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새벽, 집중, 기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롬12:12)
오늘은 세 개의 단어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바로 ‘새벽, 집중, 기도’ 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개의 단어의 신앙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주제를 잡은 이유는 1주 앞으로 다가온 ‘새벽 집중 기도회’ 때문 만이 아니라, 이 세 가지 단어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선하고 좋은 마음으로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여러분 신앙의 삶 가운데에 이 세 개의 단어가 살아나면 좋겠습니다.
1. 새벽
새벽이란 동트기 전, 하루를 여는 시간, 어둠이 물러가는 여명의 시간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너무나 중요한 시간입니다. 새벽, 첫 빛이 어둠을 물리칠 때 하루가 시작됩니다. 일생에 한 번 뿐인 그 하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혹 불면의 밤을 보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시간이 정지된 듯 흐릅니다. 그러나 그 긴 시간이 지나도 어김없이 새벽은 찾아옵니다.
새벽의 의미는 상당히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새 출발입니다. 새벽을 기점으로 어제와 구별된 오늘의 새 삶이 시작됩니다. 감사의 시간, 은혜의 시간이 새 하루와 더불어 시작됩니다. 수도원 생활을 할 때 ‘새벽’을 노래한 글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찬양으로 새벽을 함께 맞이합니다.
‘찬양을 부르며 하루의 처녀지에 선다. 찬양하며 예배자들이 하루의 시작을 맞이할 뿐 아니라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죄와 죽음의 어둠을 정복하신 분을 떠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새로운 삶의 시작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거룩하고 깊이 있게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사모하며 뜨겁게 하루를 맞이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삶의 방식입니다. 만약 시간의 질을 측정할 수 있다면, 새벽 시간의 질이 가장 뛰어날 것 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새벽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놀라운 시간입니다. 영이 살아나 뛰어 오르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도 새벽마다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 우리와 다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 희망의 빛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안에 있기 위함이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가하셔서 새벽기도를 계속하셨던 걸까요? 주님께서는 온종일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베드로 장모를 심방하셔서 치유해 주시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셨습니다. 아마 몇 시간 정도 주무셨던 것 같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예수님이시니까 그렇게 하셨겠지…. 하고 우기신다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게 피곤하고 바쁜데도 새벽을 깨고 나오셨으면 새벽이 주는 은혜와 능력이 얼마나 굉장한 것일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새벽이 주는 영은 뜨겁습니다.
요즘은 밤의 시대입니다. 새벽은 죽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습니다. 가족들이 늦게까지 생활하다 보니 주부들도 밤늦게까지 일들이 있습니다. 생활 방식이 새벽을 없애는 것입니다. 새벽 시간이 깨끗한 영성을 갖는 중요한 시간이지만 문화 자체가 밤의 문화를 포기 못 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밤의 문화를 당연시하고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벽 시간이 주는 선물(새벽의 영성)은 세 가지입니다. 신비와 고요함과 생기입니다. 실제로 새벽을 살았던 많은 분이 이 세 가지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새벽을 잃어버리면서 동시에 이 선물들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새벽을 회복할 때 우리는 새벽이 주는 이 세 가지 영성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신비
새벽만큼 신비와 어울리는 단어는 없습니다. 새벽의 세상은 놀랍게도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꽉 차 있습니다. 새벽의 세상만큼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세상은 없습니다. 빛이 떠오를 때 우리는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잠들었던 세상이 다 잠에서 깨어납니다. 미물들조차도 깨어납니다. 자연은 잠에서 깨어나는 경이로움을 줍니다. 이슬도 새벽에 잎에 내려앉습니다. 우리가 신비를 놓치면 하나님을 놓칩니다. 새벽은 하나님의 신비로움과 경탄스러움에 폭 잠기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함께 계시다고 느끼는 하나님 임재 체험은 보통은 나를 중심으로 느낍니다. 우리는 기도가 잘되고 우리에게 은혜의 감격과 감사가 넘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이런 정념적 방식의 체험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정서와 감정으로 측정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훨씬 더 넓게 깊이 신비함으로 다가와 계십니다. 내가 힘들고 기도 생활도 안 되어 감정적으로 ‘하나님 없음’을 느끼고 있는 그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 임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비를 깊이 느끼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렇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 수 없습니다.
