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2:8~13)
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2:8-13)
오늘은 성찬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위로와 은혜로 복된 성찬 주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성찬의 의미는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은 성찬의 뜻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성찬은 신앙인에게 신앙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의식입니다.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가 신성한 결혼서약을 하듯, 성찬 예식은 신앙인이 드리는 신성한 예전 의식입니다. 아주 중요한 교회의 의식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감내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주님의 고귀한 사랑의 몸을 받게 됩니다. 주님도 첫 번째 성찬을 베푸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잊지 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다가오는 세대에게 전하라는 주님의 당부입니다. 사람은 망각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더 당부하셨을 것입니다. 잊지 않으려면 반복해서 되새기고, 그 행위 속에 담긴 정신(진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 예식의 의미를 기억하지 못하면 십자가 사건도 희미해지고 차츰 잊혀 질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품는 능력입니다. 과거를 기억을 통해 불러올 수 있고, 미래를 상상을 통해 불러올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가능한 신비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현재만 산다면 우리의 삶은 동물적인 삶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과 상상으로 우리는 과거를 불러오고, 미래를 불러옵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이 시간에 이 과거와 미래 모두를 불러내어 다 담아낼 수 있습니다. 과거를 불러낼 때 잘 불러내야 할 것입니다. 안 좋은 과거만 기억하고 불러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상처와 아픔만 남게 될 것입니다. 또한 미래를 상상으로 불러올 때, 걱정만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잘 불러내야 현재가 풍성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잘못된 부름은 오히려 현재의 나의 삶을 망가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과 상상은 정화가 필요합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아픈 과거의 상처를 정화하여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과거의 수많은 기억들 중 좋은 기억들을 자꾸 불러내고, 좋은 미래를 상상함이 우리의 현재를 잘 뒷받침해 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두 축 ‘기억’과 ‘상상’을 ‘믿음’이라는 필터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정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과거는 회복되고 미래는 소망으로 맞을 수 있게 됩니다. 이 믿음이라는 필터로 기억과 상상을 정화하셔서 복된 현재의 삶을 사시기를 축복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것을 믿음이라는 필터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합니다. ‘기억하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과거를 기억하되 예수그리스도를 반드시 기억하면서 살아가라고 조언합니다.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2:8, 개역한글) 신앙인의 삶 속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숙제를 주신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당부한 이 말씀들이 우리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내 안에 은혜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수많은 과거의 기억 중에 나를 매는 기억은 무엇입니까? 상처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적 능력과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하신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필터로 걸러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을 기억하라는 이 권면이 우리의 삶에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과거에 상처 준 사람, 실패의 아픈 기억들 모두 걸러 내십시오.
우리의 신앙의 삶이란 내가 구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끊임없이 회상하고 기억하며, 따르고자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구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기억 없이, 과거의 상처, 실패한 아픈 기억들만 갖고 산다면, 우리의 내면에는 주님이 차지하실 곳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 엄청난 사랑과 깊은 믿음과 통 크신 용서의 삶을 기억하십시오. 그 주님의 삶을 내가 배우고 닮아 가고자 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 주님에 대한 기억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나를 우상화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행동과 판단과 결정의 밑바탕에, 일거수일투족 다 살아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늘 생각하며 판단하고 결정하며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어린아이와 같아집니다. 늘 주님 뜻을 물으며 따라가는 어린아이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나’라는 자아는 없습니다. 내 안에는 온전히 주님만이 계십니다. 이렇게 주님에 대한 모든 생각과 감각은 무의식의 세계까지 남아 있어야 합니다. 온전히 체득되어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사복음 서가 자세히 기록되고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배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백지상태에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복음 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삶을 잘 배우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꼭 기억하라고 하신 성찬 예식은 그 의미를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찬은 주님의 구원과 영원한 부활 후의 영생의 생명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의미와 다시 오실 주님 재림의 의미를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상과 기억과 오감으로 십자가 희생과 부활의 구원사건을 이 성찬 예식을 통해 불러내고 감사하는 예식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현재) 주의 죽으심을(과거) 오실 때까지(미래)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현재 성찬의 사건 속에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 있다고 하는 놀라운 말씀을 주님은 하십니다. 지금 현재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는 과거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면서, 미래에 오실 주님을 상상하며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찬은 대단히 중요한 예식입니다. 이 성찬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신비한 은총의 시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미래에 다시 오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영으로 임재하시는 시간입니다. 무의미하게 참여하지 않고 성찬을 사모하는 주의 백성에게 주님은 과거와 미래의 주님으로 우리에게 이 시간 오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오심으로 성찬 예식에 참여한 사모하는 진실한 영혼들은 치유의 은총을 입게 됩니다. 회복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개역한글) 이 말씀은 우리만 아는 신비한 비밀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느껴볼 수도 없는 말씀입니다.
성찬 때 받는 주님의 몸은 한가지 몸이 아닙니다. 세 개의 몸입니다. 즉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같은 육체로 사시다 가신 몸과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고통과 고난을 겪으신 비참한 몸과 부활하신 영광의 몸입니다. 이 땅에 사셨던 주님은 모든 이들을(특히 약자들을) 사랑하셨고 끝까지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셨으며 쉼 없이 기도하시는 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만신창이의 고난의 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영광의 몸입니다. 승리의 몸입니다. 영생의 몸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찢기시고 만신창이 되신 고난의 몸뿐 아니라, 성육신하신 몸, 영생의 부활하신 몸 모두를 받는 것입니다. 죽음의 몸과 더불어 부활하신 몸을 동시에 받기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지만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영생의 몸을 받게 됩니다. 성찬을 받는 성도의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거하시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개역한글) 그리스도인의 몸은 우리 자신의 몸이 아닙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음행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만 잘 지켜 행해도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훨씬 더 거룩해질 것입니다. 본인인 나 자신이 잘못 느껴도 내 몸은 거룩한 성전입니다.
오늘 성찬에 사용되는 빵과 잔은 정말 보잘것없는 빵과 잔입니다. 주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빵과 잔을 주님의 몸과 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하찮은 빵과 잔이 주님의 몸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찬을 받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과거와 미래의 주님을 만나며 현재의 내가 구원과 치유와 회복에 이르게 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의 중요성을 절대 소홀히 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찬의 외적으로 보이는 형식은 물리적이고 유물론적입니다. 그러나 성찬의 신비는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과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사건입니다. 몸과 피라고 하는 상징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과 접촉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7, 개역한글) 오늘 성찬식에 이 말씀을 믿고 주님의 몸과 피로 치유의 큰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왕 노릇’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성찬을 받는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입니다. 왕 노릇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 매여서 끌려다니며 사는 상황이 아니고, 삶을 오히려 끌고 가는(상황을 극복하여) 영광스러운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찬을 잘 받으시고 왕 노릇 하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이 땅의 남은 삶도 왕 노릇하면서 사시고, 죽은 후 부활의 삶도 왕 노릇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찬의 빵과 잔을 받을 때 ‘몇백 년 된 산삼보다 귀한 것이다’하는 마음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는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주의 힘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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