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16.주일 설교: 엘리야2. 그릿 시냇가에서(왕상17:2~7). 양은익 목사


말씀: 엘리야2, 그릿 시냇가에서(왕상17:2~7)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왕상17:2-7)

지난 한 주간도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도 평안함과 복된 은혜를 많이 누리시는 주일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부터 엘리야 선지자에 대해 함께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상치 못한 엘리야 선지자의 두 번째 행보를 함께 보겠습니다.

1849년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책을 발표했습니다. 책 제목은 요11:4절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요11:4)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은 후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신앙의 고백으로 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죽는 일이 아니다’ 힘든 상황이 올 때 이렇게 고백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관찰되는 것은 그 밑바닥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절망이라는 병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 사람들이 걸리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인데, 그 병은 ‘하나님’을 삶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경험하고 체험할 때 치유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아쉬운 점은 절망에 다다른 수많은 사람이 이 해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이 이런 절망의 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BC 9세기, 그 시대의 키에르케고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는 왕부터 시작해서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과 온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며 죽을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회복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only one이었습니다. 아합의 세력은 막강했습니다. 엘리야는 일개 한 개인으로 기근을 선포하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게 약한 개인이 이 엄청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까?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 선지자가 우리와 성정이 비슷한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약5:17) 한 개인이 거대한 나라를 상대로 ‘종교 문제’를 들고나온 것입니다. 이 싸움은 어쩌면 무모한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엘리야로 하여금 이 싸움을 시작하게 하고 가능케 했는지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 1절 말씀에서 우리는 약간의 힌트를 얻었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에게는 실재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꽉 붙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하신 힘, 장엄하신 힘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던 탁월한 영의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 답입니다. 엘리야는 그 하나님께 사로잡힘으로 인해 그 시대 사람들의 바알리즘의 허구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어떻게 콩닥거리는 새 가슴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내면에 엄청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모든 key는 2절 말씀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왕상17:2) 이 말씀은 어떤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쓰실 때 공통으로 임하는 말씀입니다. 즉 ‘여호와의 말씀이 ~~에게 임했다’ 이것이 힘의 근원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The Word of Lore came to him'(ESV)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왔다는 것입니다.(계시, 영감)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sign을 영으로 알아듣는 신비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계시가 한 개인을 뚫고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 모두 사모하시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엘리야는 절대로 혼자 움직이지 않습니다.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말씀이 있을 때만 움직입니다. 사사로이 자기 뜻대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증거는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17장 2절 (그릿 시냇가로 가게 된 사건: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움직입니다)/17장 8절 (사르밧에 가게 된 사건)/ 18장 1절(기근 끝났음을 아합에게 통보하러 갈 때)/ 21장 7절 (나봇의 포도원 사건으로 아합에게 갈 때). 모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할 때 움직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사모했기에 가능했던 사건들입니다. 여러분들도 도전받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삶의 가치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에도 너무나도 내 생각과 내 판단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모습은 우리와 너무나도 다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말씀이 없고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신앙은 위태롭고 가식적으로 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아모스 선지자는 말합니다. ‘진짜 기근이 뭔지 아느냐? 진짜 기근은 너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다’라고. 이런 기근만은 꼭 피해야 합니다. 이 기근은 우리를 허무는 기근입니다.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말씀의 기근을 피하는 두 가지 방법은 첫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말씀을 알아들음) 두 번째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령을 통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계시받은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에 사로잡힐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든 엘리야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열려 있다면 그 순간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사50:4-5) 이 말씀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학자들은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만하여 ‘또 그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들었던 말씀도 늘 새롭게 받아들이는 학자들의 마음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늘 새롭게 받고자 하는 열린 마음 자세가 있어야 여러분들에게도 엘리야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할 때 두 개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명령하시고), 엘리야는 순종하는 구조입니다. 일개 미물인 까마귀도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그릿 시냇가로 가란 명령에 엘리야는 완벽히 순종합니다. 1절에서 엘리야는 이미 칼을 뽑아 든 상태입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숨으라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광야의 사람입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거친 사람입니다. 이런 엘리야에게 숨으라는 명령은 죽으라는 명령보다 힘들 수 있습니다. (자존심의 손상으로 인해) 그러나 순종합니다.

