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5. 주일 설교: 사울의 다시 보기(행9:1~9). 양은익 목사

 

말씀: 사울의 다시 보기(행9:1~9)

오늘도 주님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때보다 평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촛불 든 분들, 태극기든 분들 모두에게 평화가 필요합니다.

일본 지혜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는 ‘임사체험’이란 책에서 죽기 직전 상태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관찰되는 4가지 공통현상을 발견하여 책에 썼습니다. 첫째, 삶에 대한 감사와 감동입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났습니다. 둘째, 나 중심적 삶의 탈피입니다. 나 중심의 삶에서 당신 중심으로 인간관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셋째, 주체적인 삶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귀한 것들을 눈치 보지 않고 하게 된 것입니다. 넷째, 가치 추구의 삶입니다. 욕망을 따라 살던 삶에서 벗어나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 ) 없이도 깨달음으로 이런 변화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울의 회심장면입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오늘 본문을 보고 사울에게 일어난 이 사건을 임사체험으로 봤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행9:8-9) 못한 이 사건을 near death로 본 것입니다. 사실 사울은 이 경험으로 이전의 모든 것이 죽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 완전히 변화된 새사람 바울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으로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행9:18)고 했습니다. 단순히 안 보이던 눈이 보게 된 사건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된 눈이 떠진 것입니다.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이 떠진 것이고, 모든 것을 다 다시 보게 됨에 따라 삶 전체가 다 달라지는 새사람으로의 탄생입니다. 이 새 탄생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시 새롭게 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지금 사울에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울은 이 사건을 통해 세 가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이방인과 삶 전체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런 급진적 변화를 회심이라고 합니다. 회심(conversion)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바꿔주시는 사건입니다. 회심을 겪으면 동일 인물이 완전히 달라지는 굉장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자세와 태도로 변화됩니다. 여러분들도 놀라운 회심의 당사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참되어야 합니다. 진실한 신앙의 시작은 회심에서 시작됩니다.

회심의 사건은 나 자신을 하나님을 지향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어가는 출발입니다. 내 삶 속에 얼마나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느냐의 차이는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입니다. 회심 사건이 있어야 하기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절대로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심 사건은 믿지 못하던 자가 믿게 되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또한, 볼 수 없었던 자가 영적 세계를 보게 되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회심을 겪는 그의 내면에서 굉장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노아를 보십시오. 그 당시 누가 홍수가 나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안 믿었지만 노아는 믿었습니다. 건성으로 믿고 건성으로 방주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전 인생을 걸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며(동의하며), 성실히 준비합니다. 그래서 대홍수의 난리 통 속에서 노아의 방주는 견딜 수 있었습니다. 회심은 나의 노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나는 기적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회심의 완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나의 인정(받아들임)과 동의가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어떤 존재입니까? 고집도 세고 자존심도 셉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내가 동의하고 따르지 않을 때 은혜는 사라집니다.

본문 9절에서 사울이 사흘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 사울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 입니다. 내가 넘어져서 들었던 그 음성이 진짜였을까? 환상이었을까? 내가 만난 예수가 진짜 메시아 구세주인가? 사흘 후 사울은 인정한 것 입니다. 인정하고 동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사울은 받아들이고 동의한 것입니다. 사울이 본 것을 한낱 환상으로 보고 넘겼다면 회심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께도 하나님께서는 긍정적인 사건이나 고난의 사건들을 통해 은혜로 다가오십니다. 이때 여러분들께서 민감한 영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자리에서 은혜의 사건으로 받아들이시고 동의하셔야 은혜의 사건으로 완성됩니다.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으시면 은혜는 사라집니다. 동의하시고 받아들이시면 깊은 영적인 감동과 감사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 순간 필요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1. 예수를 다시 봄
회심 사건 전 사울에게 예수님은 죽여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죽인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같은 이유로 찾아내어 죽여야 했습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을 우리는 지금도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예수 이름만 들어도 증오하고 교회 다닌다는 얘기만 들어도 증오심을 발동시키는 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랬던 사울이 회심의 사건 후 변화됩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합니다(행9:20). 그 당시 회당이란 예수 반대자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예수 반대의 선봉에 섰던 사울이 그들이 밀집해 있는 곳(적진)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게(행 9:22) 한 것입니다. 180도 변화된 사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시 봐야 할 것들은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우선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관록으로 신앙 생활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늘 새롭게 봐야 합니다. 늘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따르고 있는 것인가? 제대로 알고 제대로 깨달으며 제대로 따르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모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지금도 물으시는 유효한 질문입니다. 주님을 너무 작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의 창조주이시며 이 땅의 관리자 되십니다.

루쉰은 ‘실한 나무를 얻거나 고운 꽃을 보려면 반드시 좋은 흙이 있어야 한다. 흙 없이는 꽃도 없다. 그러므로 꽃과 나무보다 흙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좋은 꽃, 열매만 보다가 흙을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신앙의 흙과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 존재의 밑바탕입니다. 주님 없으면 신앙의 삶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외관만 번드레한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주님 보는 눈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CCC 창립자셨던 고 김준곤 목사님은 생전에 외쳤던 질문이 있습니다. 백문일답입니다. 물음은 백이지만 답은 한가지입니다.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가 나의 목자입니까? 누가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입니까? 누가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까? 누가 우리의 아픔을 해결하십니까? 누가 우리의 고민을 아십니까? 우리를 죽도록 사랑한 그분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죽도록 사랑해야 할 그분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다른 답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답들은 다 시시합니다. 답이 예수 그리스도 인 것은 진실입니다. 이것은 세뇌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확신의 자리에 여러분들도 우뚝 서시기 바랍니다.

2.이방인을 다시 봄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끔찍이도 싫어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토록 싫어하던 이방인들을 위해 나머지 전 인생을 걸게 됩니다. 사울은 그들을 위해 무수히 맞고 무수히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돌에 맞고, 파선하고,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게 된 것은 회심의 사건을 통해 이방인을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가벼이 보고 넘겨서는 안 됩니다. 이방인을 어떻게 보는지는 신앙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나 아닌 너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아닌 모두가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나 아닌 사람, 내가 정말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 모두 이방인입니다. 사울은 회심 후 그토록 싫어하던 이방인을 위해 남은 생을 헌신했습니다. 이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십시오.

이방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만만치 않습니다. 모욕을 주고 싶어 하고, 굴욕당하기 원하고, 배제하고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지금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문제가 이방인의 문제입니다. 낙인 찍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수많은 낙인이 있습니다. 너 촛불 들었지? 너 태극기 들었지? 하면서 서로 낙인 찍고 배제해 버립니다. 공의, 정의 하면서 그렇게들 합니다. 그들이 굴욕과 모욕당하는 것에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에는 답이 없습니다. 사울이 이방인을 다시 본 것은 굉장한 도전입니다. 스데반의 죽음 현장에 있었고 그의 죽음으로 쾌감을 느꼈던 사울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방인을 다시 보기 위해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고 살펴봐야 합니다. 모욕과 굴욕과 배제와 낙인을 바라던 마음이 사랑과 환대의 마음으로 변해야 합니다.

사랑과 환대의 마음이 너(이방인, 타자)를 다시 보게 하는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환대가 쉽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을 깨뜨리는 것이 세상을 향한 신자들의 싸움이고 책임입니다. 이방인을 바라보는 내 눈에 변화의 넉넉함이 생길 때 이 문제는 해결됩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 같은 영적인 체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뭐든지 다시 보려고 애써 보십시오. 다시 봄이 새로운 삶을 선물할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 회심의 은혜를 겪으면서 보지 못하던 것,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되기를 기대합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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