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23. 주일 설교. 내려가는 자의 부활(눅24:13~35). 양은익 목사


말씀: 내려가는 자의 부활(눅24:13~35)

4월을 얘기할 때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 T.S Eliot(1888~1965)의 황무지라는 시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엘리엇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그러나 늘 동행하는 제3의 인물을 얘기합니다. 1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황무지 같은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제3의 인물을 꿈꿉니다.

‘당신 옆에서 항상 동행하는 그 세 번째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세어보면, 거기에는 당신과 나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눈을 들어 그 하얀 도로를 올려다보면 거기에는 당신 곁에 또 다른 사람이 걷고 있습니다. 갈색 겉옷을 걸치고 두건을 쓴 존재가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 맞은편에 누군가 있는데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황무지, 359~365행)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동행하는 어떤 존재가 느껴지고 그 존재에게 희망을 건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잘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는 제3의 인물이 나옵니다. 두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행하고 있습니다. T.S 엘리엇도 이 말씀을 통해 오늘 본 황무지의 시속에서 제3의 인물을 꿈꿉니다. 이 제3의 인물은 오늘 본문의 인물과 같은 인물입니다. 13절을 봅시다.

‘그런데 그 날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11㎞ 정도 떨어진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눅24:13.쉬운성경). 여기서 ‘그 날’이라 하였습니다. 이날,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합니다. 이 중대 사건이 일어난 날 그들은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떠나 온 곳, 옛날로 절망 가운데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락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절망하여 내려가는 이 두 사람과 동행하고 있는 낯선 이가 있다고 누가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엘리엇도 이 본문 말씀을 빌려서 제3의 인물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제3의 동행자가 하락하는 그들을 일으켜 세워 주듯이, 엘리엇도 1차 세계대전으로 절망 속에 있는 황폐해지고 폐허로 변한 이 세상을 제3의 인물이 일으켜 세워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황무지에서 벗어나려면 제3의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우리도 이 황무지에서 벗어나려면 제3의 인물이 필요합니다. 황폐한 우리의 마음, 하락하고 있는 우리와 세상을 일으켜 세워줄 그분이 필요합니다. 내려가는 자와 동행하는 낯선 이가 있다면 어디 계실까요? T.S 엘리엇이 소원하는 그 제3의 인물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가 정교하게 서술한 부활의 장면입니다. 이 두 사람은 정말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던 제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엠마오에 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금의환향은 아닙니다. 집을 떠나 주님을 따를 때는 성공을 바라고 좇았을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남은 것 하나 없는 힘이 다 빠진 상태입니다.

시점은 13절에’ 그날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한 그날(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입니다. 21절을 보면 그들은 부활에 대한 모든 소식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그들은 그 시간에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려가는 그들의 모습은 17절에 슬픈 빛을 띠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했기에 부활의 기쁜 소식이 들려오는데도 슬픈 낯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 두 명 중 한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바랐던 것은 이스라엘을 속량해주실 것이었습니다 (21절) 로마의 압제에서 제2의 모세나 엘리야처럼 그들을 구해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 기대가 꺾이자 그들은 힘이 다 빠져버린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바라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무엇을 바라십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이 땅의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일까요? 16절에 그들의 눈이 가려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동행해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담합니다. 그리고 그때는 잘 보이지도 않고 잘 들리지도 않게 됩니다. 안 듣고 안 본다는 말이 더 진실일 것입니다.

