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9. 주일 설교: 마지막 선물, 담대(요16:32~33). 양은익 목사


말씀: 마지막 선물, 담대(요16:32~33)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2-33)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노숙 생활을 시작한 한 사람이 남긴 글이 지금도 노숙자들이 기거하는 쉼터에 전설처럼 붙어 있다고 합니다. 그 글의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둥지를 잃은 집시에게는 찾아오는 밤이 두렵다. 타인이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도 집시에게는 두려움의 그림자일 뿐. 한때는 천방지축으로 일에 미쳐 하루해가 아쉬웠는데 모든 것 잃어버리고 사랑이란 이름의 띠로 매였던 피붙이들은 이산의 파편이 되어 가슴 저미는 회한을 안긴다.

굶어 죽어도 얻어먹는 한술 밥은 결코 사양하겠노라 이를 깨물던 그 오기도 일곱 끼니의 굶주림 앞에 무너지고 무료 급식소 대열에 서서. 행여 아는 이 조우할까 조바심하며 날짜 지난 신문지로 얼굴 숨기며 아려오는 가슴을 안고 숟가락 들고 목이 메는 아픔으로 한 끼니를 만난다.

수치심 잃어버린 육신을 아무 데나 눕힌다. 빨랫줄 서너 발 철물점에 사서 청계산 소나무에 걸고 비겁의 생을 마감하자니 눈물을 찍어내는 지어미와 두 아이가 ‘안 돼, 아빠! 안 돼’ 한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교만도 없고 자랑도 없고 그저 주어진 생을 걸어가야지. 내달리다 넘어지지 말고 편하다고 주저앉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날의 아름다움을 위해. 걸어가야지. 걸어가야지.’ (無名, 집시의 기도. 충정로 사랑방에서 한동안 기거했던 어느 노숙인의 시, 부분)

어려움 속에서 이 글을 보는 모든 분이 용기 내서 새롭게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힘과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참 흔하고 상투적인 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자’는 강한 다짐이 필요합니다. 용기가 없으면 삶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용기는 courage입니다. 어원은 불어인 coeur 입니다. 이것은 심장입니다. 심장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핵심 장기입니다. 심장에서 피를 보내줘야 살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몸에 심장이 핵심 장기이듯, 영혼에는 용기가 심장인 것으로 봤던 것입니다. 삶에 용기가 없으면, 심장이 없는 것처럼 삶은 힘들게 됩니다.

공자는 용자불구(勇者不懼), 용기가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용기라고 했습니다. 두려운 삶의 현실에 필요한 것이 용기이고, 용기는 두려운 삶의 아픔을 이길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여러분, 용기가 있을 때 사람은 두려움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용기가 바탕이 되어야 두려움과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천편일률적인 말로 들리셔도 이것은 진실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주의 사람들은 더 용자불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영어번역으로 ‘take heart’(힘내라) 입니다. 주님 말씀입니다. 용기 내라. 힘내라. 담대하라 하십니다. 십자가 지시기 임박한 시점입니다. 사랑하라. 평안하라. 기뻐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임을 알고 계셨던 상황이기에 ‘정신 차려’라고 하시는 게 맞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숨어있는 도망갈 마음을 아셨음에도 불구하시고 오죽하면 그럴까 하는 측은 해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격려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환난 당하겠지만 담대하라. 무너지지 말아라. 내가 세상을 이기지 않았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용기와 담대함이 땅에 떨어진 연약해진 제자들을 향해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수시로 주님께 등을 돌립니다. 제자들은 살려고 등을 돌리지만, 우리의 이유는 정말로 구차합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자존심 상하지 않으려고 등을 돌립니다. 주님의 용기 내라. 담대하라 하시는 이 당부의 말씀이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파고드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하고 축복 드립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여러분 가슴 속에 살아있어, 여러분이 등 돌리려는 시간 생각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약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담대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살다 보면 신앙적으로나 삶 적으로나 두렵고 불안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정도 이상으로 불안하고 두려움이 몰려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막아내지 못하면 잃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삶도 어려워지고 믿음도 약해집니다. 사랑하라. 기뻐하라. 평안하라 하신 모든 것이 무너지는 아픔들이 오게 됩니다. 반드시 ‘담대하라’고 하신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만 합니다.

두려움은 예측불허의 삶의 상황입니다. 두려움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나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상당히 무섭습니다. 성경 민수기의 가나안 정탐꾼 사건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하지만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백성들은 확 변합니다. 갑자기 무너집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무너집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을 두려움의 땅으로 묘사했습니다. 들어가면 죽는다. 못 들어 간다고 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그 사건을 충격적으로 만듭니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했다고 합니다.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 냅니다. 왜 이곳까지 와서 죽게 하냐? 지도자(모세와 아론)를 죽이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집단 두려움에 빠진 것입니다. 이성(정신줄)을 놓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때도 그랬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그렇게(정신줄을 놓게) 만듭니다. 두려움에 장사는 없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백성들은 40년을 광야에서 헤매다 죽게 됩니다.

