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2. 주일 설교: 마지막 선물, 사랑(요13:34~35). 양은익 목사

 

말씀: 마지막 선물, 사랑(요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4-35)

지난 한 주 여러분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평화하라 하신 주님의 분부대로 주변 분들과 평화롭게 지내다 이 자리에 나오셨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인 존 밀턴은(1608~1674) 그의 저서 실낙원에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합니다. 17세기의 글이지만 지금 우리도 같은 모습이기에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인간이여 부끄러운 줄 알라고 하고 싶구나. 저주받은 악마조차도 그들끼리는 굳건히 일치단결하는 법인데 생물 중에서 이성적인 인간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희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반목하는구나. 하나님이 땅에는 평화 있으라고 선포했음에도 서로 증오하고 적의를 품고 싸우는 생활에 열중하여 잔혹한 전쟁을 일으켜 지상을 황폐하게 해서는 결국 멸망할 뿐이다. 이래서는 마치 이 땅에 지옥에서 올라온 적들이 인간을 둘러싸고 인간의 파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밀턴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으로 엄청 분노합니다. 지옥에서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서로 싸우고 있는 현실에 분노합니다. 밀턴이 이렇게 분노하는 것이 잘못 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악이 번성한다’, ‘선이 번성한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더 많이 들어보셨습니까? 선이 번성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 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선도 있지만 악이 더 많고 더 큽니다. 악은 우리에게 더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에 더 끌립니다. 우리의 본성상 악은 우리에게 더 매력적입니다. ‘착하게 살아봤자 소용없고 손해다’라고 말해 보신 적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말들을 하며 삽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악은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어로 Schadenfreude(샤덴프라우데)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남의 불행에 대해 갖는 쾌감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 말로는 ‘꼴 좋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단어는 어느 경우에도 쓰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많이들 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아파하고 동정해야 함에도 너무나도 쉽게 당연하다는 듯이schadenfreude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마음들 때문입니다. 선하게 보이는 우리 안에 악이 있습니다. 그 악은 병을 만들기 시작하고 번성해갑니다. 악이 병을 만들고 번성해가는 이 순환 구조 속에 우리는 악의 지배 속에 있게 됩니다. 밀턴이 실낙원 쓰던 당시나 지금이나 이 악의 모습은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악의 순환 구조 속에 악이 커가는 과정에 블록을 치면서 막고 방어해야만 하는 사명(소명)과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저지선(방어막, 블록)을 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당부이며 명령입니다. 여기에 삶의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영성을 동원하여 밝게 깨닫고 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주시는 이 귀한 말씀이 여러분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임박한 큰 악 앞에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요13:34), 평안하라(요14:27), 기뻐하라(요15:11), 담대하라(요16:33). 이것의 출발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밑받침될 때, 그 정체를 확실히 알 때, 놀라운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큰 악을 이길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는 동안 다른 것은 실패해도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에 실패하면 우리는 끝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에 실패하면, 우리가 인생에 쌓은 수고와 업적은 소용이 없습니다. 허무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사랑의 의미가 희미하게 느껴지셔도 사랑은 삶의 모든 순위 중 가장 우선순위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냥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정도의 삶의 액세서리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사랑의 절대성은 첫째,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사랑해야만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문학적인 과장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게 사랑할 때 우리의 깊은 사랑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느낄 수도 없고 하나님은 희미해지고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의 절대성은 사랑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이토록 왕성한 세력을 떨치는 악도(죄악도) 사랑 앞에서는 무너집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죄를 덮는다는 의미는 죄가 아무 힘을 발휘 못 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배신한 후 다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회복되는 큰 기적을 경험했기에 이 같은 말씀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절대적 속성입니다.

악을 이기는 유일한 힘은 사랑입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경험들 하시기 바랍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사랑이 있으면 그냥 참고 넘어가 줄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힘으로 화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즉 자신의 기질과 죄를 짓고 마는 혀를 제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본성만을 드러내지만, 절대적인 사랑이 있게 되면 우리는 본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이 만들어 내는 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부하신 것처럼 큰 악 속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면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아침 제자들에게 또한 우리에게 전해주시고 싶어 하시는 이 사랑의 가치를 깊이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가볍게 듣고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화가 난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린 것처럼 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것이 악을 이기는 답입니다.

