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엘리야 1. 디셉 사람 엘리야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17:1)
오늘부터 열왕기서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에 대한 말씀을 몇 주간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6월 새벽기도회 시간에 열왕기상 말씀을 보는 중에 엘리야 선지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강력한 에너지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로 다가오기를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스위스의 유명한 의사이며 상담가이자 신실한 신자였던 폴 투르니에의 글을 잠깐 보겠습니다. ‘내 이웃이 나보다 강하면 나는 그를 두려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보다 약하면 나는 그를 무시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동일하다면 속임수를 쓸 것이다'(강자와 약자 중에서)
살면서 이런 모습이 누구나 조금씩은 있습니다. 만약 이 말이 맞는다면 누구나 강자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강자가 되면 눈치 볼 것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속일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우리도 이런 이유로 강자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 말을 한국 사람들은 많이 합니다. 아마도 한국 사람들의 마음 깊이 뿌리내린 소망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원래 개천에서 사는 것은 미꾸라지입니다. 우리는 왜 용이 되기를 원하는 걸까요? 용이 안되고 개천에서 미꾸라지로 살면 힘들고 서러운 일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용은 못 돼도 뱀이라도 되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들을 이 전쟁터 같은 삶에서 하는 것입니다. 용 되지 못한 자들은 패배감과 좌절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용이 되고자 하는 꿈, 외적으로 더 낫게 보이는 삶을 위한 꿈들은 앞으로도 깨기 힘들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속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신앙의 목표도 용 되는 것에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교회와 목사들이 또한 우리 성도들이 모두 용 되는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이 질문은 상당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이 질문을 여러분 마음에 품고 오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모세, 사무엘과 같은 반열에 있는 top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몇 주간 엘리야 선지자에 대해 살펴보면서 입이 턱 벌어지는 수많은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엘리야 선지자의 중심에 근본에 어떤 것이 있기에 그 놀라운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놀라운 힘의 출처를 성경은 1절부터 보여 줍니다. 1절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16장까지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인물이 17장에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역사에 갑자기 등장하는 인물은 주목해서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엘리야를 소개하면서 1절 말씀을 주십니다. 지금 본문에 나오는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의 막강한 왕입니다. 왕은 바알 신앙에 푹 빠져 있었고, 바알은 비를 주는 풍요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기원전 9세기(874년경-아합이 왕으로 등극한 시기)입니다. 장소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입니다. 엘리야는 디셉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디셉은 워낙 변방의 작은 동네에 불과하기에 현재는 정확한 위치를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 촌 동네 출신의 엘리야가 왕 앞에 나타나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장면이 오늘 볼 1절 말씀입니다.
이 장면을 실감 나게 상상해 보기 위해 우리는 두 사람(아합왕과 엘리야)의 수준을 비교해 봐야 합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인물을 소개할 때 함께 소개하는 주변(부모 등)에 대한 소개가 전혀 없고 출신지가 디셉인것만 나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전혀 별 볼 것 없는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 할 때 개천 출신,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의 인물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추종자도 없이 혼자입니다. 나중에 제자가 한 명 생기기는 하지만 혼자입니다. 폴 투르니에의 강자, 약자 개념으로는 약자에 해당합니다. 그에 맞서서 나오는 아합 왕은 왕이며, 권력자입니다. 바알 신앙을 추종하며 따르는 선지자도 수천에 달합니다. 왕족 출신이며, 시대의 중심부(사마리아)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강자, 용에 해당합니다.
이런 상대를 향해 엘리야는 정말 겁도 없이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하는 위험천만한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에 의하면 엘리야는 분명 약자인데 어떻게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강자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본문은 쉽게 볼 수 없는 구절입니다.
