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8.주일 설교: 반드시 함께(출3:11~12). 양은익 목사

 

말씀: 반드시 함께(출3:11~12)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1-12)

매서운 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위에 고생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 이 겨울 잘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양반 중에 일부는 한겨울에 한 끼 식사는 죽을 먹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초근목피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죄스러워 한 끼는 죽으로 식사했다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입니다. 이 나라 공동체에도 이 같은 따뜻한 마음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몇 주간에 걸쳐서 일 년간 우리가 한 해를 살면서 가져야 할 기본 마음가짐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반드시 함께’입니다. ‘함께’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새해 거룩한 길을 가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마음의 다짐이 필요합니다.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의 짧은 소설 ‘전짓불 앞의 방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6.25 전쟁 시 빨치산이 활동하던 시기에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밤은 칠흑처럼 어두운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누군가 갑자기 그 어두운 밤에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전짓불을 얼굴에 들이대고는 묻습니다. ‘어느 편이냐?’ 그 당시 시골 주민들은 낮에는 경찰들이 활동하니 경찰 편(우편), 밤에는 빨치산이 활동하니 빨치산 편(좌편)을 들면서 아슬아슬하게 생존을 유지해 가던 시기였습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면 답은 간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짓불을 얼굴에 들이대니 상대방 얼굴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답을 해야 하는 결정의 순간은 찰나적 순간입니다. 만약 그가 빨치산이라면 ‘우’라고 답하면 죽게 될 것입니다. 그가 ‘우’인데 ‘좌’라고 답해도 문제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온 가족이 몰살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니 확률은 반반입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길은 다만 한가지,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근거로 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제 목숨을 건 자기 진심의 드러냄인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길은 없다’(이청준) 확률이 반이니 진심, 진실을 말함이 답이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살다 보면 이런 힘든 선택, 판단에 직면하게 됩니다. 작가는 진심, 진실의 문제를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는 모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80세 된 모세를 향해 애굽으로 가서 고통받고 있는 백성을 바로에게서 구해내라고 요청하고 결단하라고 하십니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청입니다. 애굽은 모세가 왕자로 지냈던 곳이고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친 곳이며 한 개인 신분으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제국입니다. 그 엄청난 숫자의 노예를 풀어 달리고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 엄청난 요구를 하십니다. 모세로서는 목숨을 내놔야 하는 엄청난 요청입니다.

그 당시 모세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지 못하던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떨기나무 아래 나타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처지에서만 판단합니다. 가면 죽음입니다. 안가면 사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선택의 갈림길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엄중한 순간이 온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모세는 그 어마어마한 요청에 ‘저 못가겠습니다’하고 바로 반응하며 응답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나아가며,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11절) 저는 능력도 안 되고, 용기도 없으니 갈 수 없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너무나 뻔하고 확실하기에 고민 없이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이것은 모세가 겸손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거절한 이유가 나옵니다. 첫째, 자신이 없었고(출3:11),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즉 하나님을 잘 몰랐고(출3:13), 언변이 없었고(출4:10), 열정도 없었기 때문(출4:13)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면 죽을 것 같았기에 하나님께 자신 말고 다른 보낼만한 사람을 찾아보라고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사람을 잘못 고르신 것일까요?

모세는 애굽 왕자 시절 자신 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도망자 신세가 되어 광야 세월을 살며 팔십의 노년 나이에 이르자 위축되고 초라해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안하시자 일고의 여지도 없이 바로 거절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물론 모세는 경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안을 하시기 전에 징표를 보여 주셨습니다. 불은 나무에 있는데 나무는 타지 않는 장면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런 경험을 했으니 모세로서는 좀 더 신중하게 세밀하게 판단과 결정을 내렸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들은 후 생각하고 성찰해야 하는 과정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은 이렇게 노년이며 아무 능력도 없고 말재주도 없는데 왜 나를 택하셨을까? 내게 가능성이 있어서 부르셨을까? 이유가 뭘까? 하는 진지한 질문을 했어야만 합니다. 모세는 성찰의 시간 없이 그냥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데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려버립니다. 우리도 이런 모습으로 성찰의 과정 없이 너무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많은 실수를 거듭하며 시행착오를 거듭합니다. ‘가라!’ 듣자마자 ‘아니오!’라고 당장에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이 실수를 계속 반복하지 않으려면 오늘 이 말씀을 잘 보셔야 합니다.

