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의심하는 자의 부활
오늘도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과 소망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연휴가 시작됐습니다. 가정에 쉼과 사랑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을 보낸 후 부활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고 있습니다. 부활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제자 도마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자 합니다. 그림을 한 편 보겠습니다. 17세기 천재 화가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라는 작품입니다. (1601년) (참고로 인터넷을 통해 그림을 찾아 자세히 함께 보면 좋겠습니다)
그림을 세밀하게 보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 상황이 그림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림에는 예수님과 제자 3명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도마는 맨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께 바싹 다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예수님의 성흔(거룩한 상처)에 손가락을 넣고 있습니다. 도마는 눈을 부릅뜨고 있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하고 있기에 이마에는 많은 주름이 잡혀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예의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마는 오로지 딱 한 가지, 8일 전 십자가에서 찔림을 당한 상처를 확인하려는 일념뿐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아프신지 일그러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왼손은 상처를 만지고 있는 도마의 팔을 잡아 막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오셨는데, 믿지 못하는 제자들 때문인지 주님의 모습은 서글퍼 보입니다. 다행인 것은 도마는 의심하지만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림의 예수님 위에는 밝은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아마 나중에는 그 밝은 빛이 도마에게도 비추었을 것입니다. 그림을 잘 보시고 자신의 신앙의 현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에서 강조된 것은 손가락을 깊이 찌른 도마입니다. 왜 카라바조는 도마를 강조했을까요? 그림을 보고 있는 모든 이가 도마일 수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지금도 이 같은 (의심의 상처를 쑤셔 보는 것) 행동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의심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이들은 다 한 번쯤은 도마처럼 해봤을 것입니다.
24절에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라고 했습니다. 디두모란 쌍둥이입니다. 도마는 실제는 쌍둥이가 아닙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생각과 뜻이 가장 비슷했기 때문에 쌍둥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을 수 있습니다. 도마는 영성도 탁월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도마가 예수님과 비교될 정도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림에서 의심하는 도마의 쌍둥이는 우리 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19절),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무서워서 돌아다니지 못하고 함께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예외였습니다. 도마에게는 만만치 않은 담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1장16절에는 도마가 남긴 말이 나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의심 많은 오명을 쓰고 있지만, 상당히 괜찮은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도마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소문들이(빈 무덤 소문, 부활하셨을 거라는 여러 추측과 실제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떠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봤다고 여러 번 말해도 도마는 직접 보고 주님 몸에 난 못 자국을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이르되’라는 미 완료 시제입니다. 도마가 믿지 못하니까 한번 얘기한 것이 아니고 여러 번 얘기한 것 입니다.
그래도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증언이 아닌, 증거와 증명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자연법칙입니다. 이 일반 상식과 경험에서 못 벗어 나는 도마입니다. 지금도 도마 같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증거를 원합니다.(증거주의) 그러나 그들에게 증거를 주면 과연 믿을까요?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증거를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8일이 지난 시점입니다. 의심의 기간입니다. 이 소문들이 거짓된 환상이 아닐까? 의심이 숙성되어가는 시간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 의심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 의심의 시간에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 도마에게 원하는 대로 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주님께서 하시는 강한 명령입니다. 의심을 끝내고 의심을 오래 끌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늘 경험하듯이 의심을 오래 해도 해결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확인시켜주시고 보여 줬는데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신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도마는 다행히도 강력하신 주님의 명령 앞에 믿는 자가 됩니다. 완전히 믿습니다. 그리고 삶이 다시 한번 도약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의심이 없었다면 이런 놀라운 고백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고백입니다. 부모님의 하나님, 아내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의심 많았던 도마가 의심을 떨치고 믿음의 도약으로 더욱 강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써 도마는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고 예배한 최초의 사람이 됐습니다.
의심은 신앙의 여정 중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의심이 신앙생활에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마에게서 봤듯이, 의심은 믿음을 더 단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 폴 틸리히는 말했습니다. ‘의심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 믿음의 일부다’ 의심으로 신앙에 금이 갈 수도 있고, 믿음이 더 단단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의심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 기도 응답에 대한 의심, 자연법칙을 파괴하신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의심 등입니다. 힘든 일을 당하면 하나님에 대한 의심의 수치는 올라갑니다. 도대체 뭔가? 의심합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그렇습니다.
의심의 나무는 비료를 안 줘도 무럭무럭 쑥쑥 자랍니다. 우리가 의심할 당시에는 의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의심의 순간에도 믿음의 싹을 키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의심은 피하지 못할 신앙의 싸움입니다. 싸워야 할 의심은 치열하게 싸우십시오. 꼭 답을 얻어내십시오. 기독교는 답이 있습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신앙의 의심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을 위해 시 한 편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보시고 믿음의 용기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오랜 시간의 아픔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아픔도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람 불지 않는 인생은 없다. 바람이 불어야 나무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이유다. 바람이 우리들을 흔드는 이유다. 아픔도 길이 된다. 슬픔도 길이 된다.(이철환, 아픔도 슬픔도 길이 된다)
아픔도, 슬픔도 다 길이 됩니다. 의심의 과정을 겪고 나야 믿음의 싹이 나고,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봐야만 믿을 수 있고, 증거가 있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보지 못하고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결혼 할 때 다 알고 결혼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조금 알지만 믿고 결혼하는 겁니다. 그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부족한 것이 보이더라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건데, 믿음도 보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실체에 의해서 주어지는 은혜와 사랑을 느끼고, 맛보면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믿음은 삶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믿지 못하면 하루라도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증거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믿음으로 살다 보면 비로소 나중에 알게 되는 겁니다. 알기 위해서라도 믿어야 하는 겁니다. (안셀무스, 어거스틴) 의심만으로는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의심이 믿음으로 도약할 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29절에 보면 주께서 도마에게 한 질문이 나옵니다. ‘너는 나를 봤기 때문에 믿은 것이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봤기 때문에 믿은 겁니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저는 도마가 믿은 것은 눈으로 봤기 때문에 믿은 거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마는 눈으로 본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본 겁니다. 주님이 상처 난 몸을 가지고 나타나는 순간 도마는 주님의 사랑과 진심을 마음으로 본 겁니다.
눈으로 본 것과 마음으로. 본 것은 같지 않습니다. 눈은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진실과 사랑과 은혜는 마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도마 앞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시던 주님이 서 계셨던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감동적인 고백밖에는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상처를 만져봐야만 믿겠다고 했던 도마는 더는 없습니다. 도마는 눈으로 본 것 때문에 믿은 게 아니라 마음으로 봤기 때문에 믿은 겁니다.
그날 주님께서 제자들에 하신 마지막 말씀은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입니다. 이 말씀은 그 부활의 현장에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눈으로 보지 못하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남기신 주님의 축복입니다. 보지 못해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믿었고, 이제는 우리가 믿고 있고, 앞으로는 우리의 자녀들이 믿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다 이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의심이 필요하고, 의심이 많은 시대지만, 여러분들 모두, 의심에서 머물지 말고, 의심에서 부활하고, 의심에서 도약하면 좋겠습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보고, 만나면서 주와 동행하며 주의 생명과 치유와 사랑으로 강건해지는 것이 저의 소망이고, 기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뜨거운 피가 여러분을 뜨겁고 힘차게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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