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야티라 영’을 추구하라(단5:10~12)
10 왕비가 왕과 그 귀족들의 말로 말미암아 잔치하는 궁에 들어왔더니 이에 말하여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하게 하지 말며 얼굴빛을 변할 것도 아니니이다 11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니이다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12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풀 수 있었나이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단5:10-12)
‘야티라 영’을 추구하라는 제목으로 오늘도 성령에 관한 말씀, 계속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윤동주 시인이 그의 ‘서시’에서 노래했던 한 대목,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했는데, 우리도 꼭 가져야 하는 소중한 마음입니다. 물론 부끄러움이 없을 순 없습니다. 알려진 부끄러움이든,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부끄러움이든 우리는 어제도 부끄러웠고, 오늘도 부끄러운 게 있고, 아마 내일도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감성은 부끄러움입니다. 누가 제일 먼저 부끄러워합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먹고 자신들의 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는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명령을 어긴 후에는 부끄러워 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이라도 느꼈으니 다행입니다. 부끄러워할 때는 부끄러워해야 부끄러움을 발판으로 새로워질 수 있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게 되면 더 많은 부끄러움으로 전락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근대 기독교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 선생이 한 말인데 제가 좋아하는 역설입니다. ‘내가 아직도 약한 것은 내가 아직도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새겨들어야 할 역설입니다. Ego가 강하다는 것은 아직 덜 익었다는 증거입니다. 부끄러움은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할 때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일 때도 그렇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도 죽지 않으려고 하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2.
따지고 보면 부끄러워할게 참 많습니다. 그럴 때는 부끄러워해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는 게 좋습니다. 누가 봐도 부끄러운 모습인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부끄러운 게 어디 있습니까? 스크린 한번 보십시오.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음, 不恥에서, 부끄럼으로(恥). 부끄러움에서 부끄러움 없음, 無恥로 가야 합니다. (불치-치-무치)
하나님의 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모질고, 도덕적이지 않고, 넉넉함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떡합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자꾸 보이면 안 됩니다. 부끄러운 모습이 있다면 벗어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3.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서의 내용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다니엘만큼 사방에 적들이 가득한 상항에서-적들이 가득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많다는 건데- 그런 상황에서 다니엘만큼 산 사람이 있는가? 할 때, 한번 보십시오. 다니엘은 그런 면에서는 최고입니다.
다니엘은 어떤 인물입니까? 가장 예민한 시절 자신의 조국이 산산조각 나고,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지배국의 앞잡이를 만들기 위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식민지 청년입니다. 배경 없고, 의지할 데 하나 없는 사람인데 결국 어떻게 됩니까? 수많은 위기와 난관을 뚫고 왕조(느부갓네살-벨사살-다리오)가 세 번 바뀌는 격변과 긴 세월 속에서도 당당하게 살아남아 갈수록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회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철저하게 분석해 봐야 할 중요한 인물이고, 삶입니다. 6장에 보면 다니엘이 총리가 돼서 대 제국을 경영하는 자리에 오르니까 사람들이 끌어내리려고 뒷조사를 하지만 어떤 부끄러운 허물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6:4에 그들이 하는 말이 나오는데 들어 보십시오.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6:4)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청문회 할 때마다 보지만 흠 없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도 다니엘은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더라는 겁니다. 다니엘서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다니엘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있었다는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걸 누가 인정합니까? 다니엘 자신도 아니고, 그의 절친한 친구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아니고, 지배국의 지배세력들이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1세대 왕인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영이 다니엘 안에 있다고 세 번을 말합니다.(단4:8.9.18). 2세대 왕인 벨사살 왕 때는 그의 부인을 통해 다니엘이 거룩한 영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단5:10) 3세대인 메대의 다리오 왕도 다니엘 안에 거룩한 영이 있음을 인정합니다(6:4)
결국 무슨 얘기입니까? 다니엘은 평생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인식할 정도로 거룩한 영의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 하나님의 영으로 강건했고, 지혜로웠으며,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서는 이런 다니엘의 영을 ‘야티라 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야티라(yattirab)는 단어는 성경에서 다니엘서에만 8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탁월한, 최고의, 특별한, 지나친, 많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다니엘은 탁월한, 최고의 영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5:12절 보십시오.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하여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풀 수 있었나이다’ 여기서 ‘마음이 민첩하다’라는 말이 바로 ‘야티라 영’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an excellent spirit입니다. 다니엘은 이 탁월한 영으로 이상한 글자도 해석하고, 꿈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14절에서는 이 탁월한 영으로 인해 ‘비상한 지혜’ (an excellent wisdom), ’야티라 지혜’까지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에게는 ‘야티라 영’(12절)과 ‘야티라 지혜’(14절)→ 탁월하고, 매우 우수한 영과 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야티라(탁월함)가 다니엘로 하여금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게 한 힘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탁월한 야티라의 영과 지혜로, 최고도의 야티라들과 대결하면서 살았던 겁니다.
