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16. 주일설교: 멸망치 않으려면(요3:16). 양은익 목사.

20161016

멸망치 않으려면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오늘도 함께 하시는 복된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하는 주일 되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장 말씀 보고 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뉴스에 노벨문학상 수상 자가 발표되었습니다 뜻밖에 팝가수인 밥 딜런이 수상자로 발표되었습니다. 밥 딜런은 인권 가수이고 저항 가수입니다. 그의 수많은 히트곡 중 ‘Knockin’ on Heaven’s door 가사중 일부입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상은 어두워지고 있어요.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어두우니까 우리 모두 천국 문을 두드려 구원의 길을 찾자는 노래입니다. Knock,knock. kockin’  on Heaven’s door.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으니 세상에 빠지지 말고 천국 문을 두드리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는 전쟁과 히피 문화로 시끄러울 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주님은 계속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고집도 세고 자존심도 커서 웬만해서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주님의 내 마음 문의 두드림과 나의 하늘 문의 두드림이 있을 때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하늘문이 열리면 화해와 용서가 있는 천국의 삶이 지금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갈등 많고 미움 많은 삶에서 바라는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부조리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부조리하고 죄 많은 세상 살면서 천국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지난주까지 니고데모와의 만남을 말씀드렸습니다. 요한사도는 그말씀후 오늘 본문 말씀을 짧게 배치했습니다. 이 말씀은 비록 짧지만, 기독교신앙의 가장 핵심적이며 보석 보화와 같은 말씀입니다. 1달 정도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3장 16절 말씀을 함께 보시면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3장 16절에는 4개의 핵심단어가 나옵니다. 멸망/하나님의 사랑/믿음/영생입니다.

‘멸망’: 멸망이라는 이 우주에 올 사건 때문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기독교신앙의 핵심 단어입니다. ‘하나님 사랑’ :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 (답)은 주님의 십자가 희생의 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정말로 사랑하셔서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시키고자 하셨기에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며 인류의 멸망을 막는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는 살길이 열렸습니다.

‘믿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준비하셨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왜 내가 믿어야 하는지? 근본 진리에 대한 이유와 동기와 믿음이 있어야 진짜 모습의 신앙의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생’: 주께서 마련하신 이 모든 것을 믿고 수용하며 따를 때
선물로 주시는 것이 영생입니다.

기독교신앙을 단순히 취급하면 안 되는 핵심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앞으로 살펴볼 이 4가지 주제가 우리 신앙의 핵심적 주제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놀라운 은혜의 능력이 있기에 이 네 가지 핵심주제 중 한가지라도 우리의 마음속 깊이 울림을 주고 ,우리가 깊이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멸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고난의 피를 흘리신 이유는 멸망을 피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내가 그 사건을 거부하면(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의 엄청난 십자가 사건을 거부하면, 믿지 않으면) 멸망이 내 안에 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부담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은총, 축복, 은혜 등의 듣기 좋은 이야기들입니다. 심판, 멸망, 지옥은 다 하나의 set 이야기입니다. 모두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는 지금의 교회들은 굉장히 조심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구원, 심판, 죄 등의 신앙 언어들은 신앙체계가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배타적인 신앙적 언어들입니다. 함부로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꺼내면 사람들을 오히려 신앙에서 멀어지게 할수 있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교인들이 던지는 신앙적인 언어들에 너무 많이 지쳐있습니다.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심판과 지옥과 불을 얘기합니다. 내 삶이 그들에게 뭔가 다르게 보여 주는 것 없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면서 외치는 심판, 지옥, 멸망에 대한 외침은 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공허한 소음소리일 뿐입니다.

자, 가정해봅시다. 2명이 있습니다. 한 명은 교회는 다니는데 나쁜 것은 다 합니다. 또 한 명은 교회는 다니지 않는데 착하고 올곧습니다. 제삼자 입장에서 오늘 이야기 심판, 멸망, 지옥 얘기를 교회다니는 나쁜사람이 한다고 가정해보면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다들 콧방귀를 뀔것입니다. 내 신앙의 모습이 주님께 올바로 순종하는 구원받은 뭔가 다른 모습이 내게 없으면, 내게는 하나님을 증명하고 그들을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힘이 없습니다.