두려울 수 있지만, 너무 쉽게 허용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을 내버려 두고 허용하면 반드시 비극이 옵니다. 성경에서 두려움은 어디서 출발했습니까? 창세기 3장 10절에 처음 나옵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최초로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두렵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없었던 마음이 새로이 생긴 것입니다.

두려움은 죄와 같이 처음에는 없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마음에 움트고 출발하게 된것입니다. 두려움은 불순종이라는 죄 때문에 우리 안에 생긴 부정적인 마음으로 생긴 것임을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즉 죄와 유사한 것입니다. 죄의 유전자로 인해 인류가 죄인으로 태어나듯이,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뱀이 똬리를 틀듯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출발은 불순종이라는 죄입니다. 내 안에 나도 모르게 내재한 두려움의 큰 감정들이 활개 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믿음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삶의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를 사로잡아 삶을 허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과 불안의 출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심리 상태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멀어져 갈 때 생기는 것은 어둠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싸워야 합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정확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약에 맞는다면, 하루에 한 번 꼴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차 하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절박한 상황입니다. 환란이 임박한 때, 두려움의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용기를 가져야 이길 수 있음을 아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확고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두려워 말라’하십니다. 믿음으로 그대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용기 있는 자가 되어 지지말고 두려움을 이겨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두려움을 이기고 계십니까? 시간이 해결해 주었습니까? 과거에 그렇게 극복했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두려움을 헤쳐 나가실 것입니까?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에게 늘 존재하는 아픔입니다. 그림자처럼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불안은 실체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잘 막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둘을 잘 막아낼 때, 많은 자유로움을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물리쳐야 할 두려움이면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의 대상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러나 그 두려운 대상을 대항하는 기본 마음은 한가지입니다. 즉 담대함(용기)입니다. 어떻게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담대하라고 주님이 명령하셨기에 어떻게 하면 담대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소신을 갖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1.소신
굳게 믿는 것이 소신입니다. 소신이 강할수록 외부 공격과 외압에 더 강하게 방어막을 칠 수 있습니다. 소신을 강하게 붙들고 있는 것은 나를 지킬 수 있는 용기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울수록 소신(conviction,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커도 소신이 크면 됩니다.

조선 시대 사초를 쓰는 사관들은 굉장히 강직했다고 합니다. 목숨을 내놓으라 해도 버텼다고 합니다. 두려움이 있지만 ‘정론’이란 강한 소신이 두려움을 막아줬습니다. 소신은 삶의 어려움을 견디게 하기에 꼭 필요합니다. 물론 잘못된 소신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소신은 담대함을 선물로 줄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강한 소신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신은 단순히 내 마음속에서 생겨난 다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소신입니다. 이런 강력한 믿음의 소신이 우리 안에 싹트면 우리는 용기를 갖고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신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담대하게 살려면 신앙의 가벼움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가벼운 신앙, 형식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아무 대가도 치르고자 하지 않고 받기만을 원하는 신앙입니다. 이 가벼운 신앙으로는 소신 갖기는 어렵습니다. 묵직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가벼운 신앙은 작은 시련에도 하나님이 없네 하며 나가떨어집니다. 묵직한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시는구나’를 절감하며 그 통치 속으로 매 순간 들어 가기 위해 열정적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신앙입니다. 이 묵직한 신앙이 있을 때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을 강타할 것 입니다. 용기 있는 삶의 모습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시편 46편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소신으로 환난 당할 때마다 담대하게 이겨 나가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46:1~3)

여러분, 이 말씀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는 삶이 요동치는 격변의 시기에도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요 도움임을 확신하시고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담대하라 ‘하셨으니, 그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 담대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2.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담대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하게 알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의 한없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은 신앙 생활하시면서 반드시 느끼시고 누리셔야 합니다. 그러면 용기가 나고 담대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방탕해서 집 나간 탕자를 기다려주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무시해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 나셨습니다. 이것 모두가 우리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붙잡아 주십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사랑이 넘쳐났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세리, 창녀, 죄인, 병자)을 만나 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십니다. 병을 고쳐 주십니다. 이 사랑을 안다면 우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탄은 두려움을 만듭니다. 하지만 사랑은 이 두려움을 없앱니다. 사랑의 능력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요한 사도가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 쫓습니다’(요일4:18) 사랑은 두려움을 없애고, 감동케 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꼭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더 많이 누려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두려움도 없어지니, 일거양득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을 끝으로 함께 읽으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 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25, 38~39. 새번역)(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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