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30. 주일 설교: 엘리야 4. 그 아이가 살아났다(왕상17:17~24). 양은익 목사


말씀: 엘리야4. 그 아이가 살아났다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왕상17:17-24)

이제 8월을 시작하는 문턱에 왔습니다. 지금도 더운데 더 더울 것입니다. 마음만은 더 시원하게 지내시는 8월 되시기 바랍니다. 서로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cool 하게 여름 나시기 바랍니다!’

맹자 ‘告子章’에 나오는 글입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몸과 피부를 줄이게 하고, 그 생활을 빈곤에 빠뜨리고,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며,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무시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요지는 힘든 일을 당하게 될 때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쉽지 않은 일들을 당하고 있습니다. 17절에 사건의 발단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시돈땅, 사르밧 지역, 한 여인 집에 은신하고 있습니다. 과부와 아들과 한집에 사니 식구, 즉 가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큰일이 벌어집니다. 여인의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큰 병을 얻어 시름시름 하다 죽습니다. 사르밧 여인에게 큰 불행이 너무도 빨리 온 것입니다.

17절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다시 말씀드리면 끼니마다 식사가 있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 기뻐하며 살 만해진 그 순간에 갑자기 닥친 엄청난 일입니다. ‘好事多魔’입니다. 큰 어려움이 그 가정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맥없이 무너져야 합니까? 나무가 매년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듯, 조개가 인고의 시간을 거치며 진주를 만들어 나가듯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건의 결말은 놀랍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오늘 이 사건을 단순히 다시 살아난 사건으로 보지 마시고, 삶의 사건에 대입하면서 오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22절 ‘그 아이가 살아났다.’, ‘그 가정이 살아났다.’ 합니다. 이 사건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부활 사건입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신앙은 여러분 마음속에서 ‘안다’라 말하지 않고, ‘믿는다’라고 말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이가 살아난 사건,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사건, 야이로의 딸 부활 사건, 나사로의 부활 사건 등을 볼 때 우리는 그 순간 하나님의 역사 하심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반드시 또 아셔야 할 것은 이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일을 당한 사람들의 소원하는 마음과 행동과 믿음이 합쳐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혼자 일하심만 있었던 사건이 아님을 꼭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사건에 연루된 두 사람, 사르밧 여인과 엘리야 선지자의 마음과 행동과 믿음과 소원함이 어떠했는지 함께 보고자 합니다.

1.사르밧 여인
이 사건에서 가장 슬프고 비통한 사람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어떤 위로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본문 18절에 이런 절망적인 상황일 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절) 아들의 죽음이 엘리야 때문이다, 하나님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적의 음식을 함께 먹고 교제하던 사람을 상관없다 합니다. 심판하러 왔다, 아들을 죽게 하러 왔다 합니다. 속상하면 무슨 말이든 못하겠습니까? 이해는 해 줄 수 있습니다. 여인은 하나님도 못 믿고, 사람도 못 믿겠다 합니다. 삶이 어려워질 때 나타나는 공통되는 현상인 ‘관계의 틀어짐, 관계의 악화’가 온 것입니다.