사실 그릿 시냇가는 숲이 무성하고 물이 풍성한 상상 속의 무릉도원이 아닙니다. 시냇가는 히브리 말로 ‘와디'(wadi) 즉 깊은 협곡입니다. 까마귀가 등장합니다. 까마귀는 죽은 동물 사체를 먹고 삽니다. 수많은 까마귀가 깍 깍 꺼리는 곳. 그릿은 분리와 단절(separation)을 의미합니다. 그릿 협곡은 음침한 곳, 사람은 없고 까마귀 울음만 있는 곳입니다. 누구라도 원치 않는 장소와 환경으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몰아 가신 것입니다. 그 장면을 잘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기근은 3년간 계속됩니다. 극심한 기근입니다. 비축한 식량들이 다 떨어져 가는 상황입니다. 한 끼 식사로 하루를 근근이 연명해가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엘리야는 그 음침한 협곡에서 어떻게 지냈을까요? 1년이든 1년 반이든 어떻게 살았을까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에 의존하면서 살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추론하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진으로 나아가 싸우기 위해 칼을 뺀 엘리야를 왜 철수시키셨을까요? 하나님의 그 깊으신 뜻을 보호와 훈련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왕상18:10) 온 나라가 엘리야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릿 시냇가로 보내신 것은 아합의 복수로부터 피신시키고 보호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음침하고 외진 까마귀 집단 서식지로 피신시키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힘들고 외로운 장소에서 점점 더 영성이 깊어집니다. 18장에 나오는 갈멜 산 대결을 준비하게 되고, 사르밧에서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내는 기적을 행할 수 있게 준비됩니다. 즉 하나님은 훈련의 시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일 년 내지 일 년 반의 기간은 보호와 훈련의 기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그릿 시냇가를 만납니다. 마음이 약하고 믿음이 약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도착한 고난의 끝은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엘리야는 잘 견디고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영성의 소유자가 됐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30대보다 더 나은 40대, 40대보다 더 나은 50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더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진보해야 합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어 갈수록 우리의 신앙은 더 커져야 합니다.

그릿 시냇가의 훈련으로 엘리야는 겸손과 인내를 배웠습니다.
1. 겸손
그릿 협곡에서의 삶은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식량으로 연명해 가는 하루살이 인생입니다. 인생에 어려움이 올 때 가장 큰 상처가 되는 것은 자존심의 손상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며 ‘ 나도 왕년에는 이러저러했는데. 왕년은 잊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겸손을 배우셔야 합니다. 이것이 그릿 협곡으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입니다. 이 큰 뜻을 깨닫고 겸손을 배우고 순종하게 된다면 그릿 시냇가는 축복입니다.

인생에서 교만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을 자랑하며,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진 인생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경계해야 할 큰 죄입니다. 잠언서의 가르침을 들으십시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칼을 빼 든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기시고 하나님은 까마귀에 의지하는 깊은 영성 훈련을 시키십니다. 교만은 쉽지만, 겸손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지만 겸손한 사람이 됐을 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며, 사람들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4:6) 하셨습니다.

2. 인내
엘리야는 매일 까마귀를 기다립니다. 또한, 언제 나갈지도 고대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도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광야의 야성을 가진 엘리야에게는 힘들고 갑갑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힘든 시간을 보내는 성도들을 볼 때, 특히 목사님들은 그런 성도들을 향해 ‘조금 기다려 보세요. 조금 더 참아 보세요’합니다. 어려운 순간, 하나님 안에서 성실하게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즉 씨앗을 뿌리는 것 같은 시간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그 씨앗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슬픈 성경입니다. 하지만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25-26) 기다리는 자에게는 여호와의 선하심이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는 죽음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곳은 새롭게 빚어내는 시간과 장소였습니다. 여러분도 그릿 시냇가를 지나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겸손히 순종하며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곳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을 것입니다. (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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