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9.17. 주일 설교: 엘리야 11. 고도의 영적 침체(왕상19:1~8). 양은익 목사


말씀: 엘리야 11: 고도의 영적 침체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1-8)

오늘 제목은 ‘고도의 영적 침체’입니다. 지난주 말씀은 ‘고도의 영적 감응력’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보듯이 엘리야는 극심한 침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18장에서 보았던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당황할 정도입니다. 이런 침체한 엘리야의 모습은 일반 학문하는 사람에게도 유명합니다. 1974년 임상 심리학자인 프로이덴버거는 이런 심각한 탈진과 침체 상태를 ‘엘리야 증후군'(Burn-out syndrome: 탈진 증후군)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엘리야는 탈진해 버린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온 힘을 다하다가 기운이 완전히 쏙 빠져버린 것입니다. 팔 하나 들기 어려울 정도로 삶의 진액이 다 빠진 것입니다.

평생 이런 모습이 없다면 좋지만,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던 사람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목회하던 목사님들도 Burn out 되면 설교를 할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고, 말씀을 볼 수도 없게 됩니다. 책도 한 장을 넘길 수 없게 됩니다. 이 현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부에게 이것이 오면 설거지도 쳐다보기도 싫어지고, 남편도, 아이들도 다 귀찮아집니다. 본인이 처한 상황,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과 절망감이 탈진하게 하고 극심한 우울함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은 엘리야 선지자가 왜 이런 심한 ‘고도의 영적 침체’를 겪게 됐는지 살피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삶의 언저리에는 탈진과 침체와 그에 따르는 우울감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19장 본문에서 엘리야는 넘어졌습니다. 왜 넘어지고 무너졌습니까? 과거 BC9세기 경에 일어났던 당시의 사건으로만 보아 넘기지 마시고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보시고 오늘 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사람은 그냥은 무너지고 넘어지지 않습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보는 사건(엘리야의 무너짐 사건)은 2개의 적에 의해 일어납니다. 첫 번째 적은 외부의 적 이세벨입니다. 두 번째 적은 내부적 요인인 엘리야 자신입니다. 외적인 적과 내적인 적중에 어느 것이 더 강하고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쉽게 일률적으로 답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항상 무너짐은 극도로 힘들게 만드는 외부적인 사건에 의해 시작이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반복되는 고난의 상황이 몰려오면 본인이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감당해보려 하지만 결국은 탈진 됩니다.

퀴블러 로스는 이런 벅찬 사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5단계로 설명했습니다. 첫 단계:부정(인정하고 싶지 않고 믿을 수 없어 부정하며 재확인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 분노(닥친 상황에 분노하는 단계로 신앙인인 경우는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지금껏 해온 것을 내밀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 타협(하나님 이렇게 할 테니 좀 봐주십시오 하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 단계:우울, 다섯 번째 단계: 체념과 수용입니다. 이 모든 다섯 단계를 차례대로 경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과 사건 앞에 사람들은 흔들립니다.

엘리야의 흔들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의 공갈과 협박에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자세히 보겠습니다. 아합이 계속 당했습니다(1절). 아합은 남자의 자존심 다 버리고 이세벨에게 시시콜콜 다 얘기합니다. 마치 ‘나 이렇게 당했어’하는 식으로 곧이곧대로 다 일러바칩니다. 이세벨은 사신을 불러 ‘내일 당신을 죽일 테니 각오하고 있어라’ 하는 말을 엘리야에게 전하게 합니다. 정말로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예고가 필요했을까요? 자객을 시켜 소리소문없이 처단했을 것입니다. (당시 엘리야는 지켜주는 호위 무사 하나 없었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겉으로는 겁 먹은 것 같지 않지만 이세벨은 실은 겁먹고 있었습니다. 갈멜산 사건 이후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이 죽임을 당하는 심판을 당했고, 실제로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민심이 이세벨 마음대로 하던 예전 상황과는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그 선봉에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런 인물을 드러내놓고 죽인다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세벨이 쓴 방법이 공갈과 협박입니다. 이 방법은 실제로 꽤 효과적입니다.

2절의 이세벨의 경고는 실제로는 ‘떠나라’는 의미의 공갈과 협박입니다. 이 방법은 효과적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이 작전에 휘말린 것입니다. 엘리야는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의 말대로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도망친 곳은 북이스라엘의 이스르엘에서 남유다 끝인 브엘세바입니다. 지도로 보면 상당히 떨어져 있는 거리입니다. 브엘세바에 와서도 불안하여 종은 브엘세바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광야로 숨어들어 갑니다.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상당한 것을 이루어낸 유대인들이 몇 손가락 안에 꼽는 능력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런 그가 이세벨의 협박에 무너져 곧장 도망친 것입니다. 이제껏 엘리야가 보여줬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놀랍고 당황스럽기 조차합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식량으로 연명하며, 3년간을 도피 생활하며 외로움과 씨름하며 기도 생활했던 엘리야, 믿음과 쌓은 영성으로 갈멜산의 외로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엘리야, 여호와의 능력으로 마차보다 빨리 달려 이스르엘에 도착했던 엘리야(18장46절), 그런 활력이 넘쳐났던 엘리야였습니다.

