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1. 주일 설교: 교회, 회복의 터전(요21:1~17). 양은익 목사.

 

 

말씀: 교회, 회복의 터전 (요21:1~17)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21:1-17)

소박한 예배로 모였습니다. 여러분 마음 한구석에 ‘혁명’, 큰 바꿈이 일어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즘 많이 읽히는 책 가운데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Vulnerant omnes, ultima necat. (볼네란트 옴네스, 울티마 네카트).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입니까? 아니면 과장입니까? 이 말이 쓰여 있는 장소가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말은 프랑스의 한 교회 앞마당 해시계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필이면 이 같은 말이 교회 앞마당에 쓰여있을까요! 상처가 많은 교회를 향한 경종이라면 아픈 말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러기에 상처가 많으면 안 됩니다. 상처가 아니라 상처와 실패를 겪는 일들이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치유하여 회복이 일어나는 회복의 터전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세 주간 동안 교회에 대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준비하면서 기도하며 꿈을 꿉니다. 교회도 경쟁 속에서 팍팍하게 허덕이는 이 시대에 과연 교회는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배우는 교회, 서로 세워주고, 격려해 주고 함께 자라는 교회, 상처 많은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회복시켜 주는 교회. 그런 교회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상처와 실패한 이들이 찾아가 회복하는 ‘성지’가 돼야 합니다. 회복이 필요한 이들은 교인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행한 부끄러운 일들로 낯 뜨거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 교회 가면 살 수 있어’하는 말을 하게 된다면 교회는 성공한 것입니다. 교회가 더 무엇을 생색내며 자랑하겠습니까? ‘교회 가면 살 수 있어’하는 고백이 우리와 우리 이웃들에게서 나오는 희망을 품어 봅니다.

성경의 주제는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풍성함, 영적 자유로움의 회복이 성경의 주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회복을 이룬 인물들로 꽉 차 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욥, 다웟등 수많은 인물들이 그들이 했던 수치스러운 일들,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던 상황에서 회복하는 일들로 성경은 가득 차 있습니다. 이 회복의 사건에 여러분들의 이름도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 화해, 치유, 부흥, 종말 모두 회복의 사건입니다. 구원은 죄의 회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의 은혜로 우리는 죄에서 회복되어 구원에 이릅니다. 화해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긴장과 아픔 가운데 있던 이들이 화해함으로 관계가 회복됩니다. 치유는 병과 마음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의 몸은 회복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하심으로 우리의 몸이 결국 부활 체로 회복될 것임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부흥은 메말라 있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어 살아나는 것입니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주제는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실패한 이들이 누구든, 이유가 무엇이든 실패한 자들 모두가 무너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회복하기를, 회복되어 서로 회복시키는 자로 서 나가기를, 서로 더불어 사랑으로 회복시키는 자들로 성장해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회복은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한순간의 실패로 평생을 삶의 그늘에서 아픔을 갖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향해 세상은 ‘자업자득’이라고 냉정하게 말하지만, 교회는 그렇게 끝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살려내야 합니다.

어제도 탤런트 한 분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미투’운동으로 인해 가해자로 지목된 분입니다. 독 안에 든 쥐처럼 퇴로가 완전히 막혀 숨을 곳도, 갈 곳도 없는 상태에서 내린 불행한 결말입니다. 나쁜 일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숨 쉴 곳만 발견했어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 가운데 회복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가 회복의 사람이 돼야 하고, 교회는 회복의 터전이 돼서 영혼을 살리는 귀한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회복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회복을 위한 수고가 있어야 하고, 수고의 몸짓과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회복을 위해 하셨던 과정을 살펴보면서 회복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회복의 과정은 첫째 찾아가기, 둘째 말 걸기, 셋째 필요 채워주기, 넷째 다시 기회 주기입니다.

