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5.14. 주일 설교: 숨어있는 자들의 부활(요20:19~23)


말씀: 숨어 있는 자들의 부활 (요20: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19-23)

오늘도 마음의 울림이 있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진 한 장 보여 드립니다. 3개의 그림은 고무 지우개, 컴퓨터 자판의 delete key, 잉크 수정액입니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지운다는 기능입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지우개의 개발은 위대한 인간의 발명품 중 한 가지입니다. 과학자들 모임에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모인 과학자들에게 2000년간의 발명품 중 가장 위대한 발명을 꼽아보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지우개의 발명을 그 답으로 내놨고, 많은 공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지우는 기능은 잘못을 수정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잘못을 지울 수 있고,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놓고 볼 때, 만약 잘못을 수정할 수 없다면 그 삶이 어떠할지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만 해도 갑갑하고, 희망 없는 삶일 것입니다. 잘못된 채로 그대로 끝나버리는 삶일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글을 소개합니다.
버리자 새로나자 새 생명으로 고쳐나자
맘은 있다면서 꼼짝도 못 하는 이 몸
두 눈이 벌게 서서 죽이고 있는 이 몸
이까짓 이 몸을 버리고 다시 나자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새 생명으로 다시 나자
아아 생명의 주님. 날 고쳐 지으소서. (이 팔을 뭘 하니, 부분)

얼마나 갑갑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버리자는 의미는 지우자는 뜻일 것입니다. 선생의 마음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우리는 더 고치고 지우고 버려야 할 것 투성이일 것입니다. 부끄럽고 실패한 순간들 정말 깨끗이 지우고 싶습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사소하더라도 부끄러운 내 모습 지우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면 좋겠습니다. 겸손한 이런 마음의 소망들이 노래가 되어 여러분들에게서 늘 울려 나오기 바랍니다.

지난주 위대한 50일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50일이 왜 위대한 50일이 되었습니까? 이유는 ‘지우개’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영적인 감흥을 갖고, 죄를 지우는 위대한 사역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나온 것처럼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하고 숨었습니다. 주님은 이 위대한 50일간 실패하고 절망에 빠진 자들을 일일이 찾아주시고 그들의 실패를 하나하나 지워 주셨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다 세탁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찾아주신 모든 이들이 다 살아났습니다. 이런 기적이 여러분 삶에도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유로 그 50일은 위대한 50일입니다.

베드로의 부끄러운 배신의 과거를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로 직접 찾으셔서 ‘너 정말 나 사랑하니?’ 끈질기게 물으시고 답을 받아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이 회복의 사건으로 순교할 때까지 위대한 사도의 직분을 감당합니다. 도마도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도 나타나시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받아내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낙담한 제자들에게도 제3의 인물로 나타나셔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회복된 그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활기찬 발걸음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 부활의 역사적 사건은 뒤집어 보면 제자들의 실패 역사입니다. 다 부인했고, 다 도망했습니다. 이 부끄러운 모습이 복음서의 역사입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염치, 체면 모두 버립니다. 완벽하게 무너집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19절입니다.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안되기를 바라며 다시 읽겠습니다. ‘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요20:19) 부활의 소식이 들려왔지만, 첫날 저녁 제자들은 무서워 은신처에 숨었습니다. 10명의 제자(가룟 유다와 도마 제외)들은 마리아에게서 부활 후 나타나신 주님 소식을 들었었음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되어 잡혀갈까 두려워 숨어 있는 자들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두려우면 숨게 됩니다. 어릴때하던 술레잡기 빼고 숨은 적이 있으십니까? 학생 때 친구 한명이 학생 운동으로 수배되어 도망다니다가 저희 집에 와서 하룻 밤을 재워달라고 했습니다. 재워주면 처벌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친구를 하룻 밤 재워 주면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습니다. 바람 소리에도, 문의 미세한 소리에도 놀라서 움찔 움찔 했습니다. 숨는 것은 그만큼의 두려움이 동반 됩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숨을 일은 현재로서는 없겠지만,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숨을 수는 있습니다. 신자는 신자인데 밝히지 않은 신자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숨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일 것입니다. 밝히면 득 되지 않고 욕먹을 일이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루는 지하철을 타고 서서 가고 있었습니다. 우르르 여자 성도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더니 서로 집사님, 권사님 해가며 교회의 치부를 드러내고 이 얘기 저 얘기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신자의 신분을 감출 때가 있습니까? 각자 판단에 맞게 잘하시겠지만 혹시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길 때가 있으면 생각은 해 보셔야 합니다. 신자 됨을 왜 숨길까? 나의 이러한 익명성이 정당한 숨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늘 숨어있는 제자들을 찾아 주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 주님은 우리가 숨어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기를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을 숨어야 할 어쩔 수 없는 순간을 빼고는 드러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좀 더 세밀하게 보겠습니다. 두려움으로 문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던 그들에게 뜻 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요한은 그 장면을 19절 중간에서 이렇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정말 홀연히(Suddenly) 그들 가운데 오셔서 ‘Salom’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습니까? 하지만 당황도 잠시 주님의 주님 되심을 확인하자마자 그들 마음속에 진달래, 개나리 피는 새봄이 갑자기 와 버린 겁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절) 드디어 아침부터 소문으로만 떠돌던 일이 현실이 돼서 그들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싫든 좋든 부활의 목격자, 부활의 증인이 돼버린 겁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밖으로 불러내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게 됩니다. 주님은 세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첫째 명령: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두 번째 명령: 성령을 받아라22절), 세 번째 명령: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다.(23절) 나가도 될 정도의 능력과 권세를 줄 테니 밖으로 다 나가 보라는 것입니다.

