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9.3. 주일 설교: 엘리야 9. 과격한 단절(왕상 18:40). 양은익 목사


말씀: 엘리야9.과격한 단절(왕상18: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왕상18:40)

오늘은 9월의 첫 주입니다. 좋은 계절이 주는 선물을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9월 1일 친구 목사님이 시 한 편을 보내줬습니다. 선물로 받았으니 저 또한 선물로 드립니다. ‘날개는 지쳐도 하늘을 보면 다시 날고 싶습니다. 생각을 품으면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다지면 용기가 생기겠지요.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라는 길,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끝까지 걷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낮아지는 만큼 깊어지는 9월, 한층 겸허한 모습으로, 내 아름다운 삶이여! 훗날 알알이 탐스러운 기쁨의 열매로 오십시오’(이채, 9월에 꿈꾸는 사랑) 우리도 생각을 품으면서 용기를 가지고 9월 한 달 살아 가십시다.

오늘 본문은 40절 한 구절입니다. 갈멜산 대결의 엄청난 승리 직후에 일어난 한 사건을 스쳐 지나가듯 간단히 보여주고 있는 장면인데 아마 상당히 곤란하고, 당혹스러운 장면이기 때문에 그런 거 같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리야가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집단으로 학살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고, 잔인하고 잔혹합니다. 승자에게는 승자로서의 아량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것도 없이 지체하지 않고 처단해 버린 것입니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장소는 기손 시냇가입니다. 아마 바알 선지자들은 묶인 채로 갈멜산에서 기손 시냇가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집행 도구는 칼입니다. 450명 전부를 칼로 찌른 후 베어서 죽였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엘리야 혼자서 450명을 죽인 것이 아니고, 엘리야의 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단 학살을 시행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칼을 받는 자들이나 칼로 찌르고 베는 자들이나 모두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집단 학살 시행 후 아마 상당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갖고 살았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토록 잔인하고 잔혹한 사람입니까? 그는 광야 사람이기에 야성적인 면은 있지만 잔인한 사람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깊이 기도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절대 잔인하거나 잔혹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깊은 외로움도 느껴 봤던 사람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도 진정으로 온 힘을 다해 기도하여 살려냈던 사람입니다. 오늘 집단 처형을 시행하는 모습은 엘리야의 성품이나 성정 탓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 본문은 기독교를 공격하는 불신자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말씀 중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18장 4절과 13절을 보면 아합왕이 집권하면서 왕비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색출하여 죽인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바댜가 여호와 선지자 100명을 숨기고 살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당시 얼마나 많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죽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북이스라엘에 활동하던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수천에 달했을 것을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죽은 바알의 선지자의 죽은 숫자보다 상당히 많은 수가 죽었을 것은 확실합니다. 또한, 이 색출과 죽임의 명을 받아 앞장선 것은 이 바알 선지자들인 걸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바알 선지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에 대해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동형 보복법(율법에 따른 실행)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르던 법은 율법입니다. 사회의 혼란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이 율법입니다. 이 율법에 동형보복법이 있습니다. 출21:23~25입니다.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 법은 과잉 보복으로 생기는 사회의 혼란을 막고자 생긴 법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한쪽 눈을 다친 사람이 복수한다고 가해자의 팔이나 다리를 함께 부러뜨리거나 살인하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당한 그만큼만 보복하라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의 사회 질서 유지에 중요했던 법입니다.

오늘의 집단 살육을 동형 보복법의 개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세벨의 엄청난 학살과 만행으로 450명의 10배~20배 넘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죽었기에 엘리야는 율법에 따라 보복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보편 윤리의 관점에서 부담스러운 집단 살육의 사건을 율법적 개념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더 잘 봐야 합니다. 이 사건을 놓고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엄청난 반감을 갖고 입에 거품을 물고 기독교를 공격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확실한 견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에 대한 관점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은 불신자들도 거부감이 크지만, 믿는 우리도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계속되며, 앞으로도 계속 있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하시고 긍휼이 많으시며, 인자하시며 사랑이 풍성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한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이 정의로움, 공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그대로 수용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타락하여, 죄악에 빠지고 하나님 이외의 것을 우선으로 하는 우상숭배(현대식 바알 신앙)에 빠져 사는 것을 하나님은 그냥 오냐 오냐 하시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대충대충 살면서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 편이니까 좀 봐주시겠기 하는 안이한 생각 속에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공의의 하나님은 불의에 대해 심판하실 것임을 계속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C.S Lewis는 공의로우신 분으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유순하신 분은 아니다.’

