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6. 주일설교: 믿음 2. 믿음 더욱 굳세게 (요3:16). 양은익 목사


말씀: 믿음2, 믿음 더욱 굳세게(요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3:16, 새번역)

11월 첫 주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이 무겁습니다. 우리 민족의 내일에는 오늘 같은 일들이 없도록 모두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길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믿음에 대한 두번째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통해 멸망, 하나님 사랑, 믿음, 영생에 대한 주제중 믿음의 두 번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신비로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 이 말씀은 구체화되가고, 이 말씀이 진실이며 지금 현재에도 살아있는 구원의 말씀임을 우리는 압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반응’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결단을 요구하는 요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인간의 본질, 예수그리스도의 정체, 삶의 종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듣고 반응하며 선택해야 하는 문제만이 남아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복잡한 문제에 들어가기 거부하며, 내가 필요한 정도의 마음의 안정과 심리적 위안을 얻고자 신앙생활을 합니다. 또한, 누릴수 있는 축복만을 바라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요즘 시대는 하나님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은 세상입니다. 믿음생활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사라져 갑니다.

많은 분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로 ‘하나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신앙의 본질은 불확실함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확실성을 담보로 하지 않기에 믿음이라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확실한 사실에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확실한 객관적 실체로 증명할 수 있다면 왜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인정하면 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과학으로 논증으로 입증하고 증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뭔가 확실하지 않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확실치 않기에 ‘믿음’이라는 마음의 작용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신비하게도 사람에게는 불확실한데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이 믿음이라는 마음의 작용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바로 앞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미래는 우리에게 불안감을 가져다줍니다.

엄마가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는 것도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우리 아이가 길 가다가 교통사고 나지 않을까? 낯선 사람에게 납치되는 것은 아닐까? 등등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걱정으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맨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일정 부분을 믿고 수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듯 삶 자체가 믿음과 수용의 과정으로 이루어지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터무니 없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은 신앙영역의 특수 상황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온 삶에 필요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11:1, 새번역)’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11:6, 새번역)’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을 얘기할때 확실한 것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것은 없습니다. 불확실하기에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되 대충대충 믿는 삶의 자세는 꼭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믿음의 최고봉은 아브라함입니다. 믿을수 없는 상황에서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4:18, 개역한글)’

확실한 것을 경험한 후 믿는다함은 모순입니다 이미 믿음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증명할 수 없는 존재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이 증명할 수 없는 불확실한 하나님이 나중에 진실로 판명되어야 합니다. 진실로 판명될 때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파스칼(수학자)의 내기 (Pascal,s Wager)는 유명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이 존재하면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설사,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안는다 해도 우리는 손해 볼 것 없다.’ 파스칼의 논리는 믿어서 진짜면 엄청 이득을 볼 것이고, 가짜면 손해 볼것이 없으니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으로 정의할 수도,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고체계의 틀 속에 가둬둘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분이기에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스 큉은 하나님은 ‘사람이 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라 하였고, 유영모는 하나님은 ‘없이 계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분입니다. 믿음으로만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에게나 예외가 없습니다. 믿음에는 씨앗이 있습니다. 이 씨는 이미 뿌려졌습니다. 우리안에서 이 믿음의 씨앗이 겸손하게 활짝 피어나기를 고대해봅니다.

야나기 무네오시 (1899~1961)는 일본사람으로 한국의 현실을 마음 아파하며 활동한 미술 평론가입니다. 그의 유명한 말입니다. ‘힘 있는 자는 자기 안에서 살고, 즐거운 자는 자연 안에서 살지만, 슬퍼하는 자는 오직 신 안에서 산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마음 안에 존재의 슬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정하는 마음과 존재의 고독을 느끼는 사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을 찾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응답의 문제가 있습니다. 어중간해서는 안 됩니다. 확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당신은 믿습니까? 하는 질문에 ‘나는 믿습니다’라고 확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내인생의 아픔과 슬픔,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전 인생을 걸고 하나님을 믿겠습니다’하는 다짐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응답이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일어나야 합니다.

정말 이 시대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행한 시대입니다. 사람도 못 믿고, 끊임없이 체크하고 감시해야 합니다. 가족끼리도 감시합니다. 성도들은 교회를 믿지 못합니다. 목사도 믿지 못합니다. 너무나 믿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사람을 못 믿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교회를 이사 와서 정할 때도 정말 많이 다녀보고 신중히 처리합니다. 그만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불신하고 믿지 못하는 것은 삶의 중심과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심 많고 꼼꼼해서 그렇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신의 현재 유산은 십자가 밑에서 주님을 배신한 제자들의 어두운 그림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신문칼럼에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의 류석춘 교수의 글이 실렸습니다. 류 교수는 지금 대통령과 관련된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에 초점을 두고 비판합니다. 한때 대통령을 모시며 좋은 것을 다 차지했던 그들이 나 몰라라 침묵하는 이 배신의 모습에 주목한 겁니다. 어땠든지 ‘내 책임입니다’하며 나서서 죽기를 각오하고 책임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의란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믿음 없는 시대, 배신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몇 해 전에는 모든 책임이 ‘노무현 때문’이라고 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또 누가 그 바통을 받을지 모릅니다.

불신과 의심이 일상화되고 증폭된 이 사회에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가치를 품고, 세상을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대해 절대로 낙관하거나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끝없이 신실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해야 합니다. 불신과 배신의 시대에 나 또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19세기 후반 영국 성공회 목사였던 존 라일(John Ryle, 1816~1900)은 저서(Practical Religion)에서 우리 믿음과 관련된 10가지의 통렬한 질문을 합니다.

1.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진중한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혹시 우리가 어려움에 부닥치는 상황-가족이 중병에 걸리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심각한 고난에 처할때-이 올 때만 잠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하는 일이 있습니까?
‘마치 호기심 많은 사람이 무슨 구경거리를 보러 오듯이 너에게 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이다’(겔33:31, 새번역). 설교 잘하는 목사님의 설교만 찾아다니고 내면의 변화나 순종의 삶은 전혀 없이 내 뜻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까?

3. 여러분은 형식적인 신앙으로 자신의 양심을 누그러 뜨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신앙의 겉모습만 있고 내면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신앙생활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선무당이 사람 잡듯 사람을 잡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믿음에 형식만 남으면 타협하며 살게 됩니다. 믿음의 내면이 없기에 은혜가 없고 만족이 없으며 아직도 내 자아가 하나님을 우선하는 상태입니다. 진실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절실해야만 합니다.

절실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 삶의 중심이 하나님입니다. 내 자아는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져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양도된 상태입니다. 신앙은 교회 오는 행위로 몸만 이동하면 안 됩니다. 내 마음이 이동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변하고, 나의 태도가 변하고, 나의 사고의 틀이 전부 변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익숙함이란 경계해야 합니다. 신앙은 절실해야 합니다.

둘째, 믿음이 성장합니다. 믿음도 가만히 있으면 썩게 됩니다. 믿음도 움직여야 합니다. 5년 전 믿음과 현재의 믿음이 한결같다면 어떡합니까? 믿음은 움직여서 자라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개역한글)’ 이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믿음도 날로 날로 성장하여 굳세지기 바랍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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