관계가 악화되면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동을 해도 좋게 봐주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참 난처하게 된것입니다. 사르밧 여인의 집에 기거하며 식사할 때 엘리야는 많은 얘기를 나눴을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의 까마귀가 먹을 것을 날라다 준 사건도 얘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에게 힘든 순간은 찾아옵니다. 아무런 대비책이 없다가는 관계의 악화라는 나락으로 추락합니다. 미리 예상하고 미리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정적 감정에 빠지게 되면 ‘너 때문이야’하며 원망하고, ‘하나님 탓’을 하며 더 깊은 절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르밧 여인이 엘리야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계속 가졌다면 아이는 살아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아이가 살아난 것은 당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19절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달라고 합니다. 이 여인에게 그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시신입니다. 그런데 원망하는 대상인 그 엘리야가(아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아이의 시신을 달라고 합니다. 순순히 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여인이 아이의 시신을 줍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번 먹은 감정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라는 신조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르밧 여인은 엘리야 원망하는 마음을 순간 거두어 버리고 엘리야에게 아이의 시신을 내어 줍니다. 본인의 감정을 추스른 것입니다. 이 한 번의 감정 추스름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지 그 당시 그 여인은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수많은 아픔을 만납니다. 우리도 우리의 아픈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회복의 새로운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2. 엘리야
아이의 시신을 건네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엘리야의 역할이 컸습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19절) 이 엘리야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본문 18절에서 엘리야는 엄청 당했습니다. 뭐라고 한마디 했을 법도 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어떤 반론도, 어떠한 변명도, 어떠한 성질 부림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Give me your son!’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는 차분했고, 평온함, 평화로움, 잔잔함, 침착함을 잘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의 이 모습을 그려보고, 배우며, 맘속으로 품으시기 바랍니다. 결정적인 순간 상대방의 원망과 미움을 뒤바꿔 놓기 위해서는 이 엘리야의 모습을 배워야만 합니다. 엘리야의 편안함을 주는 모습에 반응하여 여인은 아들 시신을 내어 줍니다. 찰나의 순간, 여인의 부정적 감정의 포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엘리야의 침착한 대응이 여인의 아픔을 치유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왜 시신을 달라고 했을까요? 엘리야는 아들을 잃은 어미의 비통한 모습을 보고 시신을 안고 뭐라도 해봐 주려고 한 것일 겁니다. 엘리야가 시신을 안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공감과 기도입니다. 이제까지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자신이 아픔을 당한 것처럼 깊이 간절히 기도드리는 것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이런 깊은 공감의 마음이 없었다면 시신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파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와 사랑의 출발은 ‘공감’의 마음입니다. 나를 향하여 욕하고 원망하는 사람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공감의 마음이 없으면 기도와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인생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가 냉정하면 모든 가능성의 문은 닫히고 맙니다.

엘리야는 시신을 안고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정말 간절히 기도합니다. 엘리야의 한 번의 기도로 아이가 우연히 순식간에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살아남은 어미의 원망과 실망을 딛고 내린 결단과 엘리야의 온 힘을 다한 중보 기도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적은 공감의 마음과 온 힘을 다한 중보기도와 원망을 접은 애씀의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의 애씀 없이 기적만 바라십니까?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막말로 할 짓 못 할 짓 다하면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십니까? 잘못 된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의 수고와 공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응해 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기도하면서 시신 위에 자신의 몸을 엎드렸다 폈다를 반복합니다. 혹자는 엘리야가 심폐 소생술을 했다고 합니다. 혹자는 시신에 엘리야의 따듯한 체온을 전하려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죽은 자를 만지는 것은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시신을 접한 엘리야는 이미 부정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따르면 죽을죄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담보로 내놓은 채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면서 무언의 호소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아이와 하나가 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이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목숨을 내건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목숨을 내건 중보기도로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엘리야는 율법을 어겼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죽이지 않으셨고, 아이도 살리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살아난 자들입니다. 전혀 아무 죄가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형벌로 허물과 죄 가운데 있었던(엡2:1)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덮어 주신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사건이 엘리야를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공감의 마음이 없으면(죽어 있으면), 우리는 우리 앞에서 죽어가는 영혼을 다시 살려 일으켜 세울 수가 없습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24절) 이 여인은 드디어 참된 믿음의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엘리야도 이 경험을 통해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갈멜산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살려내야 할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한 번 더 하나님께 제대로 된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안된다’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뜨겁게 중보하십시오.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과 싸움에서 꼭 이기십시오. 그리고 공감과 사랑과 믿음의 마음으로 시체 위에 몸을 세 번이나 엎드렸다 편 엘리야의 간절한 마음을 배우고 익혀서 그렇게 온 힘을 다한 중보로 하나님께 제대로 된 기회를 꼭 드려야 합니다.

죽어 있는 사건들, 어둠의 사건들을 감싸 안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감싸 안고 온 힘을 다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살려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엘리야를 통해 주시는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를 가슴 깊이 꼭 받고 품으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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