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23. 주일 설교: 엘리야3. 사르밧의 두 사람(왕상17:8~16). 양은익 목사


말씀: 엘리야 3. 사르밧의 두사람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17:8-16)

오늘은 비가 많이 옵니다. 비로 인해 차분해지는 주일 아침입니다. 주님의 만져주심이 크게 다가오는 주일 아침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진 한 장 함께 보겠습니다. [서울, 용산역 앞에서]라는 1957년도 사진입니다. 한국 전쟁 이후의 이 땅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1세대 사진작가로 유명한 최민식 작가의 작품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우리의 지난날 힘들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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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먹는 아이는 마치 국수 밥그릇을 앞에 놓고 웅크리고(차분히 앉을 여유도 없이) 엉덩이를 살짝 든 채로 먹는 모습이 강아지를 닮았습니다. 요즘 호강하는 호사스러운 반려견이 아닌 일반 강아지 모습을 닮았습니다. 아이의 팔과 다리는 완전히 때가 꼬지지 하게 낀 거로 보아 부모 없는 고아 같습니다. 나이는 5살~9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입니다. 쭈그리고 정신없이 국수를 먹는 아이입니다. 저렇게라도 먹으니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밖에 못 먹으니 마음이 아픕니다.

먹고 사는 것은 치열하고 엄중한 일입니다. 먹는 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이들에게 한 끼 식사를 베푸는 환대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환대하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환대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작은 환대라도 환대하는 자와 환대받는 자에게는 새로운 삶의 공간이 생깁니다. 이 공간은 마음과 영혼에 생기는 공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역설적이지만 아름다운 본문입니다. 마치 전쟁터 한복판에 핀 한 송이 꽃처럼, 가장 궁핍한 극단의 시기에 보기 힘든 믿음과 환대를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지금 믿음과 환대라는 매우 귀한 단어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삶이 고달프고 힘들수록 더 절실한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삶을 극복하고, 환대로 삶을 나눕니다. 믿음의 오른팔로 하나님을 붙잡고, 환대의 왼팔로는 이웃을 붙잡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환대’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뜨겁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엘리야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도 없는 사르밧 지역에 사는 과부입니다. 한 사람은 도망자나 마찬가지고, 한 사람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마지막 음식 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을 생각을 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만나면 보통은 좋은 게 나올 게 없습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나 보십시오.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던 엘리야가 물이 마르게 되자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떠난 이유는 사르밧으로 가면 그곳에 있는 한 과부 여인을 통해 먹게 하겠다는 말씀을 듣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릿에서 시돈(레바논)에 있는 사르밧까지는 상당히 먼 길입니다. 더구나 시돈은 바알 신앙의 본산이기 때문에 엘리야로서는 불편할 수 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여하튼 사르밧에 와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인인지 알 방법은 없습니다. 이 여인은 정말 가난한 여인입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마지막 한 끼 정도의 식량이 전부인 여인입니다. 그래서 한 끼 먹으면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여인입니다. 시돈 땅에 혼자가 된 여인네들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인임을 직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임하는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직감적인 영감이 있습니다. 그 직감이 엘리야에게 있었습니다.

상황으로 보면 둘 다 서로를 밀어내야 합니다. 사르밧의 과부는 물 달라, 떡 달라 하면서 들어 줄 수 없는 무례한 요구를 하는 엘리야를 떠나야 하고, 엘리야는 자신에게 음식을 공급해 줄 수 없는 이 가난한 여인에게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가 떠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더 강한 요구를 여자에게 하고, 죽음을 생각하던 여자는 따르기 힘든 어려운 요청인데도 믿고 그대로 따릅니다. 예상을 깨는 모습입니다. 신앙의 삶은 ‘나의 예측과 예상’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주인공 모두 놀랍고 부러운 사람들입니다. 먼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의 믿음과 호기로운 담대함이 부럽습니다. 13절입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13절)

마지막 남은 한 끼 식사 거리로 먼저 엘리야를 위한 떡을 만들어 오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아들 것을 만들라고 합니다. 우리라면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담대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목사인 제가 성도에게 이렇게 요구하면 실로 손가락질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무슨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이토록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바로 14절의 약속의 말씀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4절)

