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Stay hungry, stay foolish(요6:22~27)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2-27)
1월이 어느덧 가고 벌써 2월 첫째 주일입니다. 2월 한 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평안함이 가득하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Stay hungry, stay foolish’ 입니다. 한국말로 풀어쓰면 ‘계속 배고프고, 계속 어리석어라’입니다. 이 말은 워낙 유명한 말이기에 그냥 영어로 제목을 잡았습니다. 이 말은 설교자의 말이 아니고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로 했던 말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2004년 췌장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나 회복된 후 졸업식에서 던져준 의미심장한 축사입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음의 패기로 가득한 스탠퍼드대학 졸업생들을 향해 유망한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만족하지 말고 사회에 나가 본인의 잘남을 믿지 말고, 주변에서 어리석다고 할 정도의 우직함으로 자신들의 길을 묵묵히 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볼 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시편 기자도 42편에서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 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42:1-2)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급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갈망’이라는 표현을 잘 들으십시오. 지금은 ‘갈망’이 사라지는 시대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은 사슴이 목말라 시냇물을 찾는 ‘hungry’ 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갈망하며 사모하며 찾아야 합니다. (stay hungry)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세상 사람이 어리석다고 할 정도의 우직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라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중 정말 똑똑하고 잘난 그리스도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우직하고 충성 되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근본적 영성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올 곳은 신앙의 삶을 살지 않으면 삶의 자세와 방향과 기대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려 살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별됨 없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뻔뻔하게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갈망하며 구별된 삶을 추구하는 삶이 얻게 되는 것은 ‘영생의 양식’ 이라 하십니다. ‘썩을 양식’ 듣기만 해도 기분 나쁜 단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이 전달하시고자 하신 이 뜻을 정말 깊이 잘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썩을 양식, 영생의 양식’ 다 비유입니다. 우리의 귀한 삶을 이 썩을 양식을 향해 전력투구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생명의 떡은 바로 나다.’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는 신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셔서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 후 주님께서는 그 따르는 무리가 그 기적 뒤에 숨겨진 표적 즉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리를 이루며 ‘주님께서 또 무슨 기적을 보여 주시려나?’에 관심이 머물자 실망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그 무리가 발견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떡과 물고기는 물질입니다. 유한하며 결국은 썩어집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양식은 살면서 중요한 것이 분명하지만 최고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물질은 물질일 뿐이다’하십니다. ‘한계가 있다.’ 하십니다. ‘썩어질 것이고 유한한 것이다’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27절) 이 말씀을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들,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꼭 마음에 담고 명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을 먹고 배부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신비한 능력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름처럼 주님이 가시는 곳이면 모두 몰려다닙니다. 기적을 원하며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향해 썩을 양식을 찾아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26~27절)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곧 주님)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상당히 불편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그 떡 뒤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과 생명을 볼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들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수준에 머문 것을 불편해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아서 ‘썩을 양식’이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기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우리가 구하는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썩어질 물질임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의도를 잘 보아야 합니다. 영생의 양식, 생명의 떡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명이신 주님의 몸을 먹고 자유를 누리며 평화 가운데 살기를 원하시고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기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을 품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목말라야 합니다. 썩을 양식을 얻고자 하는 수단으로 주님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의 기대대로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목말라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로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추구하고 찾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따르는 주님이 누구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봤던 사람들처럼 필요한 것들을 기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계십니까? 그것을 기대하며 교회에 나옵니까? 그렇다면 만약 그 기적을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을 것입니까?
이어령 선생의 이야기를 잠시 들려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작고한 이어령 박사의 딸(이민아 목사) 은 눈이 상당히 아파서 고통받았고, 실명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던 이어령 박사는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었습니다. 눈이 아파서 실명 위기에 놓인 딸을 보며 자신의 눈이라도 빼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딸의 눈의 치유를 대가로 하나님을 믿는 흥정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볼 때 기독교는 그렇게 편협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눈이 아픈 딸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들을 모두 낫게 해달라는 조건이 아니면, 내 딸의 눈만 낫는 것을 바란다면 그게 무슨 이웃사랑인가? 하는 취지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더 큰 목적과 뜻을 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큰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보상을 원하며 보상의 대가로 흥정하는 믿음 체계에 대한 큰 도전을 한 것입니다. 이어령 박사 딸의 눈은 기적적으로 낫습니다. 그리고 이어령 박사는 세례를 받게 됩니다. 한국 지성계가 충격에 빠집니다. 기자들이 이 박사를 취재하기 위해 벌떼처럼 연구소 앞에 모여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따님이 눈이 보이게 되어 그 기적 때문에 무신론을 버린 것입니까?’ 이어령 박사는 그 기자들을 향해 얘기합니다. 내 딸의 눈이 보이게 된 것은 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기적투성이다. 사는 것도 기적이고 숨 쉬는 것도 기적이고, 자고 난 후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것도 기적이고……. 이렇게 기적은 매일 일어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기적을 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안 됩니다. 기적을 신앙을 갖는 도구로 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기적은 잘 살펴보면 다 있다가 없어질 썩어질 양식들임을 알게 됩니다. 병 고침의 기적을 구하고 고침을 받아도 우리는 결국 죽습니다. 성공과 명예를 그토록 원하고 갈구하지만, 정년 퇴임 후에는 그것도 큰 의미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이 땅의 것들입니다. 한시적이며 유한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구하며 그것을 매개로 삼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을 깊이 추구하는 신앙생활이 먼저라고 하십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나는 생명의 양식이다. 나를 찾기에 배고프고 사슴이 목말라서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왔다 갔다만 하셨습니까? 그 생활을 버리라 하십니다. 하나님께 목말라하라 하십니다.
주님의 제자인 도마는 의심이 많았던 제자입니다.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주님의 ‘상처’를 보고 난 후입니다. ‘상처’로 주님은 도마와 교통하기 시작합니다. (요 20:24-29)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20:24-29)
우리는 불신자들이 기적을 경험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경험했듯이 기적의 경험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잠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체험했던 자들에게 주님께서 ‘고난’에 대해 말씀하시자 그들은 하나둘 다 떠나갑니다. 사람들에게 기적이 주는 효과 (약발)은 잠깐 그때뿐입니다. 상처를 통해 얻은 믿음의 효과는 훨씬 더 오래갑니다. 그래서 기적을 통해서가 아닌, 상처를 보고 믿는 믿음이 더 진실이라는 역설이 사실입니다.
이 시대는 기적보다 상처의 능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살다가 고난을 겪는 아픔이 상처입니다. 모두가 피하고자 하는 상처가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극도의 이기주의 시대를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따르며, 이웃을 사랑하며 희생하고 섬기는 중에 상처받는 아픔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성공했을 때 절대로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정신이 없는 성공은 아무런 감동이나 울림을 줄 수 없습니다.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우선의 목표로 두지 않고, 온전히 주님을 따르려 하다가 입는 상처들을 귀하게 봅니다. 교회가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고난, 희생, 섬김과 같은 상처가 많아져야 합니다. 이런 상처들을 통해 하나님은 영향력 있게 전파될 수 있습니다. 필요할 때만 찾는 한방의 신앙, 몰빵의 신앙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길 때만 드리는 행태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불편하더라도 들으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시고 세상 사람들 눈에 어리석게 보일 정도의 우직함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시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소망하고 따르고자 애쓰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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