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13. 주일설교: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요11:49-53).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 (요11:49~53)

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11:49-53, 개역한글)

오늘은 지난번 살피던 말씀을 잠시 미루고 이 땅의 현실을 보면서 국민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하는지 함께 보겠습니다.

국민으로서의 참담한 마음은 누구나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국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국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균형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만을 주장하면 현실감이 떨어지고, 이 세상 국민으로서의 삶에만 몰두하면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지녀야 할 내면 깊은 곳의 자아의 죄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자의 깊이 있는 삶이 왜곡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한 꿰뚫어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세상이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묵시(默示)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계시를 꿰뚫어 보는 것이 묵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반드시 묵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묵시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이 땅에 선포하고, 외치는 사명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영이 맑고 민감하여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과 뜻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삶 속에서, 세상 백성으로서의 삶과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삶의 균형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애씀으로 영적 감수성을 키워야 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어렵고 혼란스러울 때마다 묵시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이 어려운 시기 우리는 더 영적으로 민감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대언하는 묵시의 예언자적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요즘 우리들의 마음은 다 비슷할 것입니다. 다 형평과 처지에 따라 여러 걱정과 생각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해법이 아닙니다. 작은 교회 목사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말씀을 강하게 선포하는 것에 대해 자격지심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이 나라 문제에 대해서는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신앙적 차원과 영적 차원에서 고찰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에 오늘 그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왜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부인하고 싶어도 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 객관적인 거의 모든 일의 그 근본 배후에는 우리가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부인하고 화내시겠습니까?

오늘 깊은 성찰의 기독교 사상가이며, 인문학자로 살다 많은 영향력을 우리에게 끼치고 세상을 떠난 르네 지나르(Rene Ginard:1923~2015)의 이 세상 사회에 던지는 깊이 있는 예리한 분석을 같이 보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나르의 사상 중 두 가지 중요한 성찰이 있습니다.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 만들기’입니다. 먼저 모방적 본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욕망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고, 이루어 보고 싶은 것이 욕망입니다.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남이 소유하고 있을 때, 그 남의 것을 갖고 싶은 탐내는 욕망이 뿌리 깊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 욕망이 내 속에서 끓어 오르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모방적 욕망입니다.

문제는 이 모방욕망이 내 안에 생겨 끓어 오를 때 이 욕망은 동시에 내 주위에 빠르게 확산하여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다 가지고 싶어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돈에 대한 모방욕망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지금 내가 못 가진 것을 타자가 갖고 있는 것을 볼 때 내 맘은 절대 편치 않습니다. 또한, 지위 (position)에 대한 욕망이 상당히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못 가진 자는 상당한 콤플렉스를 기지개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위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당합니다. 권력에 대한 모방욕망도 대단합니다. 권력의 단맛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듭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게 되면 모든 일 처리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가가 아니기에 지금 그들을 맘 놓고 비난하지만,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떨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람들의 모방본능은 가벼이 봐서는 안 됩니다. 돈과 지위와 권력이 주는 삶의 편리성과 즐거움은 기대 이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제로 그러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갖고자( 욕망을 더 갖고 더 소유하기 위해 ) 달려갑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욕망은 무한대지만 욕망의 대상 (가질 수 있는 것)은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빼앗고 빼앗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 이미 가진것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씁니다. 욕망을 다 채우고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내 안에는 다 채워지지 못한 욕망으로 넘쳐납니다. 그래서 늘 속상합니다. 내가 못 가진 것을 상대방이 갖고 있을 때 속상합니다.

이 수많은 속상함이 내 내면에 숨겨져 있습니다. 내 안에는 불만과 갈등이 쌓여갑니다. 나와 너 사이의 갈등, 사회 전체를 향한 갈등으로 번져갑니다. 욕망으로 갈등하며 채워지지 못하는 불만으로 병들어 가는 사회가 됩니다. 이것의 결말은 무섭습니다. 불만과 갈등은 절대로 그냥 끝나지 않습니다. 쌓이고 쌓여 한계점(임계점)에 도달하면 폭발합니다. 폭발을 촉발하는 것은 어떤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폭력이 수반됩니다. 지나르는 역사를 통해 이 모방적 욕망으로 인한 사회붕괴 과정을 하나하나 논증하며 보여줍니다.

혁명은 정치적 야망, 야심 세력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밑바닥에는 사회의 갈등과 불만과 분노가 깔렸습니다. 그것이 해결 안된 채 쌓이고 쌓이다가 임계점에 도달하여 폭발하는 것 중 하나가 혁명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며 해결하려 하면 안 됩니다. 정치인들은 이것을 교묘히 이용합니다. 정치공학적 이론에 일반대중들은 쉽게 이용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맹목적으로 끌려가며 이용당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 안에 들끓는 분노를 교묘히 이용하려는 정치가들은 이제는 더는 설 자리가 없게 해야 합니다. 국민의 아픔을 감싸고 끌어 안아주며 국민의 신실한 일꾼 정치인들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이 혼란의 시대, 해안을 가진 묵시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안됩니다. 깊은 생각과 사고와 하나님께 향한 진실한 열정만이 우리를 그 자리로 이끕니다.