다니엘서에서 야티라를 가진 존재는 다니엘만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다니엘의 목숨을 위협했던 금 신상도 야티라(단2:31)였고, 금신상에 절하지 않아 들어가는 풀무불도 야티라 였습니다.(단3:22). 다니엘이 환상에서 봤던 짐승도 야티라 였습니다.(7:19).
**[야티라 신상: 그 신상이 크고 광채가 매우(야티라 지나치게) 찬란하며(2:31) 야티라 풀무: 풀무불이 심히(야티라.지나치게) 뜨거우므로(3:22) 야티라 짐승: 그것은 모든 짐승과 달라서 심히(야티라, 유별나게) 무섭더라(7:19) -PPT ]
강한 자를 상대하려면 강해져야 합니다. 다니엘은 ‘야티라’라는 막강한 상대들과, 야티라의 영과 지혜로 맞섰던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야티라의 탁월한 영이 없었다면 다니엘도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졌을 겁니다.
4.
다니엘은 탁월한 야티라의 영과 지혜를 어떻게 가질 수 있었습니까? 다니엘의 뛰어난 영을 생각할 때 반드시 풀어야 할 비밀입니다. 놀라운 것은 다니엘이 가진 탁월한 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한순간에 특별하게 그에게 부어진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어디를 봐도 다니엘에게 우리가 소위 말하는 강력한 성령 체험이 있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삼손에게 성령이 임하자 삼손이 어떻게 됩니까? 사자를 찢어 죽이고, 나귀 턱뼈로 천명을 죽입니다. 나중에는 최후의 힘으로 건물을 무너트리는 괴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다니엘에게는 이런 식의 성령 체험, 성령의 유입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언제나 성령 충만했고, 탁월한 영의 사람으로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다니엘은 언제 봐도 똑같습니다. 어떻게 똑같습니까? 항상 하나님께 신실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끊임없이 기도했고, 열심히 살았고, 성실하게 공부했고, 일부러 높인 자리에 올라가려고 애쓴 적도 없고…. 누가 봐도 평범하고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자 말로 하면 초지일관이었습니다.
근데 이런 다니엘의 신실함과 성실함과 단순함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거하셨던 겁니다.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고, 반성해야 할 성령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성령 이해는 한마디로 하면 한 번에 왕창 터지는 성령 체험입니다. 특별한 때 특별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성령 충만. 성령 체험이 많습니다. 이런 성령체험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강력한 체험으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지만 이런 한 방에 터지는 성령 체험을 너무 좋아하지는 마십시오.
강력한 성령체험은 하나님이 주실 때 받으면 되는 체험이지, 내가 인위적으로 짜내서 받는 체험이 되면 안 됩니다. 이런 체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다는 아니겠지만- 평소에는 하나님, 잘 찾지 않고, 기도한 번 성실히 하지 않을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삶도 그렇게 성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교회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성령 체험을 사모하는 사람도 많고, 은사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지천이 깔린 게 한국 교회의 현실이고,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체험을 많이 한 교회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교회는 더 세속화 되었고, 성도들은 세상보다도 더 세상의 가치에 만족하면서, 일반 사람들보다 더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고 사는 안타까운 지경이 돼버린 겁니다.
한방만 찾으면 안 됩니다. 성령은 나의 기대와 내 욕심을 채워주는 영이 아닙니다. ‘영성에는 지름길이 없다.’ 다니엘을 보면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성령 이해입니다. 한 번의 강력한 체험으로 다니엘이 순식간에 야티라 영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된 게 아닙니다. 다니엘은 일평생 진실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고, 그런 다니엘의 삶에 야티라의 영, 최고도의 우수한 성령의 임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삶은 일상(日常)과 비상(非常)으로 이루어집니다. 일상은 말 그대로 매일(日), 똑같이, 항상(常) 되풀이되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평범한 날입니다. 비상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특별한 순간입니다. 당황하게 되고, 놀라게 됩니다. 그러면 일상과 비상 중에서 어떤 쪽이 더 성령의 이끄심이 필요하고,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까? 비상의 상황에서도 절실하겠지만, 일상의 삶에서 성령의 능력이 훨씬 더 필요합니다.
매일의 무심한 삶이지만, 최선을 다해 뜨겁게 살고, 깊게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답게 부끄럽지 않게 살 때, 비상한 때가 오면 비상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능력이 나도 모르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일상이 없으면 비상도 없습니다. 해서, 부탁드립니다. 특별한 성령의 체험이 없다고 아쉬워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로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십시오.
이게 다니엘이 가졌던 성령의 모습이고, 하나님은 이런 다니엘을 적들의 세상 한복판에서 평생에 실패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루하루 예수의 영으로 최선을 다하며, 매사에 성실하게 맡긴바 책임을 온전히 해 나가는 것이 신앙인의 길이고, 그때 야티라의 탁월한 영을 가진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힘내십시오. 하나님은 신실한 자들에게 야티라의 영을 반드시 주십니다. 이 은혜받아, 지금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는 답답한 일들, 힘든 일들, 다 풀어나가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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