평생 못되게 살다가 죽는순간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십자가의 강도처럼 천국가고, 평생 착하게 살았어도 예수님 믿는다는 고백 안 하고 죽으면 지옥 간다고 하는 얘기는 일반 세상 사람들 관점에서는 너무 말이 안 되고 불공평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진실이고 공평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의 죄성속에 살았던 것이 죄 중에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진실은 거듭나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심판, 멸망, 지옥을 말할 때, 우리는 쉽게 툭 던지는 얘기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내 삶이 그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의 성도의 진실한 삶을 살면서 진심을 담아 그 얘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본문 말씀의 빙점은 멸망이 아닌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재판관, 심판관이시지만, 그 깊은 중심에는 멸망 아닌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뜨거운 사랑의 마음(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 피 흘림을 당하게까지 하시는)이 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구원시키고자 하십니다. ‘천국에는 정원이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입니다. 그가 지은 죄가 도덕적인 죄든지 죄든지, 영적인 죄든지 어떤 죄든지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다 구원시켜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형수도? 하면서요. 답은 각자 끈질기게 묻고 하나님의 그 깊으신 뜻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멸망이 목적이 아니시기에 구원시키고자 다 수용하십니다. 이 구원의 강력한 의지가 예수님 십자가 피 흘림 사건에 명확히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건은 배타적, 폐쇄적인 구원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픈(open)되어 있습니다. 내가 살면서 짖는 수많은 죄악…하나님은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길도 오픈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면 다 끌어 안아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이 큰 사랑의 은혜를 받고 빚진 자 들입니다. 우리는 내 가족과 내 이웃이 멸망의 길로 가지 않토록 안타까움과 큰사랑과 긴박감을 갖고 그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성경은 멸망이 멀고 먼 가상의 현실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리얼리티 (reality)를 갖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는 심판과 지옥이야기가 정말 많습니다. 주님 비유의 2/3가 부활과 심판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관심은 심판과 구원에 쏠려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믿었지만 순종하지 아니하면, 영생을 선물로 못 받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1:8-9) ‘지옥은 무엇입니까? 지옥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것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삶은 현재의 삶도 이미 지옥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죽어서도 (내세에서도) 지옥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하나님 뜻대로 안살고 내뜻대로 사는 삶은 이미 심판과 멸망에 이른 삶입니다. 로마서말씀에 내버려 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하나님이 내버려 두는 삶, 이것이 바로 심판받은 삶입니다. 죄를 지었는데 벌을 안 받았다고 좋아하지 마십시오. 내버려 두시는 것이 벌써 심판입니다.

지옥이라는 심판의 현실을 이야기하십니다. 심판의 현실을 믿고 주님을 믿고 따르라 하십니다. 이것은 협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간절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듣지도 믿지도 따르지도 않습니다. 내 안에는 나의 죄를 지적할 때, 거부하고자 하는 뿌리 깊은 자존심, 강력한 자아가 내내면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신성)을 믿으려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는 뿌리 깊어서 영적인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 자아를 죽이고, 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을 강력히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기를 오래오래 참고 기다려 주시고 계십니다.

C.S 루이스는 ‘지옥의 문은 안쪽으로 잠겨있다’ 했습니다. 지옥문은 밖에서는 열 수 없고 내가 안에서 열어야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지옥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해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죄지은 사람들 지옥 보내는 것이었으면, 십자가 사건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저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잘 전해서 저들을 멸망의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소개해야 하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애써야만 합니다. 지옥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지옥의 이미지들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을 설명하고자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곳, 이를 가는 곳(이를 간다는 것은 원망과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입니다. 지금 이를 갈며 살고 있다면 이미 지옥을 사는 것입니다.) 심한 어둠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를 주시는 것은 결국 지옥은 갈 곳이 못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많은 지옥의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이런 지옥의 삶에 처하지 않토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천국의 이미지들도 있습니다. 황금으로 된 집, 예배와 찬양이 끊임이지 않는 것 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들이 선명하게 다가오면 영적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멸망의 현실이 반드시 있다고 얘기합니다. 신앙생활을 선행하는 것으로만 아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선행은 신앙생활의 하나의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착하게 사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삶이 지옥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하나님께 나를 내어드려 지옥에 가지 않는것입니다. 이것이 이상합니까? 이것이 진리입니다. 전도도 그들이 지옥 가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지옥에 가면 안되잖아’. 그 말을 할 때 내 자신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듣는이들이 그 말을 들을 때 전율을 느낄 정도로 내 영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준비된 영성이 담긴 말은 하나님의 권세가 담기기에 듣는이가 두려움을 느끼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신앙의 핵심을 벗어난 순화된 말만을 합니다. 이유는 아주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하는 말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언어, 능력 있는 언어였으면 좋겠습니다. 지옥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실제로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논리적으로도 지옥은 필요합니다. 시편 기자도 73편에서 ‘악인은 끊임없이 형통하다.’ 했는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살아 있으려면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언제 가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가는 곳일까요? 또 천국은 언제 가는 것일까요? 수많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옥은 존재하기에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우리 성도들이 그들이 멸망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일에 선봉을 서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거듭남을 위해 돕고, 도전하며 애써야 합니다. 내 삶이 영적으로 무력하면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멸망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을 가고, 또한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을 돕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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