1. 찾아가기 (21:1)
제자들의 회복을 위해 주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찾아가신 것입니다. 회복은 찾아가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1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요21:1) ‘또’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주님께서 벌써 세 번째 찾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꾸 찾아서 접촉하며 회복이 필요한 제자들을 찾아와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배신의 피해자이신 주님께서 먼저 찾아가신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배신하고, 등 돌리고 가버린 사람, 찾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계속 찾아가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셨겠습니까! 이 마음이 무엇인지 소그룹 시간에 나누어 보십시오. ‘회복’이 일어나는 곳에는 언제나 먼저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시비비를 따지고 들면 회복의 위대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시비비 따짐은 회복된 후 서서히 해도 됩니다. 긍휼과 은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먼저 찾아갈 때 회복의 첫 단추가 끼워지기 시작합니다.

2. 말 걸기(21:4,5)
찾아가신 후에 주님은 말을 거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5절) 대화로 접촉점을 찾으신 것입니다.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이 있지만, 회복을 위한 이 단계에서 침묵은 독입니다. 반드시 소통해야 합니다. 주님은 고기를 못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하는 가장 쉬운 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찾아갔으면 말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적이 있습니다. 바로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을 뛰어넘을 수 있는 더 강한 것이 있어야 우리는 말을 걸 수 있습니다.

자존심 싸움은 어느 정도까지만 해야 합니다. 자존심을 깨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존심의 벽을 헐어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는 자존심을 내세우는 모습은 없습니다. 오로지 회복시키고자 하는 마음만 있습니다.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숙해야 할 수 있습니다. 더 성숙한 자가 먼저 찾아가고 말을 걸어 주십시오. 저는 우리 들풀 교우들이 이렇게 먼저 찾아가고 먼저 말을 걸어 주는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원합니다. 또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린 자녀들이 뜻대로 되지 않아 토라지고 말 안 하고 새침해져 있을 때 먼저 말을 걸고 다가가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부모가 자존심을 세워 무엇하겠습니까? 센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 주는 것이고, 어렵지만 못 이기는 척하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회복이 일어납니다. 어떤 일에서든 회복은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들킬까 봐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먼저 찾으시고 말을 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아 주시고 말을 걸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하와는 그대로 끝났을 것입니다.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 주신 사건도 엄청난 사건입니다. 도망자요, 배신자인 그들을 먼저 찾아 말을 걸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소망하고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3. 필요 채워주기(21:6~14)
세 번째 회복의 몸짓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먼저 찾아가고, 먼저 말을 거신 주님께서 그다음에 하신 일은 고기 많이 잡게 해 주시고, 아침 밥상 챙겨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을 열고 감동하게 됩니다.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여러분들도 찾아가는 이들의 필요한 것 채워 주고, 허전한 것, 아픈 것들을 채워 준다면 그들은 미안해서라도 돌아올 것입니다. 찾는 것만으로 끝내지 마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더 깊은 단계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4. 다시 기회 주기(21:15~17)
회복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회복은 다시 한번 기회를 줄 때 일어납니다. 회복의 정점에서 주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15절부터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목숨 걸고 주님 따르겠다고 한 사람이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 부활 후에도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 잡으면서 살자고 선동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베드로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반복해 물으면서 ‘그렇다’라는 답을 얻어 내십니다. 그 반복의 질문과 답변에서 회복의 위대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회를 주지 않고 내치면 회복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몇 번의 기회를 줘야 합니까? 성경에 몇 번 기회를 주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용서에 대한 말씀은 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는 말씀을 보면 기회도 한 번만 주지 말고 계속 주라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기회를 다시 주는 것만큼 큰 배려와 관용은 없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은혜로 끊임없이 풍성해야 합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살다 보면 기다려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기다려주고 회복시키는 이 회복의 일들이 여러분 삶 속에 더욱 많아지고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먼저 찾아가시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말을 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곳이 회복의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 생명의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회복은 마음의 회복, 관계의 회복, 영적인 회복 모두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있는 곳에 회복이 넘쳐나시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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