엘리야는 수도 사마리아 아합 왕에게 당당히 나아와 두 가지를 선포합니다. 첫째 선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입니다. 바알 신앙에 심취해 있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선포하는 것입니다. 둘째 선포는 기근을 선포합니다. 비의 신, 풍요의 신이 헛됨을 기근으로 증명하겠다는 선포를 합니다. 이 두 가지 선포 모두 아합 왕에게는 비수 같은 말입니다. 기분 나쁘고 무뢰한 선포입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왕상 16장 30~33절에 나와 있습니다.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 16:30-33)
그 시대는 나라 전체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런 시대에 한낱 촌 동네에서 그 시대의 악과 타락 앞에 괴로워하며 무릎 꿇고 기도에 매진하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크게 쓰임 받는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약5:17)라고 말해 줍니다. 우리와 같은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거세개탁 아독청'(세상 모두 탁하지만 홀로 깨끗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인물인 엘리야가 어떻게 ‘거세개탁 아독청’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오늘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엘리야에게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만약 특별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셨다!’는 이유 하나였던 것입니다. 엘리야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 이름의 뜻에 맞게 엘리야는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왕상17:1)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늘 살아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여러 상황에 따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을 죽이고 삽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하나님은 ‘코람데오’(하나님 앞), ‘임마누엘’(하나님과 함께)의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기에 엘리야는 변두리 비주류의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악을 저지르고 있는 왕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개천 출신의 변두리, 비주류의 삶이라서, 세상의 약자라서 여러분의 영성도 그러하다고 포기하고 사십니까? 우리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큰 신앙의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엘리야처럼 보잘것없는 출신, 주변부의 삶을 살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강력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였습니다.
시대의 타락과 하나님께 대한 배신의 시대를 살면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겸손히 기도로 시대의 죄악을 회개하며 나아갔던 영의 사람이었기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마음대로 편하게 살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 반짝하고 매달리는 영성으로는 아합 왕 앞에 나서는 담대함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기도의 꾸준한 삶을 살았으면 엘리야는 18장 갈멜산 사건에서도 850명(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기도 대결을 신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기도로 승리합니다. 이것은 평상시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무너진 시대에 오로지 기도로 무릎 꿇고, 또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지켜낸 엘리야 선지자. 이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을 닮고자 애썼던 성경의 인물이 세례요한입니다.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바람과 흙 속에서 처절한 영성훈련을 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대하16:9)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것이 부패한 세상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엘리야를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 각자 가정에 또한 교회에, 사회에 엘리야와 같은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장 큰 착오(과오)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더라도 너무나도 게을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또한, 게으르지 마십시오!
몇 주간 엘리야를 탐구해 보면서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큰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꼭 살아 계시기 바랍니다. real하게 실재하시는 하나님이 되도록 만드셔야 합니다. 지금 현재의 영적 생활에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뜨겁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성이 나날이 깊어지며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다듬어져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뭔가에 도전할 수 있게 됩니다. 과거보다 지금이 나아야 하며, 지금보다는 미래가 더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Spiritual formation(영성 형성, 영성 개발)은 우리가 숨이 멎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와 말씀의 수련을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처럼 장성한 분량으로 끊임없이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매 순간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과 혼(정신), 육(몸) 이 세 가지는 아름답게 잘 계발되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소 중에서 나와 하나님을 소통시키는 것은 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를 가장 중요시합니다. 우리는 가장 강해야 할 것이 영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오로지 영으로만 소통할 수 있습니다.
영이 강해져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소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순종하게 됩니다. 영이 순종하면 혼과 몸도 순종하게 됩니다. 영이 죽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없게 됩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순간순간 영이 죽을 수 있습니다. 영이 죽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게 안 들어 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적인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영적인 삶을 게을리한 결과는 무섭습니다. 남는 것은 내 자아뿐이게 됩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판단하고, 내 뜻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영이 약화하여 있습니까? 그렇다면 영적인 삶에 집중하십시오. 이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없습니다. 영이 죽으면 다 죽습니다. 엘리야는 비록 개천 출신(주변부의 사람)이었지만 영이 깨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강력한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변두리 디셉 출신 엘리야를 기억하십시오.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나아가십시오.
마지막으로 맥체인 목사의 글 보고 마칩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정말로 내 옆에 계십니다. 내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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