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20. 주일 설교: 엘리야 7. 바알말고 하나님(왕상18:16~21). 양은익 목사


말씀: 엘리야 7. 바알말고 하나님(왕상18:16~21)

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때까지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16-21)

오늘은 엘리야 선지자에 대한 말씀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제목은 ‘바알 말고 하나님’입니다. 제목을 보고 아시겠지만, 오늘은 ‘선택’의 문제에 대해 함께 보고자 합니다. 선택의 문제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선택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특히 신앙적인 삶에서 선택의 문제는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 가능성 중에서 가장 적합해 보이는 것 하나를 택하는 것이 선택입니다. 선택은 어느 순간에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들이 누적되어 나의 삶은 만들어지고 형성됩니다. 무심코 하는 나의 선택이 나의 모든 것을 만드는 동기요 출발입니다. 그래서 선택은 중요합니다.

삶은 선택의 누적입니다. 내가 택한 순간의 선택들이 쌓여 나의 삶이 만들어져 갑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도도 선택입니다. 아주 중요한 선택 중 하나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힘들지만, 기도를 선택한 사람은 기도가 하루하루 쌓여갑니다. 힘든 순간에도 기도하려고 애쓸 때 그 시간이 모여 기도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기도의 사람은 기도의 신비와 은총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일부러는 아니라도 기도를 하지 않는 성도는 이런 기도의 신비와 은총을 경험 못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과 미움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힘들어도, 비록 미워도 어떻게든 사랑하고자 하는 선택을 하면 나의 삶은 사랑을 하는 삶, 사랑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미움을 선택하면 나도 미워하지만 내 삶 또한 미움을 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하는 시점에서 어떤 선택을 하던 처음에는 별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항상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하고,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한 길은 인적이 드물고 험해 보입니다. 또 한길은 발자국도 많고 넓고 편해 보입니다. 어떤 길을 걷겠습니까? 두 길을 동시에 갈 수는 없습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 없습니다. 햄릿은 유명한 독백을 남겼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삶과 죽음도 동시에 택할 수는 없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으므로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두려워지고 선택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것 중 선택을 해야 할 때, 선택의 이유와 근거를 모를 때, 우리는 더욱 망설이게 되고 헷갈리게 됩니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선택의 이유와 근거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선택의 기준과 근거가 없는 경우 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눈물 흘릴 수 있게 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을 때, 절대적 기준과 근거가 없어지게 되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으면 선택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파도치는 대로 흔들리는 배처럼 흔들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선택을 잘하려면 반드시 선택하는 ‘기준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준점은 알파와 오메가(시작과 끝)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모든 선택의 순간이 올 때 그 기준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바로 우리의 기준점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선택의 가장 앞에 ‘하나님을 내 삶의 기준점으로 하겠습니다’하는 선택을 가장 먼저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며 고생한 것도 하나님을 기준점으로 삼지 않은 것에 대한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한순간도 우리의 삶에서 떠나서는 안 되는 우리의 기준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세상의 판단과 기회, 처세술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전하며 동시에 이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

오늘 21절 말씀의 배경을 먼저 보겠습니다. 3년의 기근이 지나고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나고, 아합왕이 이스라엘을 기근의 위험과 고난에 빠뜨린 자가 엘리야라고 하자(17절), 엘리야는 당당하게 그 죄는 아합왕과 아합왕 아버지 오므리의 죄라고 하며(18절) 갈멜산 대결을 제안합니다. 이스라엘을 어려움에 빠뜨린 자가 누구인지 공개적으로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의 선지자와 바알신의 성지인 갈멜산에서 홀로 대결하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라 생각했는지, 아합왕은 수락했고 모두 갈멜산에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본문 21절 도전을 한 것입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21)

도전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듯 그들은 침묵합니다.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알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 당시는 신들마다 잘하는 주특기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믿지만 비와 바람의 신으로 그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신인 바알을 그들은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혼합종교 의식이 당시에 아합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연해 있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은 더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왕상18:17 공동번역)

풍요와 비의 신인 바알이 3년간의 기근 동안 아무것도 못 해 준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알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엘리야는 한쪽은 바알 (세상), 한쪽은 하나님께 양다리 걸친 것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숲속 두 갈래 길처럼 두 길은 모두 선택해서 갈 수 없습니다. 양다리의 운명은 결국은 다리가 찢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가 주는 도전은 지금 우리에게도 주는 도전입니다. 한국 교회도 혼합 종교 사상이 들어와 있습니다. 적당하게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한 길만 고집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양다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신앙과 종교를 사회현상으로 분석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분석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점에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그들의 분석을 보겠습니다. ‘왜 교회에 나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잘 알고 잘 믿어서?’ 그들은 결론을 냅니다. 신앙을 갖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라 합니다. 염려할 것 천지인 이 세상을 살기에 너무나 불안한 사람들이 그 해결책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불안이 없어지고, 생활이 안정되면 신앙생활은 간절함이 없어지고 소원해진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교회가 부흥되었고, 경제적 안정 시기에는 신앙적 열심이 적어졌다고 하는데, 실제로 통계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유명한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이 초월의 부재라고 말하지만, 세계가치조사는 오히려 빵과 물, 적당한 의약품과 일자리를 그렇게 여기며, 바로 그런 것들이 사람들을 종교로 이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피터 버거,무신론자의 시대,피터 왓슨,38)

우리가 믿는 신앙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안의 해소와 부와 안정, 풍요 때문이라고 신랄하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근거를 제공한 통계자료가 나온 이유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바알 중에서 선택해야 할 때, 바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택하라고 할 때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침묵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부(풍요)를 준다는 헛된 약속을 계속하며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회학자들 눈에는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언제부터 불안 해소의 수단이 되었습니까? 부와 풍요와 건강, 안녕을 추구하는 수단이 아니면 하나님은 필요 없는 것입니까? 목표로 둔갑한 이것들은 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작은 단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잘 돌아봐야 합니다.

‘바알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이 선택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이 시인의 고백처럼 내가 직접 하나님의 선하심과 온전하심을 맛보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바알을 따라가지 않게 됩니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목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마에당근껍질을까는여인과곁에선아이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까? 소박한 그림 한 장 보겠습니다. 이 그림에 답이 있습니다. 니콜라스 마에의 1655년 작품인 ‘당근 껍질 까는 여인과 곁에선 아이’입니다. 이 작품이 유명해진 이유는 아이의 눈빛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강렬하여 레이저빔이 나올 거 같은 눈빛입니다. 당근 껍질 까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 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눈빛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평범하고 사소해 보이는 것 속에서조차 뭔가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비범한 눈빛입니다. 우리의 삶은 일상생활은 실로 평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 아이의 눈빛으로 우리는 얼마나 살았습니까?

매 순간 우리는 이 비상한 눈빛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소한 평상의 일속에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그 삶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은 내 삶 속에 더욱더 깊이 들어 오십니다.

그렇게 깊이 나와 함께 하시게 된 하나님을 내가 조금 힘들고 아프고 고난 중에 있다고 나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고난과 눈물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평안한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나는 온전한 신앙인의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신비와 비밀을 하나님을 환상으로 치부하는 사회학자들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24:15) 바알과 하나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 안 됩니다. 양다리 걸친 안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십니까? 오늘 선택하라는 엘리야 선지자의 도전을 깊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시고 변화되고 담대한 신앙인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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