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6. 주일 설교: 엘리야 5. 그 사람, 아합(왕상18:1~6). 양은익 목사


말씀: 엘리야5. 그 사람, 아합(왕상18:1~6)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왕상18:1-6)

지난 한 주간도 무척 더웠습니다. 오늘은 엘리야 선지자와 늘 대척점에 있는 아합 왕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말씀에 앞서 알베르트 까뮈의 희곡 중 마지막 대사를 소개하고 함께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작품 제목은 ‘오해’ 입니다. 아주 유명한 작품으로 연극 무대에 자주 오릅니다. 작품의 배경은 중부 유럽의 외딴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여인숙입니다. 어머니와 딸은 시골 여인숙을 운영하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가출하여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습니다. 어머니와 딸은 시골 여관을 운영하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돈이 좀 있어 보이는 손님이 투숙하게 되면, 수면제를 먹인 후 죽이고, 값나가는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연극에서는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인생사와 인간성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옵니다. 잘 차려입은 청년이 옵니다. 모녀는 그 청년의 물건을 차지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의 물건을 뒤지다가 그 청년이 그토록 보고 싶어 기다리며 학수고대하던 28년전 가출했던 아들 쟌이었음 알게 됩니다. ‘오해’가 불러일으킨 이 어이없는 사건에 대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다가 모녀는 죽인 아들과 남동생을 버린 강물에 투신하여 그들의 삶을 마감합니다. 죽은 아들의 꿈은 어머니와 누이를 만나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녀의 꿈도 집 나간 아들과 남동생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까뮈의 허무한 인생과 삶의 부조리를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까뮈가 마지막에 이런 글귀를 씁니다. 전혀 까뮈답지 않은 글이지만, 우리에게는 경종을 울려주기에 귀담아들을 글귀입니다. ‘죄는 아무리 행운이 따른다 해도 항상 불행할 뿐이다’

이 글귀를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오늘 살펴볼 인물인 아합은 BC 874-853년 22년간이나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입니다. 아합 왕은 늘 엘리야를 힘들게 한 왕이었고, 그 자신도 엘리야에게서 많은 쓴맛을 봅니다. 아합 왕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능했고, 똑똑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 막강한 나라였던 바알신을 섬기는 바알의 본거지 시돈과 혼인 관계로 맺어지면 상당한 이득을 보게 될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시돈왕 딸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합니다. 그는 부와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것이 나라를 부강케 하고자 하는 그의 야심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이세벨의 우상 숭배를 눈감아 주고 끌려갔습니다. 아합 왕 때 북이스라엘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이것은 죄(우상숭배) 가운데 세워진 불행한 결말을 볼 수밖에 없는 번영이었습니다. (‘죄는 아무리 행운이 따른다 해도 항상 불행할 뿐이다’-까뮈)

바알 제사장의 딸이 이스라엘에 들어오자, 이스라엘은 온통 바알로 넘쳐납니다. 바알 신당, 바알 선지자 양성소. 성경에는 나라의 부를 위해 자신의 충동과 욕구를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풍요의 신 바알을 따른 아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왕상21:25절). 이 시대에도 똑같은 말씀이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욕망과 부귀를 위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따를 때, 이 시대의 아합이 되는 것입니다.

아합이 갖고자 하는 것을 갖기 위해 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21장의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사마리아 왕궁 입구에 있었던 나봇의 포도원은 아합 왕이 왕궁을 드나들면서 볼 때 탐나는 포도원이었습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좋은 시세로 포도원을 사들이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나봇은 왕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조상이 물려준 땅이라 팔 수 없다고 합니다. 거절을 당한 후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누은 아합의 모습이 21장 4절에 나옵니다.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 하니’

아합은 떼쓰고 조를 나이가 아닙니다. 큰 제국의 왕입니다. 그런 그가 포도원을 가질 수 없게 되자 보이는 모습을 잘 보십시오. 원하는 것을 못 갖게 되면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집착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안될 때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탐욕과 욕심에 사로잡히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그냥 아합 한 사람의 모양으로 보고 쉽게 넘기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아합의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보다 앞서는 것이 생깁니다. 이것이 우리의 우상입니다.

