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27.주일 설교: 엘리야8. 여호와의 불에서 보는 희망(왕상18:22~39). 양은익 목사


말씀: 엘리야8, 여호와의 불에서 보는 희망(왕상18:22~39)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왕상18:22-39)

예전에는 잘 듣지 못했던 단어이지만, 요즘 자주 듣게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혐오’입니다. 사회적으로 유행하여 시선을 끄는 단어입니다. 혐오가 주는 병폐는 아주 심각하므로 걱정스러운 사회 현상 중 하나입니다. 혐오와 동반되는 정서적 현상은 심한 언어의 파괴와 비난, 저주 등이며, 이는 실로 걱정스러운 수준입니다. 혐오의 사전적 정의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입니다. 어떤 대상을 혐오하면 그 대상을 미워하게 되고 극도로 싫어하게 됩니다. 싫어하는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까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혐오하는 대상이 없기를 바랍니다.

혐오가 무서운 것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는 성향으로 내면화되어 반사적인 반응이 나오게 되는 데 있습니다. 혐오하는 상대의 말과 행동 모든 것을 무조건 배척하고 미워하며 저주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과거 유럽에서는 대표적인 혐오의 대상이 집시들이었습니다. 그 혐오감은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와 집시들은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분노와 혐오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세밀히 따지면 분노에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사회적 분노’라는 것은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내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의 정당성은 갖고 있습니다. 즉 늘 나쁜 것 만은 아니고, 때론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해도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분노가 많은 사회는 결국 혐오가 많은 사회로 진행합니다. 이 혐오는 사적이며 개인적 영역의 감정으로 이성적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혐오 상대에 대해 비이성적 부정적 감정을 쏟아붓게 됩니다. 혐오하는 사람, 혐오를 당하는 사람 모두 힘든 병든 사회가 됩니다.

한국 사회에는 정치적 혐오가 상당히 큽니다. 조건 없는 혐오감입니다. 또한, 여성 혐오가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인데 전 세계적으로 점점 많아지고 문제화되고 있습니다. 지역적 혐오라는 것도 전 세계적으로 문제 되는 혐오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종류의 개인적 혐오 등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 혐오 즉 우리 신앙인들과 교회에 대한 혐오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혐오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신앙의 불일치로 인한 세상 사람들의 실망감도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잘해도 무조건 혐오하는 영적 수준의 혐오도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혐오는 세 번째 단계인 증오로 발전합니다.
(분노->혐오->증오)

교회와 교인을 혐오하는 시대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상당한 고민을 하며, 내 실제의 삶과 신앙생활이 일치하도록 온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대충대충 신앙생활 하게 되면 비신앙인들의 눈에는 우리가 위선자로 보이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혐오감은 나로 인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말 한마디를 하거나, 행동 하나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의식을 갖고 올 곳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교회 혐오 시대를 사는 우리는 희망의 끈을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야시대, 아합시대는 하나님에 대한 혐오가 짙게 깔려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여호와 신앙에 혐오감을 갖고 잘살게 해주고 풍요롭게 해준다는 풍요의 신인 바알을 최고의 신으로 여기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배척했고, 기근을 선포하고 숨어 도망 다니는 엘리야는 혐오 대상이었습니다. 지금과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엘리야는 혐오하는 무수한 대상자들을 극적으로 집단적 회심을 일으키는 큰 사건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런 엘리야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서 도전을 받고자 합니다.

지난주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이냐? 하나님이냐? 택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버릴수 없는 미련으로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21) 그랬던 백성들이 오늘 보여준 변화를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 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 시로다 하니’(왕상18:39) 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의 사건입니까? 이 일을 엘리야가 오늘 해냅니다.

한 개인의 신앙 고백을 끌어내기도 어려운데, 엘리야는 집단적 회심을 끌어냅니다. 대중들이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고 고백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장소는 권력자 아합과 이세벨이 모두 있는 자리입니다. 이 일을 오로지 엘리야 혼자서 했습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왕상18:22)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도 엘리야를 대단하게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힘의 논리를 절대적 불문율로 여깁니다. 많아야 힘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가족이 불신자라도 제대로 믿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그 가족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only one으로 모든 상황을 뒤엎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오늘 엘리야는 보여줍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온 이스라엘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모아달라고 했습니다. 족히 수 만명 이상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인 모든 사람과 엘리야는 혼자서 대치하는 상황입니다. 잡으면 죽이려 했던 엘리야를 보는 시선들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째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회만 잡으면 으르렁거리며 죽이려 하는 무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전혀 주눅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당당히 외칩니다. 바알과 하나님 중 하나만 택하라고 외칩니다.(21절) 보통 자신감으로는 불가능한 모습입니다.

