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엘리야12. 세미한 소리를 듣는 영성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9-18)
오늘은 ‘세미한 소리를 듣는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엘리야 12번째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신비와 저항’이라는 저서를 남긴 독일의 정치 신학자 도르테 죌레(1929~2003)는 ‘고장 난 존재’라는 인상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바라본 후에 쓴 표현입니다. 근거 없이 이런 얘기를 할 때는 기분 나빠하고 아니라고 하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삶을 놓고 볼 때 자신 있게 ‘아니다’라고 하기에는 우리의 모습은 역부족입니다. 나의 삶을 보면 실제로 고장 나 있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가장 큰 고장은 무엇입니까? 도르테 죌레는 ‘사람이 자기 자신만 아는 자로 사는 것’이 가장 큰 고장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한 가치로 알고 대부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간사 대부분의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로부터 선조들은 이런 모습을 ‘성숙하지 못하다’라고 얘기하며 경계해왔습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삶을 사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만 아는 삶을 고집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과 관계도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장 밑바닥에 견고한 자아가 자리 잡고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큰 벽에 막히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뜻과 기분이 삶의 최고 가치가 된 존재는 ‘고장 난 존재’입니다. 오늘 보게 될 엘리야의 모습도 고장 난 존재이기에 오늘 우리는 엘리야의 그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주의 세미한 소리를 듣기를 바라며, 들으며 순종하여 현재 여러분이 처한 삶의 상황(호렙산)에서 회복되시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이세벨의 협박과 공갈을 피해 죽을 고생을 다 해 도망친 엘리야는 죽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빵과 물을 먹고, 기운을 내서 호렙산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 굴'(바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그곳)에 도착합니다. 지난주 낙심하고 침체 되어 있었던 모습의 엘리야가 오늘은 상한 마음이 회복 안 되고, 우울한 마음이 회복 안될 때 보이는 반응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가 이제껏 보아왔던 엘리야의 모습이 전혀 아닙니다. 이 엘리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브엘세바에 도착한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주신 빵과 물로 기력이 소생되어 또 40일을 걷고 또 걸어 호렙산(하나님의 산)에 도착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움직임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 스스로 임의대로 목적지를 정하고 움직인 것입니다. 엘리야가 도착한 곳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라는 명을 받은 곳,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곳,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백성임을 약속받은 곳 즉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갈멜산 승리 후 하나님께서 무서운 심판을 바로 내리셔서 이세벨을 중심으로 하는 바알 세력의 완전 제거를 꿈꿨던 엘리야에게 지금의 쫓기는 상황은 엘리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하나님께 아마 아합과 이세벨에게 당장 무서운 심판의 처벌을 주시라고 담판하는 마음으로 갔었을 수 있습니다.
9절의 굴(동굴)은 원문에는 ‘그 굴’로 ‘그’라고 하는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바로 그 굴은 모세가 금송아지 사건 후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했던 그 굴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모세의 얼굴도 영광의 빛으로 빛났던 바로 그 굴을 찾은 것입니다. 이곳에서 엘리야와 하나님 사이에 팽팽한 계시적인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대화는 하나님께서 물으시고 엘리야가 답하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레코드를 틀어 놓은 것처럼, 하나님의 질문이 두 번이 같고 엘리야의 두 번의 답도 똑같습니다. 동굴 안에서 첫 번째 대화가 이뤄졌습니다.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9-12)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의 요지는 ‘너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느냐?’입니다. 왜 이 동굴 속에서 이러고 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동굴 속에 있는 이 모습이 흡족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아직 아합과 이세벨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호렙산에 있으면 안 되고 그들 앞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싸움을 끝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있어야 할 곳에 반드시 있고, 있지 말아야 할 곳을 피해야 합니다. 위치 선정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피할 곳을 피하는 선택을 잘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우리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와 피해야 할 자리를 선택하고 행동한 책임은 자기 자신이 져야 합니다. 지금 있으신 곳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까? 하나님께서 너 여기 왜 있느냐? 물으시고 도전하실 때 반드시 제대로 답하시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엘리야는 분명 있어야 할 자리(아합과 이세벨 앞)를 이탈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질문에 당황했는지 동문서답식으로 답을 합니다. 엘리야의 답은 감정적이고 편향적입니다.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왕상19:10, 새번역) 질문에 걸맞지 않은 답입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나쁜 일(아합과 이세벨의 기가 꺾이지 않은 사실)만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 생각과 마음으로 꽉 차 있어서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질문에도 다소 엉뚱해 보이는 답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수년간을 승리해왔던 은혜를(3년간의 수배 생활에서도 잡히지 않은 것,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준 식량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은혜, 사르밧 과부에게 식량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속 채워주셔서 먹을 식량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 과부의 아들을 간절한 기도로 살려낸 것, 갈멜산 대결에서의 승리, 기손 시냇가에서의 바알 선지자 처단, 그리고 극한 가뭄을 끝내는 은혜의 비) 모두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엘리야는 혼자라고 하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오바댜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바댜가 살려준 하나님의 선지자가 100명이 있습니다. 또한, 갈멜산 사건 후 집단 회심으로 하나님이 유일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습니다.