윌레 소잉카(나이지리아 노벨상 수상작가)는 ‘문학은 타자를 악마화하려는 경향에 대항할 수 있게 하는 잠재력이 담겨있다’고 말했습니다. 문학의 좋은 장점은 좋은 감수성으로 악에 저항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학을 사랑 또는 믿음이라는 단어로 대치해서 우리의 말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믿음은, 타자를 악마화 하려는 경향에 대항할 수 있게 하는 잠재력이 담겨있다.’

사랑은 악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관계를 훼손시키고 가정을 무너지게 만드는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서로를 오해하게 하고, 미워하게 하고, 불신하게 만드는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이 악의 세력을 막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사랑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오늘 이 주시는 말씀이 여러분들 마음에 큰 울림이 있어서 이 사랑을 새롭게 보고 잘 품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세상의 악을 반드시 줄입니다. 사랑의 은총이 들어오면 가정은 평안해지고 삶은 담대해집니다. 사랑의 은총이 내 안에 충만할 때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4가지 주제가 내 삶 가운데 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꼭 담으시기 바랍니다. 절대 허투루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사랑의 목표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그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첫째,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Endless Love).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요13:1) 주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끝까지, 항상, 언제나 하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조건에 따라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조건에 상관없이 끝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본문 13장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성만 찬 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요13:14) 그 당시 발을 씻겨주는 것은 종들이 하던 일에 해당합니다. 제자들의 발이 어떤 발입니까? 주님을 떠나 도망칠 발들입니다. 그 모든 것을 아셨던 주님. 배신과 도망을 아시면서도 열심히 씻겨 주십니다. 정성껏 어루만져 주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부족한 것들이 많지만 그렇기에 서로 용납하고 품어주고 사랑하며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감동적 sign입니다. 앞으로 도망가든지 말든지 지금 현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본보기와 감동적인 sign으로 훗날 제자들은 도망했다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둘째, 십자가 사랑입니다. 끝까지 사랑의 정점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목숨을 내놓는 이 고귀한 주님의 사랑이 우리 사랑의 두 번째 목표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랑은 사랑의 극치입니다. 숭고하고 거룩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으로 우리 죄인들을 끌어안으시고 본인의 목숨을 내놓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은 소멸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부활합니다. 흐지부지 없어지는 대충 하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모습은 씨앗이 뿌려져 열매를 맺게 되는 고귀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얘기하면서도 실제로 제대로 된 사랑은 거의 하지 많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사랑(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배워 열심히 해봐야 합니다.

악이 팽배해 있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사랑의 선포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귀한 사랑을 하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이 고귀한 사랑을 해낼 수 있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랑을 위해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말씀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성령의 은혜 속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그러기에 성령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 혼자 하려는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임재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요즘 가족들에게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요즘 말투는 어떻습니까? 온유함과 관용은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화풀이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다 싶으시면 그대로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을 구하시고, 말씀과 기도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자기성찰에서 나오는 고귀한 사랑입니다.

사람에게는 동일시의 능력이 있습니다. 나와 네가 다른데, 감정적인 끈에 의해 동일하게 느끼는 능력입니다. 나쁜 동일시, 좋은 동일시 모두 인간에게는 가능합니다. 우리가 동일시 해야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여기서 깊이 생각한다 함은 동일시입니다. 예수님의 아픔과 고난과 감정과 사랑을 동일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과 얼마나 동일시하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그분과 연합하여 동일시해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주님의 소중한 당부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악은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도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으로 악을 이겨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악으로 힘들겠지만 ‘저렇게 사랑으로 살 수 있네’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나태주 시인의 ‘황홀 극치’라는 황홀한 시 한 편 읽고 마칩니다.

황홀, 눈부심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함
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음
어쨌든 좋아서 죽겠음

해 뜨는 것이 황홀이고
해 지는 것이 황홀이고
새 우는 것 꽃 피는 것 황홀이고
강물이 꼬리를 흔들며 바다에
이르는 것 황홀이다

그렇지 무엇보다
바다 울렁임, 일파만파, 그곳의 노을,
빠져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황홀이다

아니다, 내 앞에
웃고 있는 네가 황홀, 황홀의 극치다.

도대체 너는 어디서 온 거냐?
어떻게 온 거냐?
왜 온 거냐?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하셔서 여러분 옆에 있는 모든 분이 황홀의 극치로 보이는 감격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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