판단의 종류를 잘 보여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3-4)

세 가지 판단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 나 자신의 판단,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송인규 교수는 ‘자아가 자아를 엿보다’라는 책에서 이 세 가지 판단의 호칭을 타판(他判, 다른 사람의 판단), 자판(自判, 나 자신의 판단), 신판(神判, 하나님의 판단)으로 구분했습니다. 바울도 여기서 이 세 가지 판단을 얘기합니다. 각자 자신을 돌아보시고 나에게 주된 판단은 무엇인지 살피십시오. 판단의 근거는 이 세 가지입니다. 신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평소 일반적인 판단의 순간에서나, 긴박하고 중대한 결정을 판단하는 순간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잘 어우러진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자판(自判)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며 고집과 편애하며 옹호하는 모순에 빠질 수 있기에 판단의 사각지대,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판(他判)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소신 있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한계를 보완해 줄 타판이 필요한 것입니다. 타판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신앙적인 조언이든 지혜든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 더불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판단의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신판(神判)입니다. 신판은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생각입니다. 나 자신 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판단을 먼저 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 신판을 삶의 모든 순간 고려하고자 하는 것은 습관으로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삶의 지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지혜인 ‘나의 판단과 너의 판단’의 고려 수준에서 판단의 지침을 얻으면 안 됩니다. 매 순간 신판을 고려하는 겸손함을 꼭 지녀야 합니다. 판단 하실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모든 판단의 순간 반드시 하나님의 판단을 고려해야 합니다. 거룩한 길을 걸을 때도 하나님의 판단을 묻고 고려하며 걸음을 걸어가야 합니다. 생사가 걸린 문제, 자녀의 앞날이 걸린 문제를 판단할 때도 하나님의 판단을 묻고 따르는 영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실제 삶의 모든 상황에서는 자판과 타판이 넘쳐납니다. 모든 판단의 가장 중요한 지침은 하나님의 판단이어야 합니다.

모든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을 고려하여 결정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판단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성경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판단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고 일단 결정을 내렸다면 여러분들이 내린 결정에 대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뜻을 아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관심을 기울여서 성경을 보게 되면 웬만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다 나와 있습니다. 잘 몰라도 간단한 질문만으로도 잘못된 판단을 많이 잡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궁금하시면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좋게 보실까? 간단하지만 효과 만점이 방법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묻고 따르고자 하며, 모든 판단의 기준과 근거를 신판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거룩한 길을 걸어가는 여정에 반드시 꼭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진실과 진심은 신판 속에 있음을 꼭 기억하십시오.

모세는 신판이 부족했습니다. 자판과 타판은 있었으나 신판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늙었고 초라하고 자신 없고, 말재주도 없고, 그리고 함께했던 가족과 이웃들도 애굽에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불붙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여 주시며, ‘가라’하시고 반드시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자신을 택하셨는지에 대한 고려는 지금 모세에게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고 판단해 주실 때 항상 하나님의 약속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겠다’(12절)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그냥 늘 듣는 상투적인 말씀으로 듣지 마시고 뜨겁게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부담스러운 요청을 하실 때는 항상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특히 젊은 세대들은 부담스러운 길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 자판과 타판만으로 판단하며 거절합니다. 신판도 있어야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의 말입니다. ‘나는 일생동안 참 훌륭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속에서 시편 23편에 나오는 네 단어보다 내 마음을 고요하고 기쁘게 해 준 말을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1~4)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도 늘 뜨겁게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힘든 어두운 골짜기에 들어서셨습니까? ‘반드시 함께 계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을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새롭게 시작되어 힘차게 출발한 이 새해, 여러분들은 또 수많은 판단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중에는 생사를 가를 정도의 중대한 판단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묻고 판단하십시오. ‘하나님의 판단은 무엇입니까?’, ‘제 이 결정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결정입니까?’ 모든 순간 물으며 판단하며 앞을 향하여 거룩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너와 함께 한다!’ 하신 약속의 축복이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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