지나르의 이론은 상당히 검증된 이론입니다. 이런 논리는 사회 전반적인 현상뿐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삶의 상황도 설명될 수 있음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이번 일로 우리는 상당히 속상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사건으로 접근하지 마시고, 욕망의 차원에서 접근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공평과 공의와 사회정의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다일까요? 여기엔 좀 더 뿌리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만 처벌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한, 무의식속의 밑바닥에 자리 잡은 모방욕망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는 한, 우리도 일반 국민과 똑같은 수준으로 분노하고 해결하는 것으로 끝내게 됩니다.

실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밑바닥에서 들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것, 탐하는 것들을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다 누렸습니다. 돈, 자녀 대학입학 문제, 권력, 이 모든 문제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우리가 모두 다 욕망하는 것들입니다. 없어서 그렇지, 우리도 기회가 되어 그 자리에 있게 되면, 과연 우리는 과감히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뿌리칠 수 있을까요? 자녀를 그 명문대학으로 선망의 대상인 이대에 쉽게 입학시키고, 대기업에 돈을 요구하여 큰 액수들을 받아내고, 친척은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공무원 자리에 앉혔습니다.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고 그야말로 마음대로 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세상의 정의는 욕망의 공평한 분배입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일하며 근근이 사는 서민들에게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실로 분노하고 폭발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이 사회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사회는 늘 파국을 맞아 몰락했습니다. 역사는 그 사회의 종국은 전쟁과 폭동으로 인한 멸망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사회가 망해버리면 이미 욕망할 구성원도 사라지고, 욕망할 모든 것이 붕괴하므로 사람들은 현명(?)하게 붕괴를 피할 수단을 마련합니다. 그것이 바로 희생양입니다. 모든 원인을 짊어지고 희생시킬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양에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는 것으로 문제를 종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수많은 역사 속에서 이 희생양 제도를 이용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가정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 당신 때문이야.’ 하며 책임을 전가해 버립니다. 사회 속에서도 같습니다. 그 사람 한사람만의 문제가 아님에도, 그 사회 모두가 같이 죽어야 하는 공범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양을 만들어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절대로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사실 희생양을 만드는 경우가 욕망의 문제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 원인으로 희생양을 만듭니다.

이 희생양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은 상당히 위험한 방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사회는 점점 더 퇴화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 속의 욕망의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고, 손쉽게 죄를 모조리 뒤집어씌울 수 있는 대상(희생양)으로 모든 초점을 향하게 됨으로써 나 자신의 근본문제를 돌아보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회피하게 하는 난센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너 정도는 아니다’는 식으로 자신에게 면죄부를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삼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이 욕망하던 것들이 나타남을 봅니다. 명성, 삶의 정당함, 능력 등입니다. 그들의 모방본능이 들끓습니다. 그리고 그냥 두면 자신들이 위험에 처하게 됨을 직감합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0절 새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한사람이 죽는 것이 사회파국으로 민족 전체가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진실은 유대인들이 가진 욕망 때문에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아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지나르는 이 장면을 상당히 중요하게 봅니다. 그리고 ‘희생양 제도’의 위험성을 보여 줍니다.’ 희생양제도’는 해결을 쉽게 하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진짜 해결은 아닙니다. 밑바닥에 깔린 그 깊은 문제를 해결안하고, ‘다 당신 책임이야!’하고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무책임합니다. 근본 해결책이 아니기에, 하나의 희생양 뒤에 또 다른 희생양을 계속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이용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불행한 사회입니다. 희생양 한 번으로 사회의 정의와 공의가 다 회복되는 사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재한 문제가 해결 안 되면 하나의 해결책은 새로운 비극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욕망하는 본인의 모습을 올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욕망하지 않고자 각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욕망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내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내 삶을 변화시키는 노력 없이 사회 속에서 희생양만 찾고자 하는 방법으로는 이 사회의 불행은 끝이 안 보입니다. 우리 사회 속에 있는 무의식적인 욕망에 대한 치료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에게 희망은 안 보입니다.

예언자들은 ‘정의와 공의’를 선포할 때 사람들의 죄성을 치열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지나르의 이론은 깊이 볼수록 많은 것들을 보게 해 줍니다. 그러나 모든 희생양이 예수님과 같은 희생양은 아닙니다. 그 속에는 진짜로 불의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내 삶 속에서 당신 때문이야 하는 희생양이 만들어질 때 우리는 동시에 내 안에 도사린 끊임없는 욕망의 죄성 또한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이 불행한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꼭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1.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욕망도 잘 보아야 합니다. 남의 죄를 바라보기 전에 꼭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치열한 신자로서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욕망과 싸우고, 치유하여야 합니다. 치유하지 못하면 삶이 피폐해지고 왜곡되어 자칫 잘못하면 신앙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 땅 가운데 일어나는 불의와 수많은 죄악을 보면서 분노하면서도, 내 안의 죄성에 대해 더 많이 분노해야 하고, 더 정의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입니다.

이번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만든 일등공신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백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트럼프는 당선 후 직접 그들을 찾아가 인사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백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런저런 욕망을 해결해줄 대통령이 트럼프일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 수많은 성적인 스캔들과 막말과 수많은 추문을 가진 인물을……. 욕망의 실현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선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 앞에 정화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2.희생양 방식의 삶이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희생양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희생양의 욕망을 주님은 부활로써 끊어버리셨습니다. 우리는 갈 길이 멀지만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역사에 더 이상의 희생양은 없도록,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도록,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주일 아침 우리는 모두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우리가 욕망으로 넘어지지 않고 사회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기를 위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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