하나님 그분에게는 ‘위협적’인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분의 위협은 언제 나타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인 우리가 타락하고, 죄 가운데 빠지고, 우상 숭배에 빠질 때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굉장히 위협적인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12:29) 하나님은 온 우주를 불로 소멸시키시는 심판을 하시는 분입니다.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왜 소멸시키는 불로 심판하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속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는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심판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이 공의로움의 속성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의롭기 위해 진실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공의롭지 못하면 남는 것은 심판입니다. 온갖 죄를 짓고 사는 나쁜 인간들이 세상을 활개 치고 잘 살며, 죽은 후에도 벌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만 운운하며 내버려 둔다면 이 우주와 인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창세기 3장에서 인류는 최초로 죄를 짓게 됩니다. 공중 권세 자인 사탄(뱀)의 유혹에 빠져 타락합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며 죽음을 경험해야 하며 땀 흘리고 노동하는 수고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로지 불편만 합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열심과 공의로움과 구원의 열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본받아 의롭게 사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을 통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심판 중에 있을 때 소망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지금 뼈저린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계십니까? 잠깐입니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깊이 각인 되어 들어 옵니다. 우리는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부족한 인간들에게 심판은 있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을 죽인 엘리야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리자로 엘리야는 심판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일관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정함과 일관성입니다. 심판의 유형은 아주 다양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정확하고 일관성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에게만 심판을 내리는 편협한 의미의 종족의 신이 아닙니다. 자기편이라고 봐주고 배제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일관성 있는 원칙으로 심판하십니다. 바알신을 따르는 불신자들도 심판하시며, 당신의 백성도 타락하고 부패하며, 불의를 저지르면 봐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수많은 심판을 봐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들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수많은 선지자들이 (이사야, 에스겔, 호세야, 미가, 예레미아..) 심판을 경고했으며 돌이키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며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며 짓밟히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도덕적인 죄, 윤리적인 죄, 쾌락을 좇는 죄, 우상숭배 죄…. 수많은 죄악이 경고받았으며, 돌이키지 못하자 엄청난 심판이 도래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잔혹함과 동시에 심판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처절한 구원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3. 과격한 단절(끊어 버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는 ‘은혜의 비’를 만나는 감격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생명수가 우리에게서 넘쳐나는 은혜를 누리려면 우리는 과감하고 과격한 과거의 나와의 단절(끊어버림)이 필요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지난주 ‘여호와의 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은혜의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에 오늘 말씀이 있습니다. 타락과 죄와 우상숭배에 대한 과격한 단절(단호한 끊어버림)이 있어야 ‘은혜의 비’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죄 된 옛사람의 모습을 끊어버리고 ‘거룩’을 입어야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구원함을 받아 신앙의 삶을 살아도 이 끊어냄의 중간 단계를 하지 못하면, 신앙은 전진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닙니다. 그러나 그 중 얼마의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꿨습니까? 우리의 죄성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견고하며 대단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싸움은 머리로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는 시간의 싸움도 아닙니다. 내 삶으로 내 온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싸움, 순종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때의 옛사람의 모습을 끊어내야 합니다. 이 중간 단계인 끊어냄이 없으면 교회 생활은 정말 재미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때문에 이 ‘과격한 단절’이 누구에게나 너무나 어렵습니다. 평생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끊어야 할 것은 끊고, 거룩한 삶을 매일 매일의 삶에서 순종함으로 살아내야, 우리에게 약속된 은혜의 비가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을 끊었다’는 증표가 각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즉 ‘단절의 증거’를 모두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전도할 당시에 에베소에는 마술이 성행했습니다.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점쟁이들은 과감히 점 보는 모든 책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들에게 그토록 소중한 책이었지만 과감히 단절해 버린 것입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행19:19)

우리 모두는 단절의 증거들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내 삶 중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습을 끊고 그 증거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바알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끊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바알에게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엘리야 선지자가 보여준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보면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삶은 정말 만만치 않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꽉 붙드시고 주님의 은혜로 종말의 심판까지 이기시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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