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신경림 시인의 산문집 중’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책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책 제목입니다. 부족하고 어리숙한 사람들일수록 나를 내세우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기에 흥겹다는 뜻일 겁니다 귀한 주일 여러분들도 서로 흥겨움의 교제 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잘났다고 할 때는 교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주부터 보고 있는 3장 16절의 짧은 말씀에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가 나옵니다. 멸망/하나님의 사랑 / 믿음/ 영생에 대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오늘 멸망에 관한 두 번째 말씀을 준비해서 전하려 했으나, 그 말씀은 추후 서서히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나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이 더 심각합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관용구처럼 되어 너무 흔하게 사용되어, 감동이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한없는 관심. 멸망할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열심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기적이며 은혜의 사건입니다.
사랑은 두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는 필요로서의 사랑(Need Love) 입니다. 내가 필요하니까 사랑하고 좋아하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결핍의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결핍이 있기에 필요한 게 있게 됩니다. 돈이 필요하니까 돈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선물로서의 사랑(Gift love)입니다. 이 사랑은 다분히 순애보 적이며 이타적입니다. 최근 뉴스에 나온 화재사건 기억하실겁니다. 청년은 집집이 뛰어다니며 초인종을 누르며 불이 났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연기에 질식해서 화재현장에서 사망합니다.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이 사랑은 선물로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시기에 필요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로 다가오셔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사랑에 대해 감을 잘 못 잡습니다. 그 사랑의 그림자만 밟아도 우리는 그 위대한 사랑으로 인해 정말로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져있는 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뜨거운 사랑으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죄를 대속하시려 십자가를 지시는 파격적인 사랑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물로서의 사랑이시며, 나의 공로와 상관없는 사랑이시며, 우리가 부족하기에 쏟아 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의미를 희미하게라도 깨닫고 내 가슴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더 풍성히 느끼게 될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말씀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수많은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시다’라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8)’
하나님은 그 엄청난 사랑의 깊이 만큼 엄청난 분노도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은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격상시키실 뿐만 아니라, 죄인인 우리가 감히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 모든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며 은혜입니다.
성경에 못 들어갔으나 남겨진 문서들을 외경이라 합니다. 외경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죽은 개의 시체에서 냄새가 진동하고,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악취와 더러움에 피하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조용히 개에게 다가가 살피시고 ‘이 개는 아름다운 흰 이빨을 가졌군.’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은 같은 형상을 각자 다 다르게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최악의 상황에 놓인 개의 시체 앞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찬가지로 죄인 된 우리에게서 아름다운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아…. 우리가 조금이라도 그 사랑을 알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에 눈뜨는 날 우리는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 엄청난 사랑을 받는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 깊은 사랑 속으로 들어가며 나는 굉장한 변화를 겪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원수 5:10)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원수 된 우리, 죄 중에 빠져있던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직접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실로 감격스럽습니다. 나를 위해 직접 돌아가심으로 내 죗값을 사해주신 하나님의 사랑. 내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구약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냄새나는 존재로 표현합니다. 초등학교 에서 시험을 봤는데 문제는 ‘ 왜 엄마 아빠는 우리를 사랑할까요?’ 정답은 ‘그러게 말입니다’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토록 사랑하십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짝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짝사랑은 너무나도 깊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알아주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하나님 사랑의 감도 못 잡고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연애할때 사랑하고 알면 모든 것이 변하듯이, 신앙생활을 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나를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인도합니다.
이 사랑은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험입니다. 하나님은 내 이성만으로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나에게 십자가의 사랑이 선명하게 다가와 나의 죄인 됨과 그 구속하신 크신 사랑과 은혜에 내가 감격과 감사의 무릎 꿇는 순간들이 옵니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가슴으로 그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며, 본질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나를 위해 피 흘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렘브란트는 1655년 ‘도살된 소’란 작품을 그렸습니다. 루블로 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달린 소의 형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형상입니다. 램브란트는 주님의 십자가를 체험한 화가임이 분명합니다. 영국 철학자 베이컨 (1561~1626)은 얘기합니다. ‘정육점에 갈 때마다 짐승 대신에 내가 거기에 걸려 있지 않음을 알고는 놀란다. 예수 대신에 거기에 걸려 있어야 하는 고깃덩어리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예수가 있다는 것이 바로 대속의 사랑이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예수가 달린 것이다.’
