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2. 주일 설교: 감사절 메시지1. Stop, 불평.시비(빌2:14~16). 양은익 목사

 

감사절 메세지 1: Stop 불평, 시비(빌2:14~16)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2:14-16)

오늘도 하나님께서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큰 축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설득하시며 말씀으로 도전하실 때 말씀을 받아내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는 감사 주일입니다. 녹녹하지 못한 시간을 살다 보면 감사를 놓치기 쉽습니다. 이렇게 감사 절기를 주시고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감사는 평범한 단어가 아닙니다. 감사절을 맞이하여 감사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과 신비함을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감사는 삶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로 불행과 상처를 이긴 얘기는 너무나 많습니다. 바울 사도도 ‘염려하는 일이 생기면 염려만 하지 말고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빌4:6)고 했습니다. 감사가 염려를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황성주 박사의 5가지 감사 어구는 볼수록 은혜입니다. 소개해 드립니다. 좋은 일에 축제 감사, 나쁜 일에 초월 감사, 작은 일에는 확대 감사, 실패도 성공의 재료가 되니 오뚝이 감사, 평범한 일도 서로 이어져 있으니 연결 감사. 정말로 범사에 감사입니다. 이렇게 하면 감사를 이겨낼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CCC 설립자셨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준곤 목사님께서 감사에 대한 말씀을 전할 때 늘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독일에 40대에 설암에 걸려 혀를 자르는 수술을 앞둔 환자가 있었습니다. 수술 직전 의사가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시라고 하자, 환자는 말합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은 사람의 마음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 말이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사라고 한다면 이 감사로 이 환자분이 얻게 될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감사가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감사는 성도들에게 하나의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감사는 성도들에게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탄은 늘 우리를 실망과 좌절과 분노 등으로 공격합니다. 막아낼 무기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성도들에게는 꼭 있어야 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에게 이 무기가 없게 되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형식적으로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감격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감사로 들어가는 문은 여러 개 일 것입니다.
1. 믿음의 문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7). 감사와 믿음은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2. 기도와 찬양의 문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기도와 찬양은 감사에 중요한 힘이 됩니다. 기도의 영이 살아 있으면 어떤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3. Stop 불평, 시비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4)

일반적인 삶에서 하는 감사는 ‘사람 됨됨이’만 제대로 되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범사에 감사’ 입니다.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감사입니다. 이 범사에 감사함은 인간 됨됨이만으로는 안됩니다. 신앙인인 우리도 제대로 하기 힘듭니다. 이 감사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믿음의 문을 통과하고, 기도와 찬양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감사하기 힘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맨정신으로 감사하기는 정말 힘듭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믿음과 기도 없이는 견디기 힘듭니다.

원망할 일과 시비할 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렇게 신실한 욥도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시편도 감사로 넘쳐나지만, 불평도 많습니다. 악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악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믿음 좋은 이들도 불평할 수 있고 시비할 수 있습니다. 혹자들은 이 ‘감사하라’라는 말에 시비를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감사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거짓되거나 외식된 기쁨과 감사는 거절합니다. 우리는 울 때는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가 원망과 시비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원망과 시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런데도 하나님께 나아와 눈물로 기도로 간절히 구하는 그 모습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겨나갈 힘과 길을 허락하십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얘기합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4절) 뒤집으면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는 불평입니다. 시비란 시시비비를 가리는 다툼입니다. 가려야 할 때는 가려야 하겠지만 바울은 그런 품성으로 자신을 만들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나쁜 품성이 몸에 배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불평과 시비를 ‘내면화’, ‘장기화’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평과 시비가 내 내면(속사람)으로 침투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사람으로 침투해 들어오면 삶은 왜곡되고 감사는 떠나게 됩니다.

바울은 불평과 시비를 성품의 문제로 보지 않고, 신앙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구원을 이루고 거룩해져 가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불평과 시비는 맞지 않는다,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불평과 원망의 속을 한겹 한겹 벗겨가며 그 실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 중심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마지막 도달 지점은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라는 불만과 불신입니다. 이 원망과 시비의 내면화, 장기화는 그러하기에 신앙생활에 굉장히 위험합니다. 치명타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원망과 시비는 영의 문제입니다. 성격 탓으로 돌리면 안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불평과 시비를 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미국 Psychology Today 잡지에 실린 실험을 소개합니다. 10년간 매일 3시간씩 말이나 글, 행동으로 불평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논문이 내린 결론은 그 실험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는 그들이 불행한 에고이스트 즉 극단적 이기주의의 삶을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평과 시비를 내면화시켰을 때 생기는 결과입니다.

자신만을 중요시하고, 남을 인정하지 않는 감사가 없는 삶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선은 나 자신이 망가지고, 나의 옆 사람도 망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망가집니다. 바울은 이 시비하는 세상, 옳고 그름을 언제나 따지며 승자가 나와야 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별과 같이 빛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원망, 시비 없는 감사가 있어야 함을 얘기합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15절)

우리가 끊임없이 감사하는 모습으로 내 이웃을 대하며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별과 같이 빛나는 존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웬만한 불평은 stop 하셔야 합니다. 불평과 시비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좋고 또한 나의 이웃에게도 좋습니다. 내 안에 감사가 충만하여 내 주변을 품어주면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비추어 주는 별같이 빛나는 빛이 될 것입니다. 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이런 감사가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이런 감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여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16절, 새번역) 이것이 바울이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별과 같은 빛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또한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되며 그 깨달음이 있어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장대한 구원의 계획을 알고 또한 깊은 감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들어가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름 없이 호롱불을 밝힐 수 없듯이 내 내면의 힘을 주는 연료(땔감)인 말씀이 없다면 내 안에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나의 자아는 타락되었습니다. 믿음과 기도와 말씀으로 그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나를 지배할 때 나는 비로소 범사에 감사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모든 것의 기준점은 말씀입니다. 내 안에 말씀이 들어가야 하며,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은 떡만으로 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먹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말씀으로 채워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자아로만 꽉 차 있습니까? 말씀이 없는 자아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릅니다. 말씀이 없는 자아는 비교와 탓하는 인생을 삽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계획을 알아가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죄성을 가진 나의 자아만으로는 범사에 감사 할 수 없습니다. 비교하고 싶지 않고, 남 탓하지 않고 싶어도 잘 안될 것입니다. 감사의 힘은 말씀의 힘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믿음, 기도, 말씀으로 내면을 채워야 합니다. 감사는 머리(이성)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뜨거운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칭기즈칸의 말은 현대를 살며 불평하고 시비하는 이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니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믿음이 없었던 칭기즈칸도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감사의 계절입니다. 진정한 은혜 넘치는 감사의 자리로 나아 오십시오. 감사할 줄 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까 봤던 황성주 박사의 범사에 감사 구호 외치고 마칩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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