오상아(吾喪我, 장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장례 지낸다는 뜻입니다. 직설적으로는 자기살해입니다. 앞의 吾와 뒤의 我는 둘 다 ‘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나 吾, 나 我입니다. 같은 나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첫 번째 나, 吾는 새롭게 각성한 나, 새롭게 태어난 나입니다. 두 번째 나, 我는 고집스러운 나, 나만 아는 나, 나만 생각하는 나, ego입니다. 자기 생각에 끈질기게 갇혀 있는 나입니다. 이런 고집스러운 나가 때론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계속 그 속에 갇혀 있으면 나는 새롭게 변화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나를 얻을 수 있도록 고집스러운 나를 버리고 죽여나가라는 말입니다. 쉽지 않지만 맞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의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이 말씀은 우리가 늘 되새겨야 하는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구습에 빠지기 쉬운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내리막을 걷고 있으면 나의 옛것을 죽여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내 곁에 있는 낯선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예수님의 두 제자, 이들은 신실했던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부활의 그 날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모든 소식을 들어 다 알고 있으나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변형된 모습으로 알아보지 못했다기보다 자신들의 생각에 묶여있었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그들의 마음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를 때 바라는 것만 보고 있다면 참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33절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동행하던 제3의 인물로부터 말씀을 먹습니다. 듣습니다. 왜 예수님께 십자가의 고난이 필요했는지? 십자가는 끝이 아닌지를 말씀하는 선지자들의 글을 자세히 풀어 주자 그들은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상아(吾喪我)의 순간입니다. 말씀의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32절에서 누가는 증언합니다.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은 귀로 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은 귀로 말씀을 들을 때 우리에게 보입니다. 각성과 통찰이 그들을 휘어잡아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한 것입니다. 누가는 고심 끝에 이 표현을 썼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다.’ 마음이 차고 싸늘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뜨거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상하고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부활의 능력과 힘과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뜨거워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말씀의 은혜와 깊은 각성으로 일어납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우리는 삶의 도약이 일어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살 수 있는 각성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시시하게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식어 빠진 밥처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생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을 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부디 여러분들도 말씀 먹고, 말씀으로 살아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성취와 사랑을 느끼고, 알게 될 때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 삶이 살아납니다. 부활하는 것입니다. 삶의 지겨움과 단조로움과 신앙의 하락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식은 것과 마음이 뜨거운 것을 가볍게 보면 안 됩니다. 보기-듣기-걷기가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관찰한 세 단어입니다. 마음 식어 엠마오로 내려갈 때 그들에게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터덜터덜, 천근만근 지치고 힘든 걸음걸이였을 겁니다. 하지만 말씀의 깨달음으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질 때는 어떻습니까? 보이지 않던 예수가 보이고, 그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발걸음은 다시 힘차게 소명의 발걸음이 돼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벅찬 그들의 기쁨과 환희가 보이면 좋겠습니다.

좌절과 공포와 허무함이 기쁨과 기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계획의 성취고, 예수님은 떠난 게 아니라 동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이 정도 되면 이들도 부활한 것 아닙니까? 더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제3의 인물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새클턴(Ernest Shackleton) 이라는 전설적인 남극 탐험가가 있습니다. 이 분이 쓴 글 한 대목 소개해 드립니다. 1916년 남극을 바로 앞에 두고 거대한 유빙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 새클턴과 동료 2명이 배를 버리고 탈출해 36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게 되는데 그때를 회상하면서 쓴 글입니다.

‘나는 이 길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수반된 행군에서 신비한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나에게 우리는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 함께 걷는 것 같았습니다.’ 세 명의 탐험가 옆에 있는 이 제3의 인물은 누구입니까? 누구인지는 여러분의 믿음에 맡기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들에게도 이 제3의 존재가 보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수님이라면 더 좋겠습니다.

저는 이 누가복음 24장이 참으로 좋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문 걸어 잠그고 숨어있는 제자들에게만 간 게 아닙니다. 포기하고 옛집, 옛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찾아가 만나주셨습니다. 가는 사람은 잡지 말라고 아니라 알지 못하여,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부활이 되어 주신 겁니다. 말씀을 들려 주셨고, 말씀으로 저들을 돌려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항상 승리하고, 신나고 기쁜 게 아닙니다. 가슴 식을 때도 잦고, 추락할 때도 잦고, 뒷걸음질하여 꽃 한 송이, 노래하는 새 한 마리 없는 황무지처럼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때가 오면 쓸쓸히 엠마오를 향해가던 두 제자를 찾아오셨던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며, 힘차게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활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부활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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