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그럼에도(눅9:51~62)
오늘도 주님의 만져주심이 예배하는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월은 우리 교우들이 외국으로, 지방으로 또 하나님께로 가신 집사님 포함해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럼에도’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깊이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는 늘 쓰는 평범한 단어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앙적 가치를 상당히 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여러분 가슴 깊이 들어가 여러분이 위로받고 믿음의 새로운 눈이 떠지기를 바랍니다.
테레사 수녀가 일하는 곳에 붙어 있어서 -직접 쓴 글은 아닙니다- 유명해진 글이 있습니다. Anyway입니다. 일부만 발췌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럼에도 좋은 일을 하라’
참 필요하고 좋은 글입니다. 그러나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듣기 불편해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와 정반대 위치에 있는 단어는 ‘때문에’입니다. 각자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여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개의 단어 중 어떤 것이 더 넉넉한 느낌을 줍니까? ‘그럼에도’입니다.
‘때문에’라는 단어는 일의 원인과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는 까다로운 심리가 작용합니다. 인정하기보다는 부정하고자 하는 심리가 깔렸습니다. ‘너 때문에’라는 말은 사소하지만 무서운 말입니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말은 자꾸 들으면 불편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너 때문에라는 말이 정당한 때도 있습니다. 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넉넉함이 없습니다. 반면에 ‘그럼에도’는 넉넉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 단어는 신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복음적 단어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때문에’라는 단어를 사실은 더 많이 사용합니다. 죄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네 탓 하는 ‘때문에’라는 단어가 더 자연스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면 세상에서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모저모로 훨씬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문에라는 단어를 사용한 후 오는 결과는 신앙적 측면에서는 좋지 않습니다. 이런 치열한 세상을 살면서 때문에라는 단어를 아예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억지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고 우리기 때문에라는 단어 사용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때문에라는 단어는 쓸 당시는 사이다 마시듯 톡 쏘며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 시원한 감정적인 장점보다 더 나쁜 결과들이 따라옵니다. 나 자신은 더 속상해지고, 상대방은 미워집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관계만큼 소중한 것이 없는데 때문에를 자꾸 쓰다 보면 관계는 틀어지고 다툼이 생겨납니다. 때문에라는 단어는 파괴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우리가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나를 묶어버리는 구속력이 있습니다. 때문에라는 단어를 자꾸 쓰면, 분리가 일어나고 부정하는 마음이 계속 생기기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과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긍정하는 마음은 빨리 없어지지만 부정하는 마음은 오래갑니다.
그럼에도는 처음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만 일단 쓰기 시작하면 넉넉함과 그 넉넉함이 가져오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결과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언어를 만지십니다. 그 만지심은 계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럼에도의 언어를 사용한 우리는 하나님의 만지심으로 변화되어갑니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모두가 심혈을 기울여 이 그럼에도란 단어를 많이 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자라며, 영성이 깊어지며, 삶의 신선함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물 많이 받으시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본문 54~55절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이 둘은 형제입니다. 주님께서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주셨을 정도로 화끈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 야단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주님의 길을 기분 나쁘게 막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다 태워서 멸망시키겠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방해하고 기분 나쁘게 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상대를 밀어붙이고 뚫고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세상의 방식이고, 힘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모습입니다. 주님께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그런 힘의 논리를 사용할 것을 주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힘의 논리를 거부하십니다. 마치 힘이 없으셔서 피해가시듯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힘이 있으면 사용하여 상대를 무너뜨리는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를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럼에도의 실천입니다. 이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이 잘 보고 배워야 하는 귀한 모습입니다.
3명이 주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 초라하고 가진 것이 없다(58절). 그럼에도 따르겠느냐? 물으십니다. 때문에의 사고를 하고 있으면 사실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럼에도의 사고를 강조하십니다. 장례 얘기가 나옵니다. 주님을 따르라 하니 장례를 치른 후 따르겠다고 합니다. 아픈 분의 장례가 언제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모릅니다. 이것은 주님 따르기를 주저하며 핑계를 댄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장례를 못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야박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핑계 저 핑계 댑니다. ‘아직은 시간이 허락 안됩니다. 자녀가 조금만 더 크면 하겠습니다. 경제적 여건이 허락되면 하겠습니다.’등등..핑계를 대며 미룹니다. 또한, 가족과 이별 인사 후 따르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같은 이유로 거절하십니다. (62절) 주님 따름의 엄중함과 시급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를 우선시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힘과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삶은 거의 그럼에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도 말씀과 믿음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시고 그럼에도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의 모습을 배우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본받고 꼭 따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여정 중 그럼에도의 정신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일일이 시시비비 따지고 대가를 그때그때 받고자 하는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때문에는 어느 정도에서 끝내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로 빨리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살다 보면 때문에란 단어가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이것은 강한 감정입니다. 이 마음이 내 마음에 자꾸 생기면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죄인으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모두 용납하시고 받아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구원의 감사와 감격을 말합니다. 내가 지금 화내고 속상해하고 미워하고 탓하는 그가 바로 은혜받기 전의 내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2장 1~10절 말씀을 다시 봅시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그러나, 그럼에도)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10)
우리의 출발은 죄와 허물 속에 있었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은혜로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절대로 이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정도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우리의 공로도 능력도 아닙니다. 우리는 진실로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흠이 많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함께 해 주셨고 용납해 주셨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용납하면서 살고, 그럼에도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100억의 빚을 탕감받고 나와서 100만원 탕감을 매몰차게 거절한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이것은 못된 것입니다. 양심 불량입니다. 지금 내 모습을 살펴야 합니다.
그럼에도는 자연스럽게 나오기 힘든 말입니다. 그럼에도가 자연스럽게 나오려면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의 감격이 우리 안에 늘 감동과 감사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요즘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때문에의 강퍅하고 까다로운 마음입니까? 그럼에도의 넉넉한 마음입니까? 이왕이면 그럼에도의 넉넉한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혹시 때문에의 마음 중에 있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럼에도의 마음으로 돌아오셔서 충만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의 마음은 여러분을 살릴 것이고 여러분의 자녀와 가정에 큰 축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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