아합은 많은 변화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아합에게 돌이킬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기회 중 가장 큰 기회가 3년간 찾아온 이스라엘의 기근이었습니다. 바알 신이 풍요의 신인데도 불구하고 3년의 기근에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아합은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왔어야 합니다. 아합은 인간적으로는 똑똑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눈을 감았었습니다. 3년간의 기근 전과 후 아합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기근(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입니다. 고난을 겪으면 성장하고 철이 드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며 더 퇴보하고 악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합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 극심한 기근에 왕의 위치에서 고통 속에 있는 백성을 돌봐야 함에 불구하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합의 모습이 5절에 나옵니다.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자신의 말과 노새 살리는데 정신이 팔렸습니다. 요즘으로 비유하면 자기가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만 최고로 여기는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3년이라는 기근(고통의 시간) 후 더 자기만 챙기는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향해 적반하장 식의 질문을 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왕상18:17)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바로 아합 왕 자신인 것을 모릅니다. 왜 기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반성이나 양심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든지 아합의 모습을 따를 수 있는 어리석고, 주제 파악 못 하고, 독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고통이 오면 우리는 고통의 값을 지불하며 더욱더 성장하고 깊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아합에게는 결정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힘든 상황에서 한 번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와 대척점에 있었던 엘리야는 어땠습니까? 엘리야는 그 고통의 시간, 더 하나님을 찾으며, 그의 영성은 더 깊어지고 더욱더 하나님과 가까워졌던 것입니다. 같은 시대, 같은 환경에 살면서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시간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늘 엘리야에게 말씀을 통해 강력한 능력으로 임재하셨습니다. 아합 왕이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고 벼르던 그 상황, 아합 왕 앞에 나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사건이지만, 그 두려움을 뛰어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강력한 신뢰가 엘리야에게 있었기에 엘리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삶의 상황이 보여주는 위험들)을 말씀의 강력한 힘으로 극복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아합과 엘리야의 모습으로 대비됩니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삶과 믿음의 삶(영의 삶, 초월의 삶)이 있습니다. 이 두 삶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연결 고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직장과 가정에서 현실의 삶을 삽니다. 이 삶에 하나님의 말씀(내 영혼에 진동을 주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으면 현실의 삶은 믿음의 세계와 연결점이 없게 됩니다. 말씀의 연결고리를 갖지 못하면, 교회에서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신세로 추락합니다. 아합의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고, 우리는 언제나 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하나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는 말씀이 내 안에 침투해 들어와 나의 영혼에 진동과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인데 신앙이 없다는 것은 말씀이 없기에 자기의 판단으로 사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끊임없이 말씀에 접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뜨겁게 들어와 내가 반응하고 순종할 때 드디어 하나님은 내 안에서 움직이십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하고, 내 안에 뜨겁게 살아 있을때 드디어 나는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들어와 뜨겁게 역사하시는 말씀만이 희망입니다. 늘 겸손하게 말씀을 들으십시오. 늘 예민하게 말씀을 들으십시오. 두렵게 들으십시오. 또한, 기쁘게 들으십시오. 아프게 들으십시오. 순종하며 들으십시오! 이럴 때 우리는 하루하루 변화된 존재로 세상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말씀만이 나를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는 영적 훈련을 하십시오. 만남에는 ‘스침과 지님’이 있습니다.’ 스침’ 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만남입니다. ‘지님’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의 체취와 흔적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영향을 받는 만남입니다. 하나님(말씀)과의 만남은 그냥 스침으로의 만남이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훈련으로 ‘지님’의 만남을 해야 합니다.

아합도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가짜 회개였습니다. 아합은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왕상22:34) 갑옷을 연결하는 바늘 땀이 들어가는 그 작은 구멍을 갑옷 솔기라 하는데 그 작은 구멍에 화살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아합의 죽음이 심판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예언대로 아합의 피는 개들이 핥게 됩니다.

말씀이 없는 삶은 언제나 허무하고 공허합니다. 우리는 모두 아합이 될 수 있는 부족한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더욱 겸비하게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의 강력한 힘과 은혜로 현실의 삶을 참다운 믿음의 삶으로 살아내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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