더군나 대결 장소는 바알신이 거주한다고 하는 바알의 성지인 갈멜산 입니다. 엘리야가 제시한 대결방법도 바알에게 최고로 유리한 조건입니다. 비의 신, 번개의 신인 바알의 주특기인 ‘불내림’ 대결 방법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하라고 우선권을 주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불내림이 일어나기 힘들게 제단에 물을 세 차례나 쏟아붓는 장면입니다. 엘리야는 혈혈단신인데 전혀 기가 꺾이지 않고 당당하게 완전한 자신감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야단법석을 해도 불이 내리지 않자 조롱까지 합니다.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왕상18:27)

이렇게 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혐오하던 말던, 위협을 하든 말든, 기죽지 않고 정말 당당하게 할 말, 할 행동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 엘리야의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깊은 확신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확신 앞에선 상대가 몇천이든 몇만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번영과 풍요의 신 바알이 가짜이며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고 그들의 삶을 망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확신은 엘리야의 신앙 체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람은 빵(먹고 사는 문제) 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깨달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였다’(마4:4, 새번역)

지금도 바알 신앙은 계속됩니다. ‘삶은 빵이다’ 수 없이 세뇌합니다. 자본주의도 자본을 최고의 가치로 삼기 때문에 바알로 빠질 수 있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빵을 얻기 위해 온종일 울고 웃으며 뛰고 또 뜁니다. 가진 자, 가지지 못한 자 모두 만족하지 못하며 그 삶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영혼이 피폐해져 갑니다. 지금 이 시대도 바알로 인해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원전 9세기 북이스라엘의 바 알 신앙에 취해 있었던 백성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놀라울 뿐입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18:39)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우리 인류에게 주신 귀한 최고의 말씀이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4:4, 새번역)입니다. 이 말씀을 잘 받으십시오. 사람은 빵으로 만족해서 사는 물질적 존재가 아니고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도 교회는 바알신앙으로 넘쳐납니다. 물질의 축복을 얘기하고 물질 축복에 안수하는 목회자는 환영받습니다.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안수와 축복을 실제로 믿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여러분, 하나님 편에 서신 여러분. 구원의 은혜에 더 당당하시고 자신감 있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엄마 치마폭에 숨듯 하나님 뒤에 숨기를 언제까지 하시렵니까? 숨어 있으면 ‘불’은 내리지 않습니다. 엘리야처럼 대중 앞에서 당당해야 ‘불’이 내립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내 신앙을 나타내야 불이 내립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왕상18:38) 이 불은 혐오하는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선 엘리야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린 불을 번갯불로 상상하지만, 그 불이 어떤 불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호와의 불내림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가 섬기는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임재의 강력하신 sign이 ‘불’로 임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불’로 등장하십니다.(임재) 3년의 기근과 그 힘든 고생 끝에도 변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지만 강력한 하나님 임재의 sign으로 드디어 그들은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18:39)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우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아 내려면 우리부터 확신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여호와의 불을 보아야 합니다. 이 경험이 우리를 자신 있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봐야 불은 다른 게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불입니다
1.십자가의 불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시며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과 희생과 섬김과 정의와 공의를 보아야 합니다. 이 십자가 진리의 불이 내 안에 깨달아지고 고백 돼야 합니다

2. 부활의 불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현재 고난에서 부활의 생명의 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삶이 있음을 늘 하루도 놓치지 마십시오.

3. 성령의 불
성령의 은사와 열매(사랑과 희락과 온유…)로 혐오로 사는 사람들을 품어줘야 합니다. 성령의 불을 받으십시오.

여호와의 불을 받아 뜨겁게 타오르며 당당하게 사십시오. 혐오로 사는 그들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모두 여호와의 불을 받아 이 시대의 엘리야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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