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19. 주일 설교: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눅17:20~21). 양은익 목사


말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눅17:20~21)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점점 따듯해져 가는 봄날 모이셨으니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하겠습니다. 복된 주일 아침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개의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권정생 선생과 타네하시 코츠(TaNehisi Coates)라고 하는 흑인 작가의 글입니다. 권정생 선생(몽실언니)은 작은 시골 교회 종지기로 살면서 아름다운 글을 써서 많은 감동을 준 분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많은 분이 추모하고 있습니다. 청년기 집을 나와 거지 생활할 때의 글입니다. 거지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집을 나와 거지 생활을 하던 그 당시도 친절을 베풀어준 많은 사람을 잊지 못한다. 상주 지방, 마을 앞에 우물이 있고 늙은 소나무가 있는 외딴집 노부부의 정다운 모습을 잊을 수 없어 [복사꽃 외딴집]이란 동화를 썼다. 열흘 동안 매일 아침마다 찾아갔지만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준 점촌댁 아주머니도,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을 때 달려와 두레박의 물을 길어다 먹여준 할머니도, 뱃삯이 없다니까 그냥 강을 건네준 뱃사공 할아버지도 좀처럼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얼굴들이다. 이처럼 곳곳에 마음 착한 사람들이 있으므로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오물 덩이처럼 뒹굴면서, 128)

이번에는 흑인인 타네하시 코츠의 글입니다. 15살 난 자신의 흑인 아들에게 쓴 글인데, 미국에서 2015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될 만큼 큰 영향을 미쳤던 글입니다.

‘나는 두렵구나. 그 두려움은 네가 내 곁을 떠날 때마다 가장 사무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네가 태어나기 오래전에도 두려움에 떨었고, 또 그런 점에서는 나만 독특한 것도 아니었어. 내가 너만 했을 때 내가 아는 사람은 전부 흑인들이었는데, 그들 모두 극심하게, 요지부동으로 위험할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록 늘 의식했던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 내내 나는 그 두려움을 보며 살았지. 두려움은 언제나 내 바로 앞에 있었다…. 이것이 너의 나라다. 이것이 네가 사는 세상이다. 이것이 너의 몸(검은)이다. 너는 이 모든 것 안에서 살아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세상과 나 사이, 26)

미국 사회에서 흑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글이 보여주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권정생 선생이 보여준 세상은 사랑이 있고, 넉넉하고, 베풂이 있는 생명이 있는 세상입니다. 타네하시 고츠가 경험한 세상은 흑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배제되고 공포를 느끼게 하는 차별과 죽음의 세상입니다. 여러분에게 살고 싶은 세상을 고르라고 하거나, 세상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어떤 세상을 택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잘 간직하시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음 한복판에 새겨 넣어야 할 인생의 말씀을 얻은 것입니다. 사사건건 예수님과 충돌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번 질문은 꼬투리를 잡으려는 질문이 아니고 진지한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자손입니다. 에덴의 자손입니다. 에덴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주신 곳입니다. 하나님과 공존하며 갈등 없이 기쁨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곳은 모든 사람이 꿈꾸는 곳입니다. 에덴은 모든 사람의 이상형, 낙원이며 기대하는 천국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에덴을 꿈꾸고 소망했습니다. 로마의 압제가 심해질수록 에덴을 향한 갈망은 더욱더 커졌습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그곳, 그들은 강렬히 갈망했습니다. 이런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에덴에 대해 선포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 임하고 어떤 모습으로 임하는지?