여러분도 젊은 날 활력이 넘쳤었습니까? 젊은 날을 돌아보시고 지금 여러분의 모습과 엘리야의 힘 빠진 모습을 놓고 보면, 엘리야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오늘 보는 엘리야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며, 확대하면 나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친 엘리야의 모습이 짠하면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십니까? 엘리야도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홀로 그 많은 싸움을 하며 지치고 또 지친 것입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저도 늘 긴장을 놓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표정이 어두우면 함께 아파합니다. 여러분들도 가정에서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작은 가족 구성원에게 일어나는 하나하나의 사건에 긴장을 놓지 못하실 것 입니다. 우리도 이러한데, 엘리야가 느꼈던 영적 긴장감은 실로 엄청났을 것입니다. 갈멜산 전투에 임하면서 엘리야가 느꼈을 위험과 긴장감이 얼마나 컷었겠습니까? 엘리야의 승리 뒷면에는 기쁨과 아픔과 상처와 긴장의 연속에서 쌓이고 쌓인 것들이 실로 많았을 것입니다. 그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충분히 지쳐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흔들리고 처절히 흔들릴 수 있습니다. 주변에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마귀 얘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봅니다. 흔들릴 때 극적인 반전이 있어야 살아날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세벨의 공갈과 협박이라는 외부적 사건으로 엘리야가 무너지는 사건을 오늘 보고 있습니다. 외부 사건에 잘 대응해서 무너지지 않고 잘 맞서서 싸우면 좋겠지만 너무 지쳐있는 상황에서는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극도로 지치면 외부사건에 의해 무너지기가 쉽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쉼과 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3년간의 시냇가에서 혼신의 기도 생활과 갈멜산 대결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엘리야는 극도의 피로 상태에 있었고, 이로 인해 이세벨의 공갈과 협박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지칠 때 나타나는 공통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시선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사라지고 자신의 비통한 상황만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믿음 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며 삶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삶의 난제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치고 지쳐 ‘하나님의 시선’ 을 놓치면 하나님은 사라집니다. 내 주변의 모든 상황만이 나를 압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결정적인 실수도 이세벨의 협박의 순간 하나님께 향한 ‘영적 시선’을 잃어버린 데에 있습니다. 그 순간부터 말씀도 없어지고 기도도 없어지고 자기의 뜻과 자신에 대한 연민에만 충실해집니다. 영적 시선을 잃은 자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기 뜻과 자신에 대한 연민만 남습니다. 누구의 충고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장벽이 생기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브엘세바까지 간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제껏 엘리야는 자기 뜻대로 움직인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움직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영적 시선을 잃어버리자 하나님 말씀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4절 로뎀 나무 아래서 ‘넉넉하오니(이 말은 지긋지긋 하다는 말입니다) 내 생명을 가져가십시오’합니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것입니다. 정말 가슴 아픈 얘기입니다.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된 헛수고 같다는 말입니다. 자기연민에 빠진 것입니다. 갈멜산 전투도 이기고, 비도 오고, 엘리야는 분명, 아합과 이세벨이 고분고분해질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갈멜산 심판과 은혜의 비를 보고 나서도 기고만장한 그들을 보며 ‘내가 해 놓은 것이 별로 없구나’ 하며 기력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기 연민에 빠진 것입니다.

엘리야는 분명 위대한 사람임이 분명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 사람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극도의 피로 상태에서 닥치자 지치고 힘이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그만 데려가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지치고 지쳐 죽고 싶다는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 오늘 잘 보시고 주위의 영적 침체에 빠진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오늘 잘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과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 얘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탈진과 침체함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은 ‘사람과 하나님’ 모두와 소통이 막히고 중단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어떠한 얘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모든 소리가 견고한 벽에 부딪혀 다 튕겨 나가 버립니다. Burn out 되어 기도원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못 하게 돼버린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조언도 충고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혼자만의 방에 갇힌 자폐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소통은 사랑의 몸짓으로 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회복 방법의 첫째 단계인 ‘어루만져주심’입니다

하나님의 회복 계획은 다섯 가지 입니다. 하나하나 민감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로뎀’의 뜻은 ‘시궁창’ 입니다. 가장 비참한 상태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엘리야는 지쳐서 로뎀 나무 아래서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5개의 계획을 살펴보겠습니다.

1. 어루만져 주심(5,7절)
어루만져주심은 너무나 감사한 단어입니다. 어루만져줌은 미움과 화난 감정을 갖고서는 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따뜻함, 위로, 배려, 인내가 내재하여 있는 표현 방법입니다. 말보다 더 강력한 표현 방법입니다. 격려하고 품어 주는 것입니다. 이심전심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지치고 탈진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절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어루만져주심으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2. 갓구운 빵과 물을 주심(6,7절)
인간은 영과 육을 분리할 수 없기에 지쳤을 때는 영양 공급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지친 분을 일으켜 세울 때 사랑의 몸짓과 더불어 맛있는 것을 사주시기 바랍니다.

3. 말씀을 주심(세미한 소리: 12절)
말씀으로 힘을 주십니다

4. 새로운 사명을 주심(15,16절)
탈진한 자들은 꿈을 잃어버립니다. 해야 할 일을 주십니다. ‘혼자 지긋지긋해 하면서 죽어가지 말아라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십니다.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며,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 후계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5. 칠천 명의 동료를 주심(18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혼자 남은 줄 알고 무너진 엘리야에게 7000명이 있다고 격려하십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이 말씀은 시대가 변해도 진리입니다. 우리도 언제든 지쳐서 침체가 올 수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침체에 빠져 고통받는 가족과 이웃과 교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되어 어루만져 주십시오. 작은 정성과 감동으로 사람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먹고 일어나라!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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