도살된 소가 푸줏간에 걸려있는 모습에서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발견하고, 푸줏간을 갈 때마다 고깃덩이에 불과한 죄인의 모습과 그 죄를 대속하신 주님 십자가를 기억하는 이분들의 영성에 감탄할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직도 그 희생과 사랑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정육점 고깃덩이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 사랑에 대해 너무 많이 들어서 싫증이 납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적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찬송가 304장)
여러분은 사랑을 잘하십니까? 사랑을 잘 못 해서 창피합니까? 이 질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유능해야 합니다. 사랑하긴 하는데, 서로를 목조르는 사람죽이는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최승호, 오징어3)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힘들게 하는 집착적인 안타까운 사랑들을 합니다. 내 사랑의 기준으로 재단하며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에 무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본질적인 사랑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사랑은 잘받아본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을 진실하게 받아본 사람들이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부부들이 갈등하고, 쉽게 헤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필요로서의 사랑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숭고한 사랑을 제대로 체험할 때 우리의 부족하고 구멍 난 사랑이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나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사랑을 알게된 사람들은 십자가 사랑에 젖어 인격과 성품과 삶의 자세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할 때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옵니까?
1.나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얘기합니다.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이 세상이 사랑할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듯이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집단적 사랑이 아니고, 개별적인 사랑입니다. 선한의미의 긍지와 자부심이 생깁니다. 함부로 살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기혐오는 금물입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그것은 큰 죄입니다. 나의 부족한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나도 그 크신 사랑받는 자녀답게,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당히 지내야 하며, 넉넉하게 베풀어야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며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 안 됩니다.
2.사랑의 확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알게 되면, 내리사랑이 일어납니다. 내리사랑이란 내가 받은 사랑을 그대로 내려보내는 것입니다. 그 혜택은 그대로 고스란히 내 가족과 이웃에게 갑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아들 중에 프랭클린 그래함이 있습니다. 지금 목회하고 계십니다. 프랭클린은 20대에 집 밖을 떠도는 삶을 살았습니다. 할리 데이비드슨 오토바이를 타고, 턱수염을 기르고, 가죽안내인 재킷을 입고 가죽장화를 신고 오토바이 타는 생활을 즐기다가 돈이 떨어졌습니다. 용돈을 타러 집으로 옵니다. 아버님의 서재를 활짝 열어 재낍니다. 그 시간 그 장소에는 목사님이 스텝들과 중요한 미팅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짝을 확 열자 모두 놀랐지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그 순간 엄청나게 반가이 아들을 맞이하면서 프랭클린을 사람들에게 소개합니다. ‘제 아들, 프랭클린입니다.’ 나중에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끝없는 인정과 사랑이 나를 붙잡아 준 힘이었다’고 썼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부족한 나의 모습,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나의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고 사랑해주신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부족한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부모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면 자녀가 살아나게 됨’을 보게 됩니다. 이 시대 자녀들은 순식간에 나쁜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부모 된 우리는 죄인 된 내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받은 사랑의 감사와 감격을 내 자녀에게 내리사랑으로 주어야 합니다. 이 사랑만이 우리 자녀에게 생명줄이 되어 그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도와줘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 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것이 우리가 물려줄 영적 자산입니다.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자녀의 삶에 일어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함을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늘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눈뜬다는 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줍니다. 한없이 낮아지고 비워진 나는 그 무한한 사랑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랑받음으로 변화된 나는 또 내 가족과 이웃에게 이 벅찬 사랑을 전파하는 사랑의 전령이 됩니다. 모두 사랑을 능숙하게 하는 축복이 임하기 바랍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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