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집중 기도회 3: 십자가, 예언의 성취(눅 24:44~48). 양은익 목사. 2018.3.21

 

 

말씀: 십자가, 예언의 성취(눅24:44~48)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4-48)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예비하시고 준비하시며, 구약의 많은 예언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에게 미리 알려 주셨던 신비한 구원의 사건입니다. 문제는 예언의 말씀을 알아봐야 하는데 알아보지 못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3년간이나 함께했던 제자들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예언의 말씀도 있고,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도 있고,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데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여 제자들을 찾아와 주신 말씀입니다. 도망감을 책망하기보다는 지금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 십자가와 부활은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을 통해서 말해진 것이며, 성경에 나온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하여 그들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이제는 눈을 떠 알아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3년간이나 주님과 함께했는데 몰랐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만을 바라며 주님을 따르다,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고난의 메시아를 놓친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쳤습니까?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모셨던 그들 아닙니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해야 우리의 신앙생활도 바로 서 나갈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무지와 욕망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몰랐고, 말씀에 무지했습니다. 자신들이 바라던 그들의 욕망으로 인해 말씀이 들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지와 욕망은 사람의 눈을 가리는 가장 대표적인 장애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서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막게 합니다. 원하는 것만 보고 듣기에 다른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성경도 보고, 주님께 들었으나 겉으로만 들은 것입니다. 이렇게 된 동기는 욕망입니다. 사람은 어떤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면 다른 것은 제대로 듣지 못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 사로잡힌 고정된 생각이 다른 것이 들어오는 것을 아예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제대로 듣거나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욕망이 강하면 이 현상은 더욱 크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시야가 더 좁아집니다. 넓게 깊게 보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이 두 가지 이유로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하셨으나 그 말씀의 이유를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뱀의 유혹이 오자 욕망으로 무너졌습니다. 무지와 욕망.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리게 만듭니다. 딱 가로막습니다. 신앙생활에 치명적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가졌던 생각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높은 자리에 오르시면 나도 한자리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메시아는 성경이 예언해 준 고난 받고 죄지음을 지고 십자가 처형을 받는 메시아가 아닌, 영광의 메시아, 해방의 메시아를 상상했고 갈구했던 것입니다. 3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으나 이 욕망이 너무나 강해, 십자가를 상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제대로 봐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어도 욕망이 강하면 막힙니다. 나중에 성령 임하신 후 제자들의 설교를 보면 이미 구약의 말씀을 모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 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구약은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과 예표입니다. 몇 가지만 봐도 오실 메시아는 고난받는 메시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에 나타난 메시아도 고난의 메시아가 선명히 나타나 있습니다(사53).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직후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예수님을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유혹한 뱀을 심판하십니다. 여자의 후손 즉 예수님이 오시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뱀의 세력도 만만치 않아 그 발끝을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고난의 메시아를 미리 알려 주십니다.

창세기 22장에서도 십자가 고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 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도 순종했고, 이삭도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을 태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에 올라가는 이삭에게서는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도망갈 수도 있지만, 묵묵히 따르는 이삭에게서 고난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복사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순간순간 고난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약을 통해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는 유월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애굽 하기 직전의 밤은 칠흑 같은 어둠의 밤입니다. 죽음의 천사들이 나타납니다. 다 죽임을 당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남습니다. 이때 이들을 살린 것은 그들의 집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입니다. 대신 죽은 어린양이 그들을 살려낸 것입니다. 그 후 모든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예표하고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 제도를 통해 십자가 사건을 이해시키고자 하셨습니다.

민수기 21장에는 놋뱀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 고난의 길로 들어서자 불평불만이 쏟아져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놀란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간절한 청원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장대에 놋뱀을 높이 달라 하십니다. 그리고 놋뱀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백성 중 일부는 독을 빼야지 무슨 놋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느냐? 하면서 불신한 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믿고 놋뱀을 바라본 자들은 다 살았습니다. 바라보면, 쳐다보면 산다. 믿는 자는 사는 것입니다. 니로데모가 한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놋뱀은 십자가를 예표한 것입니다. 믿는 자는 산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처럼 구약을 보면 무수한 사건들이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무대를 준비한 것입니다. 구약의 패턴들을 보십시오. 내려갔다가 올라갑니다. 잃었다가 찾습니다. 노예였다가 해방됩니다. 포로였다가 해방됩니다. 이 귀한 십자가 사건의 예표가 되는 말씀들을 제자들은 이미 봤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두 놓쳤습니다. 그들의 욕망이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듣긴 듣고 보긴 봤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보고 들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모두 조심해야 하고 주의해서 이 귀한 뜻을 받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살리는 귀한 말씀을 주시는데 못들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말씀에 대한 무지와 욕망으로 십자가 구원 사건을 놓쳤습니다.

우리는 늘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갈등은 나의 원함과 하나님의 원함이 같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내 욕망이 강할 때는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내 마음에 맞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내 계획대로 돼야 합니다. 내가 듣고자 하는 것만 듣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나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모두 놓치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놓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에서 멀어집니다.

십자가는 상심(上心,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 욕망과 교만)과 하심(下心, 아래로 내려가고자 하는 마음, 겸손)이 격렬하게 투쟁하는 장소입니다. 나의 원함과 하나님의 원함이 싸우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죄의 후손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애쓰는 것보다 내 뜻과 내 소망이 우선되며 강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하셔서 주님과 같은 마음(下心)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크고 풍성한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하심’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간절히 구하며 복으로 받으십시오. 우리가 더 늙어 우리의 젊은 날들을 회상할 때 ‘하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섬긴 것들이 큰 기쁨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상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무지와 욕망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마음처럼 내려놓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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