩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애쓰셔야 합니다.

5. 깨부숨: 거룩함을 방해하고 신앙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깨부수라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버림의 요소가 있습니다. 버리고 깨고 부수고 끊을 것은 끊어야 합니다. 옛사람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성령의 새 법을 따르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새사람으로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뜻이 오롯이 들어 있는 마가복음을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신나게 여러분을 깨부수십시오. 그래서 실리 앞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명분 있는 신앙인으로 우뚝 서 나가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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