이 질문에 주님께서 주신 답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주신 답은 지금 우리에게도 주시는 답이기에 집중하시고 잘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새번역)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곳)는 눈으로 볼 수 없고, 나와 너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천국, 에덴, 유토피아가 눈에 보이는 나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착각합니다. 그리고 갈등하고 싸웁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나라가 있어도 그저 한낱 세상 나라일뿐입니다. 예수님은 에덴을 소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전혀 다른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그들이 바란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어떤 체제를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너희 안에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 속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관계가 나쁘면 그 나라는 지옥입니다. 가정 안에도 지옥이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보통 교회가 하나님 나라라고 알고 계시는 분도 있지만, 관계가 나쁘면 교회 안에도 지옥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개역 개정 성경에서는 너희 안에를 within you로 번역하고 있고, 새 번역에서는 너희 가운데 among you(셋 이상의 관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 나와 너와 그 사람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kingdom)이 나와 너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면 그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진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을 한번 보십시오. 나와 너의 관계 속에 나는 나 스스로 주인이라는 착각 속에 있고, 내 앞에 있는 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나와 너 사이의 관계에 개입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 하심과 다스리심이 가능해질 때 우리의 관계는 기쁨이 넘치고, 갈등이 없어지고, 은혜를 누리는 구원의 단계로 들어가는 에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소망하고 꿈꿔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이 땅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첫째, 하나님의 뜻이 가득 찬 상태(하나님의 뜻이 최고조에 도달한 상태)의 나라입니다. 즉 에덴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원칙이 지켜지는 나라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원칙이 살아서 내가 그 원칙대로 살고자 애쓸 때 이곳은 에덴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복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에덴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나님 통치의 위력이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원칙을 주셨습니다. 이 원칙은 지켜져야 했으나 아담과 하와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쫓겨난 후 에덴의 문은 닫혔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칙들이 내 안에 살아있을 때 나 자신이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 백성들입니다. 잘 사셔야 합니다.

이 세상 나라가 내게 두려운 이유는 나와 너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깨져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의심하고 다투고 살아야 하는 지옥 같은 세상입니다. 내 안에, 내 앞에 있는 너 안에 의와 희락과 화평(평안) 가득한 하나님의 원칙이 깨지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내가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 천국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

예수님은 그런데도 내 안에 너 안에(타자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하십니다. 너(이방인, 타자)는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통치의 위력을 느끼려면 그 다스리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 통치의 위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미워하지 말라. 사람을 환대하라.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최고조에 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앞에 아멘으로 답하며, 우리 자신의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나와 너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시고 따르십시오. 겸손히 순종하며 나아가십시오. 이렇게 할 때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비약적인 능력을 허락해 주십니다.

묻고 싶습니다. 지금 무엇이 가장 절실하십니까? 지금 나 자신과 내 가정과 이 나라에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에덴은 이곳, 저곳 장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에덴은 나와 너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고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싸우고 다투며 살 것입니까?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 유토피아는 인간의 힘으로 제도를 정비하여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가득하도록 해야 하며,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며 나와 너와 우리의 작은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내 가정에 내 교회에 내 직장에 내 나라에 확장되어 갈 것 입니다.

이 시대 젊은 작가인 임솔아의 ‘아름다움’ 입니다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만 살아본 나는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또 말합니다. ‘나는 살아가는 것이 죽는것보다 무섭다’(예보) 젊은이들이 잘 부르는 찬양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아픔과 슬픔이 없는 나라인가요? 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은걸. 하나님나라에 살고 싶어요’(그가 다스리는 그의 나라에서) 거지가 열흘을 찾아가도 밥을 꾹꾹 눌러서 주는 정겨운 세상, 아름다운 받아줌과 포용이 있던 세상은 사라지고, 지금 우리에게는 배척과 싸움 가득한 세상만 남았습니다.

주님은 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감수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왜 그토록 많은 이적을 보여주셨습니까? 그만큼 하나님 나라는 놀라운 나라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허투루(가식적으로) 신앙 생활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답이 없기에 주님께서 오신 것 입니다. 의와 화평과 공평과 사랑을 나와 너 사이에, among you 사이에 만들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드는 어떤 복지 정책으로, 어떤 제도로도 하나님의 나라, 에덴은 만들 수 없습니다.

에덴에 이르는 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모든 것이 불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순종하여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애써야 합니다. 가장 우선되어야 할 첫걸음은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확장되어 나가야 합니다. 가족들에게 교회로 사회로 넘쳐 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의 우리는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받은 우리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받기 위해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받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렇게 애쓸 때 사랑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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