지금 엘리야는 스스로 과장된 자기 연민에 빠져 있습니다. 삶 전체를 바라보고 파악하는 능력이 고장 나 있습니다. 도르테 죌뢰가 얘기한 ‘고장 난 존재’가 지금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고장 나서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기억 못 하는 삶은 위험한 삶입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고장 난 이유는 ‘너무 속상해서!’일 것입니다. 바알이 헛된 신인 것을 증명했는데도 여전히 기세등등한 이세벨 때문에 속상하고 감정이 격해 진 것 일 것입니다.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엘리야는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호렙산까지 죽을 힘을 다해 온 엘리야 자신을 좀 봐주셔서 하나님의 강한 능력으로 아합과 이세벨을 하나님께서 단번에 싹 쓸어 없애버려 주실 것을 기대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답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은 삼중의 부정을 하십니다.(11.12절) 바람과 지진과 불이 요란하게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
엘리야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은밀하게 속삭이는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셨습니다. 옆 사람도 전혀 들을 수 없는 세미한 소리, 이 소리는 내면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 바로 성령의 소리입니다. 엘리야는 이 세미한 소리가 들려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엘리야식의 해결이 아니었기에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임재를 나타내신 후 두 번째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장소만 동굴 안에서 동굴 밖으로 바꿨을 뿐입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굴 밖으로 나가라!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맘속의 실망으로 자기 연민에 빠져든 엘리야는 고집스러워집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 ‘고집스러움’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가라!’ 하시지만, 우리도 여전히 안 듣고 안 들으려 하고 안 움직입니다. 그토록 영성이 깊었던 엘리야가 이제는 세미한 소리에 반응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진 것입니다. 같은 질문을 두 번째 묻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엘리야는 같은 대답을 반복합니다. 자신의 상황 속에 푹 빠져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세 가지 일을 분부하셨습니다.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왕으로 삼고,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왕으로 삼고,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 후계자로 삼으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엘리야가 하사엘과 예후를 만나러 갔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완전한 불순종입니다. 이들에게 기름 부은 것은 후에 엘리사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사멜, 예후, 엘리사 이 세 명을 통해 아합과 이사벨을 심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 승리처럼 그들에게 심판이 임하기를 원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조용한 승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한 심판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기적을 바랍니다. 기적적 사건의 한방의 해결을 갈구합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큰 계획 속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그 문제에서 넘어졌습니다) 엘리야는 고장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기회를 잡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가와 위로해 주셨고 어루만지심으로 회복시켜 주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거절했습니다. 본인 방법을 고집한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모든 어려운 상황마다 하나님께서는 다가오시고 위로하시며 어루만져 주시고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고집을 꺾고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으려 하면 기회는 무의미하게 사라집니다. 큰 것 한방을 원했던 엘리야처럼 고집스러워지면 안 됩니다. 그 큰 영성의 소유자 엘리야조차도 신비한 기적의 급작스러운 변화 (신비한 한방)를 갈망했으니 일반성도인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이런 신앙의 행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지 못합니다. 호렙산 굴속에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실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독한 자기연민과 내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고집스러운 모습! 이 고집스러움이 꺾여 나가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바람, 지진, 불’로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내 내면을 향해 속삭이시는 세미한 소리를 들으십시오. 때로는 쓴소리로 때로는 용기 주심으로 내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거부하지 마시고 듣고 반응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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