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9.10. 주일 설교: 엘리야 10. 고도의 영적 감응력(왕상 18:41~46). 양은익 목사

 

말씀: 엘리야 10.  고도의 영적 감응력(왕상18:41~46)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18:41-46)

교회 공사로 분주하고 어수선했던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엘리야 선지자 10번째 말씀을 보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시작하기 전 30대 미국의 젊은 변호사인 몰리 메닝의 유명한 책 [전쟁터로 간 책들]에서 한 대목 읽고 가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노르망디 전투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이등병이 말했다. 고작 8m 떨어진 곳에서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상황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신 그는 ‘운명에 자신을 맡기고’ 책장을 넘기면서 주변 환경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책에 빠진 그는 차분하게 그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오마하 해변을 뚫고 나아간 군인들은 심한 부상당한 전우들이 절벽 아래쪽에 몸을 기대고 책을 읽던 광경을 결코 잊지 못했다’

전쟁의 한 복판에서 심한 부상을 당한 병사들, 포탄이 자신의 머리 위를 날아 바로 앞에 떨어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들 손에는 책이 쥐어져 있었고, 그들은 책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삶의 마지막 순간에 찾으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노르망디 치열한 전투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 당시 병사들이 가장 받고 싶었던 보급품이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상륙작전을 앞두고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그들의 소지품을 하나둘 버리기 시작할 때, 마지막까지 배낭 속에 간직한 것이 ‘책’이었습니다.

왜 이 젊은 병사들은 마지막까지 책을 버리지 않았던 걸까요? 책이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실제로 노르망디 작전에서 선봉에 섰던 병사들은 대부분 전사했습니다) 책으로나마 인생의 의미를 악착같이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느낀 것은 그때의 전투처럼 모든 상황이 안 좋은 이때, 병사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자 몸부림던치던 그 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여러분, 삶의 비상시(非常時)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봐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잡으려고 하는 긴박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없이 그냥 사는 대로 산다면, 우리는 실패합니다. 미래가 확실치 않을 때는 삶을 보는 깊은 안목(복안, 심안, 영안)이 필요합니다.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마음으로, 영으로 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어려운 시대를 살아 갈 때는 이런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교제하는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노르망디 작전 때의 병사들처럼 긴장감을 놓지 않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 필요합니다.

오늘 엘리야 10번째 시간입니다. 엘리야도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도전도 받으시고, 또한 신앙적인 성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엘리야의 모습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에게는 고도의(높은) 영적인 감응력(반응력)과 감화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바알 신앙으로 타락한 불신의 시대에 그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적 감응력’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소리를 ‘알아듣고, 반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반응할 줄 아는 사람과 대화가 통합니다. 영적 생활에서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엘리야는 이것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유한자가 창조주이신 무한자와 대화한다는 거룩하고 신비하고 성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월자이시지만, 당신을 찾는 이에게 영적인 감응력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피조물에 굉장히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 경지에 들어가야 신앙의 삶에 기쁨과 평안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인들은 알 수 없는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반응할 줄 아는 삶의 자세(반응력)가 있게 될 때 나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반응력이 없으면 나는 하나님과 분리된 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영적 감응력이 있을 때 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바른 성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응 못 하면 순종도 없습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종교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게 유리한 상황에서만 잠깐씩 반응하는 바알 신앙을 따르는 교회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감응력’은 아주 강력해야 하며 늘 생생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이것이 아주 충만했습니다. 오늘은 이점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41절에는 아합에게 명령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비 소리가 있나이다'(왕상18:41) 완전한 전세의 역전입니다. 죽이려던 자, 죽일 수 있었던 자가, 이제는 죽을 수 없는 자,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됐습니다.

지금 41절의 장소는 기손 시냇가입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을 칼로 찌르고 베어 살육한 장소입니다. 갈멜산 대결에서 승리 후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를 처단하러 기손 시냇가로 내려갈 때 아합왕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아합왕이 처단 현장에 대한 호기심으로 살육 현장에 구경하러 갔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기손 시냇가에서 아합왕은 얼마나 심한 무력감과 죽음의 두려움을 느꼈을까요? 그런 아합왕에게 지금 엘리야는 갈멜산으로 올라가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먹고 마실 상황은 아닙니다. 마치 조롱하는 것처럼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는 놀랄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고 먹고 마시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백성들은 갈멜산 대결 승리 후 집단 회심으로 이미 여호와에게 돌아와 있습니다. 남은 과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아직 응답해 주시지 않은 ‘기근’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기근이 곧 끝날 것이니 안심하고 먹고 마시라 합니다. 엘리야의 귀에는 큰비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비가 올 조짐이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 영어 성경 표현을 보십시오 ‘a sound of abundance of rain’ 엘리야에게는 풍성한 비의 사운드가 화음처럼 들리고 있습니다. 엘리야에게만 들리는 비의 소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감응력입니다. 영적 감응력은 하나님의 소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받아내는 능력입니다.