신비는 ‘하나님의 부재’(응답 없는 하나님)라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게 해 줍니다. 신비는 첫 번째 빛이 비치는 깨끗한 새벽에 깨끗하게 준비된 마음 가운데에 임합니다. 신비가 나를 감쌀 때 하나님의 부재는 임재가 되고, 하나님의 부재를 견뎌내는 인내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비는 현실을 이겨내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러하기에 현실이 각팍할수록 신비의 하나님을 받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라고 합니다.(롬12:12a) 앞이 막힌듯한 팍팍한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벽의 선물인 신비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현실만 남게 되면 우리에게는 소망도 없습니다. 즐거움도 없습니다. 새벽은 신비의 시간입니다. 밤 시간을 지워나가면서, 새벽을 살려 신비의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2)고요함
새벽이 주는 두 번째 선물은 ‘고요함’입니다. 이것은 신비를 받기 위한(경험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밤의 소음과 혼잡함 속에서는 신비를 경험하기 힘듭니다. 새벽 시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좋은 시간입니다. 새벽은 나에게 필요한 음성 (내게 절실한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나님은 내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말씀을 주십니다. 바로 그 말씀이 나와 내 가정을 살립니다.
새벽을 깨워 기도가 살아나는 터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새벽의 고요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기에 너무나 중요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들으려고 애쓸 때 새벽의 고요함은 많은 말씀이 들리도록 해 줍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와 내가 드릴 말도 많지만, 그보다 앞서 먼저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먼저 듣고자 애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고통 가운데서 인내(롬12:12b)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새벽은 고요함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줄 것입니다. 소음과 잡음 속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힘듭니다.
(3)생기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the 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living soul)이 되니라'(창2:7) 성령이 생명의 호흡입니다. 성령이 나를 주관하실 때 영혼이 살아나고 육도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새벽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호흡으로 가득 찬 시간입니다. 내 안에 찬송이 생기고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생기를 받으십시오! ‘기도를 멈추지 말라’(롬12:12c)고 합니다. 기도를 멈추지 않을 방법은 생기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새벽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새벽에 하나님의 답이 있습니다. 새벽을 통해 ‘신비와 고요함과 생기’를 주십니다. 새벽을 깨워 기도가 자라나는 기도의 터전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2. 기도
‘기도하거나 하지 않거나 똑같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은 불행한 분들입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대충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정말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기도는 내게 신비한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통해 일어납니다. 기도 없이는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기도를 멈추지 마십시오. 멈추었다면 다시 진실하게 시작하십시오. 이미 기도하고 계셨던 분들은 더욱더 깊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3. 집중
대다수의 교회는 ‘특별’이란 말을 좋아하고 사용합니다. 그래서 특별기도회 제목이 붙으면 그 특별의 어미가 주는 남들이 받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더더욱 받으려고 합니다. 특별이란 단어는 배타적이며 차별성을 띠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집중’이란 단어는 성경적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산만해져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한 채 살고 있어서, 내 삶이 엉망이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삽니다. 또한,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니, 받은 은혜도 모르고, 하나님의 영광도 모르고 감사도 모르며 삽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렇게 사는 것이 병들었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특별한 것, 남들이 갖지 못한 것을 더 갖겠다는 허황한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매 순간 하나님께 집중하며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집중하지 못합니다. 집중이란 겸손한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현실과 싸워나가기 위해 방심하지 않으려 할 때 나오는 자세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섬세한 집중을 통해 수많은 역사적 위대한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힘입어 단번에 뛰어넘으려는 ‘특별’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집중’하십시오. 겸손하여지기 바랍니다. 지금 시대는 너무나 많은 기기의 발전과 더불어 산만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이든 삶이든 집중해야 합니다. 집중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옛날 속담에 ‘집안이 망하려면 장맛부터 변한다’라고 했습니다. 장 담그는데도 정성과 집중이 필요하니 장맛이 변하면 집안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집중은 에너지입니다. 낭비하면 안 됩니다. 지금 어떠한 것에 몰두하고 집중하고 있습니까? 혹시 집중하는 것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잘못된 집중은 삶을 더 망가뜨립니다.
여러분이 새벽 집중 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에 집중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것은 피조물로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구호를 외쳐보겠습니다.
새벽, 집중, 기도!
신비, 고요, 생기!
희망, 인내, 기도!
꼭 성취하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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