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성경: 당당함과 비겁함(요18:12~17), 위선의 사람들(요18:2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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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0일 월요일
당당함과 비겁함 (요18:12~27).

살다 보면 긍지를 잃어버리고 살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김수영 시인의 시 가운데 ‘긍지의 날’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도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살다 보면 긍지를 잃어버리고 살 때가 많은데, 긍지를 가지고 사는 것처럼 귀하고, 복된 삶은 없습니다. 긍지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교만한 긍지도 있습니다. 피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놀라운 신분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긍지가 있으면 당당하게 살게 되고, 긍지를 잃으면 비겁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18장 말씀은 예수님이 잡혀 수난받으시는 기록들입니다. 가룟 유다의 주도하에 예수님은 체포되어,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예비 신문을 당하고 계십니다. 15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을 따라왔습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벤 후 예수님께 야단맞고 그때 도망쳤다면 오늘 이 배신과 비겁함의 수난은 아마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당당함과 베드로의 비겁함이 아주 극명하게 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의 순간에도 시종일관 당당하셨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봤듯이 체포하러 온 군사들에게’ 내가 너희들이 찾는 바로 그다’라고 당당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신문 당하실 때도 극도로 두려운 시간인데도, 전혀 주눅 들지 않습니다. 안나스가 신문할 때도 당당하십니다. 하인이 예수님을 칠 때도 당당하십니다. (19~23절)

겁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님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사람들은 외적인 공포에서는 주눅이 듭니다. 주님께서 당당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주님께서 가실 길에 대한 긍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 입니다. 가야 할 길, 가셔야 할 길을 마음에 담고 계셨기에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가야 할 길을 아는 사람은 당당한 법입니다. 우리도 그러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 대한 긍지가 이 땅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쳐나길 바랍니다. 자부심과 긍지가 넘치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당당하던 베드로가 세 번이나 무너집니다.

주님은 시종일관’ 내가 그다’ 하십니다. 당당하십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나는 아니다’합니다. (17,25,27)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예전의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조변석개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고, 사람의 마음이 갈대라 해도, 또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랬을까 하는 이해하는 마음으로 보더라도 베드로의 모습은 실망스럽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잘 모르면 우리는 비겁해지고 구차해질 수 있습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중심이 잡혀 있을 때 무너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할 때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판단 정지 상태로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다행히도 닭이 울자 베드로는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 밤 지난 후 베드로는 자신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에,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울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우리는 실패할 때 비로소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남의 티끌만 보던 사람이 자신의 들보를 보게 되는 순간입니다. 닭 우는 소리 들으며 뜨거운 눈물 흘리던 베드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순간에도 내가 가는 길(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자부심을 잊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의 길 간다는 이 긍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있어, 당당하게 이 길 가면 좋겠습니다.

주님 오늘 고난 주일 첫날 입니다. 주님의 고난의 뜻을 우리가 마음 깊이 새기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베드로의 비겁한 길이 아닌, 주님의 당당하신 길을 쫓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은총을 구합니다. 아멘. (정리: 김화영)

2017년 4월 11일 화요일
위선의 사람들(요18:28~38)

 

예수님을 잡은 사람들의 밤은 빨리 지나갔습니다. 벌써 새벽이 되었습니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그들은 밤새 횃불을 들고 살기등등하여, 안나스의 집에서 가야바의 집으로 또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집 앞까지 예수님을 끌고 다녔습니다. 목적은 속전속결로 재판을 마치고 어떡해서든 저주받은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동분서주 몰려다니며 예수님을 끌고 다닌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 죽음 선고는 로마 총독만이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독이 올라있습니다. 사람은 독이 오르면 자신도 다른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해지고, 위선적이 되고, 비루해지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28절 끝에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총독의 관저)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총독의 집 앞까지 끌고 왔지만, 율법에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부정하다’고 되어 있기에 그들은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무고한 주님은 십자가형을 요구하면서 본인들은 율법대로 하기에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느끼고 자부심을 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위선입니다. 자신들의 죄는 깨닫지 못한 채 이방인의 집에 안 들어간 것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31절에서 빌라도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거짓입니다. 율법에 신성 모독의 죄는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대로 훗날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주님을 돌로 쳐서 죽이지 않은 것은 좀 더 저주받은 죽음을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재판으로 십자가형을 선고받게 하여 가장 저주받은 치욕적인 죽음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주 못된 모습입니다.

신앙의 삶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일관성’입니다. 자기 편한 대로 형편 따라 이랬다저랬다 입맛대로 바뀌면 위선이 나오고 이중적이 됩니다. 남에게는 가혹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한 인간이 됩니다. 신앙인들은 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는 흠이 내게도 있는지 살피고 발견해서 고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관성입니다.

29절 또 한 명의 위선자인 로마 총독 빌라도가 나옵니다. 빌라도의 태도는 애매하며 위선적입니다. 유대인들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자 밖으로 나와서 묻습니다. 자신의 명령으로 군사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갔었음에도 시치미 떼며 묻습니다.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29절) 빌라도는 이미 유대인들과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양 질문합니다. 가식적이며, 위선적이며 이중적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마치 공정한 재판관인 양 행세합니다.

그 사람들 처지에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로마 군인은 원수입니다. (너무나 괴롭혔기에) 로마 총독은 그들의 우두머리이니 괴수입니다. 그런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까 내통하고 손잡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 인간은 추악합니까? 적의 적은 동지입니다. 사람을 매장하는 일에 가담하면 진실보다 모함과 괴담들 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가담하면 안 됩니다. 과장과 모함은 이미 진리와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진실과 진리가 없는 곳에 생명은 없습니다. 진리를 고수해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33절 빌라도와 예수님이 대면하면서 신문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왕이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는데 주님은 유대인을 빼버리셨습니다.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은 세상 한 종족의 왕이 아니고 진리의 왕이며, 유대라는 한 민족의 왕이 아니고 전 세계의 왕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위선을 벗어나려면 예수님 말씀의 진리가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 요즘은 뉴스 보기가 무섭습니다. 네거티브 천지입니다. 네거티브가 있는 곳에 생명의 진리는 없습니다. 나라의 희망도 없습니다. 추악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우리 안에 더 강하게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우리 교회와 이 땅의 교회를 위해 중보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 일관되게 바로 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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