이 영적 감응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자에게 옵니다. 남편이 못 듣는데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못 듣는데 남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못 듣는데 아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유물론적 인간 이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헛된 소리, 허황한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소리를 듣는 훈련과 추구가 계속 있게 되면 하나님의 소리를 끊임없이 들을 수 있다는 증언이 성경에는 계속 나옵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민감하게 듣고 반응하는 영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애들이 잘되게 하려고 안타깝게 많은 신호를 애들에게 보냅니다. 그러나 아이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신호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우리 마음 문을 두들기시며 신호를 보내십니다. 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3절에 보면 엘리야의 사환, 몸종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 사환은 엘리야가 살려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게 맞는다면 기도로 살려낸 후에 엘리야가 계속 데리고 다닌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야는 비 내리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사환에게 산꼭대기에서 비가 오는지 계속 살피게 합니다. 여섯 번을 오르내리며 ‘아무것도 없나이다’ 외치던 사환이 일곱 번째(일곱은 성경의 완전수입니다) 이르러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보인다고 외칩니다. 우리의 맨눈으로 어떻게 사람의 손만 한 구름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영적인 눈으로 보인 것일 겁니다. 이 사환도 엘리야를 따르며 영안이 열렸던 것 같습니다. (민감한 영적 감응력) 이 보고를 듣고 엘리야는 어떤 확인하려는 질문도 추궁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환에게 아합왕께로 달려가서 비가 쏟아져서 내려오는 길이 막히기 전에 빨리 산 정상에서 내려오도록 전하라고 시킵니다.

‘영적 감응력’이 삶에 주는 영향력은 실로 막강합니다. 영적인 감응력이 내 안에서 세밀해지고 정교해지고 커지면 하나님에 대한 느낌과 반응도 달라질뿐더러 살아가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이웃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영적 감응력이 깊을수록 매사에 더 신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내 정신에, 내 양심에 계속 들리게 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더욱 진실하고 신실할 것입니다.

영적 감응력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애써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엘리야는 힘들고 외롭고 고독했던 그 많은 시간을 무릎 꿇고 기도하며 말씀을 보고 듣는 훈련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고도의 영적 감응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18:42) 이 42절의 기도 모습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엘리야는 기근을 주시라고 기도하여 가뭄이 시작되었고(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약5:17~18) 또한 이 기근을 끝내달라고 다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작도 기도요 끝도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나의 기도를 통해 일어나기에 기도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늦어지거나 사라질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기도 생활을 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행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부탁드립니다. 기도의 의미와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꼭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가 없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왕상18:1) 하나님께서는 1절 말씀에 이미 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비가 안 오고 있고 언제 비가 내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엘리야는 비 내림을 위해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 기도합니다. 42절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18:42) 대충대충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을 품고 간절하고 치열하게 드리는 기도입니다.

무릎 꿇고 (복종하는 자세입니다), 머리를 숙이고(겸손한 태도를 나타냅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이 자세는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도 따라 하기 어려운 자세입니다. 다른 것은 일절 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온전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기도는 오랜 시간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엘리야는 평상시에도 이런 자세와 모습으로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런 감각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바알 신앙이 전성기에 달한 가장 악한 시대에 들어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적 감응력’을 꼭 받아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악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엘리야 시대처럼 엘리야와 같은 고도의 영적 감응력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43절에서 사환은 ‘아무것도 없나이다’(There is nothing)합니다. 영적인 감응력이 없으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쉽게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하나님께서는 없음에서 있음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안이 하나님의 은혜로 열리면 우리는 없음에서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없음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 아무것도 없습니다’ 외치는 우리에게 ‘손바닥만 한 구름’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몰려오는 은혜의 빗소리를 듣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18:46)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여러분에게 임하셔서 고도의 ‘영적 감응력’을 가지고 힘차게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 드립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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