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감사절 메시지 2. 어지신 하나님을 맛보라(시34:1~10)
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34:1-10)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일 년의 농사를 추수하고 수확하며 감사하는 주간입니다. 심으면 가두는 것이 자연의 원리이며 은혜입니다. 여러분들도 1년의 삶을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풍성히 그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풍성히 임하시기를 바라며 옆의 분들과 인사 나누고 말씀 보겠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은 제가 감사절이면 꺼내 보곤 하는 이해인 시인의 [선인장의 감사]라는 시로 시작을 하겠습니다. ‘사막에서도 나를 살게 하셨습니다. 쓰디쓴 목마름도 필요한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내 푸른 살을 고통의 가시들로 축복하신 당신. 피 묻은 인고의 세월 견딜 힘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어느 날, 가장 긴 가시 끝에 가장 화려한 꽃 한 송이 피워 물게 하셨습니다’
이 시가 주는 감동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사막과 목마름과 고통의 가시가 있어도 무너지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 남은 인생 무너지지 말고 삽시다. 우리도 선인장처럼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피워야 하지 않습니까? 모두 그렇게 되시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이 감사는 ‘無’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사막과 목마름과 고통은 온전한 ‘없음’입니다. 모든 감사가 같지 않습니다. 없음에서도 드리는 無의 감사가 있고, 얻게 됨에서 나오는 有의 감사가 있습니다. 有의 감사(받음과 있음에 대한 감사)도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없음에서 드리는 감사는 차원이 다른 감사입니다. 없음에서 나오는 감사는 삶의 깊이와 연륜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아무나 못 합니다. 믿음으로 하는 감사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감사 방향과 모습은 ‘무의 감사’입니다. 우리는 늘 없음을 경험합니다. 없음은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이것은 감사 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없고, 돈, 명예, 건강, 직장. 모두 없고, 없고, 없음은 불만의 조건이지 감사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힘든 겁니다. 철들지 안으면 감사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우리 중에 ‘있음’이 ‘없음’보다 많아 감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없음의 상황에 처한 사람이 더 많고, 없음은 고통입니다. 없음은 내 삶을 상당히 왜곡시킵니다. 없음의 상황은 사람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킵니다. 어떤 모양으로까지 변화시킬지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까지 위태롭게 만듭니다. 그만큼 위협적이며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감사를 이야기하는 이 엄중한 시간에 감사의 참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면 ‘없음’의 조건에 사는 우리에게 감사는 ‘빛 좋은 개살구’ 또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됩니다. 위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없음 속에서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각자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없음 속에서 그 고통을 이기는 감사가 내 안에서 터져 나오고 고백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그는 심각한 없음의 상황을 극복하고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그를 만나보시고 감사의 이유를 다시 찾아보고 다짐하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나 어떤 일이 있어도 여호와를 찬양하리라. 주를 찬양하는 노래 내 입에서 그칠 날이 없으리라. 2. 나의 자랑, 여호와께 있으니 비천한 자들아, 듣고 기뻐하여라. 3. 나와 함께 여호와, 높으시도다. 노래 부르자. 모두 소리 맞춰 그 이름을 기리자.(시34:1~3.공동번역)
엄청난 찬양과 탄성과 감격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 시편의 찬양을 보면 무슨 대박이라도 터져서 노래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 34편의 서두에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씌여 있습니다. 대박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모욕과 수치 속에서 부른 찬양의 시입니다.
이 시가 나오게 된 상황을 살펴봅시다.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리고전쟁에서승승장구하는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울 왕도 그런 다윗을 대견해 했습니다. 그러나 추종자가 많아지고 백성들이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요’하는 노래를 부르며 다웟을 지지하자 사울 왕은 다윗을 정적으로 주목하고 가차 없이 죽이고자 합니다. 정적 제거는 과거나 현재에나 정치의 필수 요소입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국내에는 포위망이 좁혀져 숨을 곳이 없자, 다윗은 외국으로 피신해 들어갑니다. 피신한 곳은 골리앗의 나라 블레셋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너무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을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죽이고자 합니다. 죽음의 위험을 느낀 다윗은 미친 척하며 그 위기를 모면하고자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난 것을 알고 당황했다. 그는 가드 왕에게 최악의 일을 당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미친 척하며 머리를 성문에 찧고 나서, 입에 거품을 물고 수염에 침을 흘렸다’(삼상21:12~13. 메시지 역) 이때 다윗의 나이는 불과 2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 한창의 나이에 죽음의 문턱 앞에서 다윗은 미친 연기를 사실적으로 합니다. 문짝에 머리를 찍으며 부딪히고 침을 질질 흘립니다. 그리고 그 연기에 속아 그들은 다윗을 보기 싫다고 성 밖으로 쫓아내 버립니다. 정말로 미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렇게 쫓겨나 목숨을 구한 후 아둘람 동굴로 은신해 피신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시편의 노래는 그때 지은 노래입니다. 정말로 살아나온 것은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입니까? 전쟁의 영웅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쫓기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미친 노릇까지 해야 할 비참한 지경에 도달했습니다. 이런 수치와 모멸감 속에서 어두운 동굴 속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20대 젊은이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서 이런 감격의 찬양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일까요?