부활 후 나타나신 주님은 정황상으로 보면 제자들을 야단 칠법도 하시지만, 전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샬롬’하십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니? 얼마나 두려웠니? 오히려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믿어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던 사역을 하도록 ‘위임’ 하십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모든 것을 용서하심과 동시에 그 위대한 사역의 위임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큰 감동과 감사에 휩싸였겠습니까?

사랑은 사랑을 만듭니다. 긍정은 긍정을 만듭니다. 믿음은 믿음을 만듭니다. 미움에서 사랑이 만들어 질 수는 없습니다. 내가 너를 부정하면서 상대에게 나를 긍정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끊임없이 배려하고 사랑하는데 미움이 싹틀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이런 끊임없는 배려와 용서와 용납과 믿어주심과 긍정해 주시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이 제자들의 불신앙과 부정을 이겨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약점 많은 우리의 모습도 다 지워주시고 풀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세 가지 명령을 하실 것입니다. 숨어 있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라고 하고 계십니다. 세상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며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나가야 할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잘 표현해준 세 명의 정의를 보겠습니다. 첫째는 사회학자인 엄기호의 표현입니다. 그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회’라고 표현했습니다. 소수의 예외적인 상황을 생각하지 마시고 평균적인 사회의 모습을 보면 맞는 정의입니다. 두 번째는 폴란드 사회학자 바우만의 표현입니다. 그는 ‘복음서는 생략되고 욥기만 남은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서란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과 희생으로 가득 찬 성경입니다. 욥기는 알 수 없는 고통만 남아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입니다. 세 번째는 마거릿 대처의 표현입니다. ‘더는 사회라는 것은 없다. 사회 없는 사회다’ 즉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는 각자도생의 정글 같은 삭막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돼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찾아 주셔서 우리를 부활시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익명성에 숨어 있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라고 하십니다. 아멘으로 순종하며 나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냥 내보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숨결(성령)은 아담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리는 생명의 호흡입니다. 그 생명의 숨결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하고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내 안에서 뜨겁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으로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시며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너희’라 그러셨습니다. 지우개가 있으면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의 부끄러운 ‘너희들’인데, 이 너희들에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고, 온전하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하나님의 단어지 사람의 단어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성령의 힘 받아 해 보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하면 사해지는 신비가 일어날 겁니다. 하지만 사하지 않으면 사함 없이 그대로 불행하게 끝날 겁니다.

한번 보십시오. 이 정도면 완벽하게 지워주신 것 아닙니까? 이 정도 믿어주고, 성령 주시고, 권세 주었으면 感之德之, 과분하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허물과 오점과 부끄러움을 지워주시고, 늘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넉넉함과 배려와 사랑이 정말 좋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정말 덜 부끄럽고, 지울 게 별로 없는 삶으로 보답하고 싶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마음으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버리자, 새로 나자. 새 생명으로 고쳐나자. 맘은 있다면서 꼼짝도 못하는 이 몸. 이까짓 몸을 버리고 다시 나자. 아아, 생명의 주님, 날 고쳐 지으소서

’답은 부활의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주의 부활을 더 깊게 보면서 힘차게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흔들리지 마시고 부활의 생명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호흡으로 숨쉬며, 강철같은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 교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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