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 주일 설교: 눈물을 흘리며(막9:14~24). 양은익 목사

20171001

말씀: 눈물을 흘리며(막9:14~24). 추석(금주는 영상 녹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9:14-24)

오늘은 추석 연휴로 맞이하는 10월 첫 주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들어가기 전에 이기철 시인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시 한 편 보겠습니다. 사죄의 시이며, 감사의 시이며, 결심의 시입니다. 요즘은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감사하며 지내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내 걸어온 길 되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이,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사죄합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한 학생들에게 사죄합니다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저 많은 햇빛 공(空)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사죄합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간단히 볼 수 있는 시입니다. 이러한 단순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이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삶이 풍성해집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감사한 것들로 인해 우리가 또 추석 감사의 절기를 맞는 것입니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다 보면 사소한 일들로 갈등이 생겨 즐거운 명절을 힘들게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올 추석은 좋은 마음으로만 가득한 추석 보내기를 바랍니다. 명절 잘 보내는 것도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 사건을 경험한 직후 주님 일행은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그때 일어난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제자들 있는 곳으로 갔는데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심한 논쟁(말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옥신각신하면서 큰 소리로 심한 말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병든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 병든 아이는 말을 못 하는 아이였습니다. ‘말다툼 가운데 있는 제자들, 예수님 앞으로 아비의 손에 이끌려 오게 된 말 못하는 아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아이러니입니다. 이 아이러니한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이의 아비는 주님께 아이의 증세를 얘기합니다.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18절) 간질병 환자입니다. 그 당시는 의학이 발전 안 되었기에 귀신 들린 환자로 취급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이의 증세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물으십니다. 아비는 어릴 때부터 라고 답합니다. (21절) 상당한 기간을 병으로 시달리며 고생한 것입니다. 옆에서 아이를 지켜봐야만 하는 부모의 마음이 오죽 힘들었겠습니까? 현대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아이는 무의식과 억압에 눌려있는 아이입니다. 아이의 치유를 애타게 소망하는 아비에게 치유의 예수님 소문이 들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안 계시고, 제자들만 있기에 그들에게 아이를 ‘고쳐달라’ 간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이 아이의 병을 고쳐줬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제자들은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보시고 따끔하게 질책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19절)이 말씀은 제자들이 충분히 그 병을 고칠 수 있었는데 고치지 못했기에 하시는 질책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잘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의 정의’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문제에 직면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우리는 ‘믿음’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대부분은 주님께서 주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한 면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의 또 한가지 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이 너희 안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절)라고 간청하는 아이의 아비를 향해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

주님께서 고쳐주시기를 간청하는 아비에게 주신 말씀은 예상을 빗나갑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는 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치유된다는 이 말씀을 재빨리 알아들었습니다. 아비의 믿음이 아이의 병을 낫게 한다는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간청합니다. ‘울며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4절)

아이의 치유에 아버지의 믿음이 필수적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순간, 삶의 어려움이 닥친 순간 우리는 치유되고 회복되며 새롭게 일어서기 위해 주님의 이 가르침을 꼭 깨닫고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치유와 회복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과 치유를 바라는 자의 믿음이 합해질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렇듯 치유와 회복에는 우리의 믿음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이 닥치면 오히려 믿음을 잃고 모든 것이 하나님 탓이라고 원망합니다. 그리고 막연히 알아서 해주시고 봐주시겠기 합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간절한 기도로의 신뢰 드림과 겸손한 의지함을 원하십니다.

아이의 아비가 보여준 반응은 놀랍습니다. ‘주님 믿겠습니다! 믿음을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께 온전한 믿음의 회복을 소원하고 간절히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사건의 key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 쪽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아이의 아비가 간청하는 간절한 자세를 우리는 꼭 배워야 합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24절)

눈물은 간절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점점 더 눈물이 마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은 마르면 안 됩니다. 아이의 아비는 그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아이의 병으로 힘들었겠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간절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라는 구절은 개혁개정판에는 빠졌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고대 사본과 영어 성경에도 ‘cry out!’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의 믿음으로 ‘고칠 수 있다!’라는 말씀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동안의 고생한 것에 대한 감정이 복받쳐서 울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당시는 마술과 주술이 성행하던 시대입니다. 마술사나 무당이 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주님의 말씀에 감격한 것입니다. ‘믿음’이 병을 고치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과학과 이성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신비’를 넘어서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을 원점(zero base)에서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는지?’, ‘내가 지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지?’, ‘나의 믿음 생활은 허상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믿음 생활이 진지하며 성실하게 진정성을 가졌는지?’ 살피셔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잘못되어 있다면 빨리 바로잡고 올바른 자리로 와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28절) 주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29절) 기도라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살리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살아나야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무조건 하나님께 맡기려는 간구함 만으로는 안됩니다. 내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진실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추석 명절입니다. 모두 기쁨과 감사를 선포하며 감사 주일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 기쁨과 감사 이전에 우리는 눈물이 있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쁨과 감사의 결실이 있기까지 울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비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십시오.

시편 126편에는 눈물이 나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5절은 ‘눈물’이라 말하고, 6절은 ‘울며’라고 합니다. 기쁨 전에 눈물이 있고, 결실이 있기 전에 울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간과하지 말라는 주의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 해결 안 된 일들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이웃 중에도 많은 어려움으로 눈물로 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에 대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은총으로 단을 거둘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결실의 눈물, 믿음의 눈물이어야 합니다. 지금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까? 꼭 하나님을 발견하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아이의 아비가 진정한 믿음을 소망하며, 간절한 눈물로 아이의 치유와 회복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여러분 모두에게도 그러한 회복과 치유의 은혜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온전한 믿음 생활을 응원합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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