시편 34편은 곤고함, 두려움, 환난, 마음 상함, 부족함을 얘기합니다. 한 번이라도 지금 다윗이 경험하고 있는 수치심, 모멸감을 경험해 봤다면 다윗의 모습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없음의 자리에서 이런 찬양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지 아실 것 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과 모든 관계를 끊고 하나님도 거부하며 수년의 세월을 낭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없음의 다윗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남의 일이라고 가볍게 보시지 마십시오. 모멸감을 받고 비참한 없음의 자리에서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실로 굉장한 사건입니다. 전혀 아무것도 없는 이가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찬양하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송축합니다.
다윗의 태도는 전혀 상투적이지 않습니다. 다윗이 없음에서 찬양할 수 있었던 답을 들은 후에 너무 지당하다는 상투적인 반응을 하시면 안 됩니다. 다윗의 상황은 백척간두의 상황입니다. 다윗은 그 극한의 상황에서 기도하며 ‘선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체험을 하나님을 맛봤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두운 동굴에서 비참한 극한의 상황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맛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입니다.
이 체험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있냐? 없냐? 하는 우리의 짧은 이성으로 생각해 내는 그런 차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실존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눈이 열리며,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경탄하는 것입니다. 신비에 접촉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이런 체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연약한 육체를 가진 인성 속에 하나님의 실체가 경험되고 맛보게 된 것입니다
4~7절에 신앙고백을 합니다. ‘여호와 찾아 호소할 때 들어 주시고, 몸서리쳐지는 곤경에서 건져주셨다. 그를 쳐다보는 자, 그 얼굴 빛나고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아니하리라. 가엾은 자의 부르짖음을 여호와, 들으시고 곤경에서 건져주셨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해 주셨다’(시34:4~7. 공동번역)
4절은 과거 목동 시절 수많은 맹수의 위협 속에서 자신과 양들을 지켜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돌팔매로 물리치도록 도와주신 하나님 등 과거로부터 모든 도우심에 대한 복합적인 경험의 감사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동굴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앙망하며 하나님을 맛보니, 자신의 부끄러운 상황이 모두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4~7절의 다윗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다윗처럼 호소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강하십니까? 하나님을 찾고 호소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정도의 영적 민감성은 가져야 하지 않습니까? 나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무엇입니까? 나에게 믿음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어두운 굴속에서 보여준 호소와 부르짖음은 우리가 소유해야 할 영적 민감성입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아마 다윗의 기도는 상당히 거칠었을 것입니다. 고분고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대체 지금 이 저의 꼴이 무엇입니까?’ 했을 것입니다. 기도의 언어가 상당히 거칠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못 드릴 기도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화 있을진저’하는 욕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또한, 저주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는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앞에서 하면 욕이요, 원망이요, 저주가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면 탄원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복수조차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 알아서 해 주십시오!’ 성도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탄원의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드리는 기도는 한없이 거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금술사 같으신 하나님께서는 탄원하러 기도의 자리로 나온 그분의 백성들을 기도 중에 치유해 주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유를 발견하게 해 주시고, 복수와 원망에서 벗어나는 귀한 마음을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하나님의 치유를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아직도 가슴에 응어리가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더 나아 오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치유를 받으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영적 민감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런 공명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 치유를 받아야 없음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치유가 없으면 감사는 없습니다. 이 치유는 속사람 내면의 치유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치유하면 나의 갈고리는 무디어집니다. 그리고 상처가 치유될 때 오늘 시에서 본 화려한 꽃 한 송이(감사)를 피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지난주 우리는 범사에 감사함을 봤습니다. 좋은 일에 축제 감사, 나쁜 일에 초월 감사, 작은 일에 확대 감사, 실패에 오뚝이 감사, 평범한 일에 연결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를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 정도의 감사를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렇게 나쁜 일에도 초월해서 감사하려면 다윗처럼 하나님께 나아와 호소하며 하나님과 공명하고 치유하여야 이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밴댕이 소갈딱지 정도의 마음밖에는 안 됩니다. 감사는커녕, 상처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8절과 9절에서 간곡하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34:8~9)
다윗은 두 가지를 호소합니다. 첫째,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둘째,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이 두 가지가 없음의 다윗에게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된 비결이요 답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험했고 그 경험한 하나님은 무궁히 선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곤고할 때 나아가 부르짖으면 언제나 무한히 받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이 다윗이 맛보고 경험한 선하신 하나님의 실체와 사랑과 은총과 함께하심을 장맛 보듯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맛보는 것은 테스트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선하신지 아닌지 테스트하라는 것입니다. 내 전 인생을 놓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맛을 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고 각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실체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이성으로 따져 보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무릎 꿇어야 하며, 내 전 존재를 놓고 호소해야 하며 내게 다가오시며 만져 주시는 그분의 실체를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바쁘십니까? 바쁠수록 영적으로 깨어 있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하나님을 송축하는 노래가 터져 나오는 귀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없음’의 상황을 없앱니다. 즉 그렇게 추구했던 세상 기준의 있음이 별것이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왜 시원하게 나오지 않습니까? 내 모습이 없음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1-6)
다윗이 만났던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여러분 모두도 이 놀라운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고 누리게 되시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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