엘리야는 먹을 욕심으로 달라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비를 내려주실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엘리야는 이런 요구를 여인에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과부와 그 아들의 마지막 한 끼 식사에 ‘먼저’를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선순위’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중요치 않은 것들은 저 멀리 뒷순위로 밀려납니다. 내가 가장 우선입니다. 나와 내 가정, 등등 나를 중심으로 한 것들이 가장 우선입니다. 뒷순위로 밀려나는 것은 너입니다. 내가 앞에 오는 이유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해야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 돈, 노력.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치열하게 투자하며 얻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우선순위가 내가 아님을 알려줍니다. 참된 믿음이 들어오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깊이 일어나면 우선순위가 바뀌게 됩니다. 나를 우선으로 하던 모든 것이 하나님과 말씀을 우선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변화는 신앙인들에게 일어나는 변화 중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최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물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여인에게 내게 먼저 먹을 것을 가져오라는 것은 단순히 먹는 순서를 ‘나’ 먼저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엘리야는 인생의 기반을 나 먼저에서 하나님 먼저로 바꾸라는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여호와 신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인은 순종합니다. 마지막 남은 식사한 끼는 먹어도 죽고, 안 먹어도 죽습니다. 엘리야의 13절 말씀의 도전은 또 다른 인생의 기반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믿음의 도전이 온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믿음의 도전은 대부분 우리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옵니다. 편한 상황에서 이런 도전을 감지하는 것은 웬만한 영성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담대하고 호기롭게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는 엘리야 선지자가 부럽습니다. 엘리야에게는 그릿 시냇가에서의 경험과 그 고난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임재하심을 경험한 체험들이 이런 선포를 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입니다. 이런 호기로운 믿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삶에서 믿음이 맨 앞에 와 있어야 하는데, 믿음이 저 뒤에 다 있을 때가 많습니다. 먼저 오는 것은 ‘나’고, ‘세상’이고, 후가 ‘하나님’입니다. 믿음을 앞세우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하여, 불편하더라도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나의 먼저는 무엇인가? 믿음은 지금 여러분에게 앞자리입니까? 아니면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뒷자리입니까? 지금 나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이 본문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헌금 하라는 거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수준에 머물면 안 됩니다. 우리 삶에서 돈이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은 너무나도 큽니다. 우리는 돈을 항상 최우선 순위에 둡니다. 여러분 수중에 돈이 생길 때 여러분들의 반응은 어떤 것입니까? ‘내가 죽을 고생 해서 번 내 돈’이라는 생각만 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생각도 하십니까? 지금 저는 원론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3가지 회심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지갑의 회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헌금하라는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생사화복에서 여러분에게 인생의 우선순위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여인에게 ‘먼저’라는 인생의 방식을 가르쳐주고 싶어 합니다. 우선순위를 알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새가슴으로 살고 계십니까? 내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담대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가능합니다.

사르밧 여인에게 놀라운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15절)라고 합니다. 놀랍습니다. 과부는 엘리야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요즘 목사가 하라는 대로 하는 바보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 여인은 엘리야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도무지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말입니다.

현대 철학자 중 자크 데리다(1930~2004)는 ‘환대’라는 주제에 특히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순수한 환대란 초대하지 않은 손님에 대한 환대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은 분명 내게 중요하지 않고 때론 피하는 사람, 낯선 사람일 수 있습니다.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고, 많은 불편을 주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자신의 공간에 들어오도록 허락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환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환대는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런 환대를 만듭니다. 사실 환대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하고 미워도 불편해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믿음의 오른팔로 하나님을 붙잡고, 환대의 왼팔로 이웃을 붙잡으십시오. 엘리야와 사르밧 여인과의 만남은 믿음이 없었다면 비극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환대의 기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음의 오른팔로 하나님을 꽉 붙잡으시며 그 믿음의 열매로 진정한 환대로 이웃을 붙잡아 주시는 기쁜 일들이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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