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믿는 자마다(요3:14-15)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맑고 드높은 가을 하늘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도 가을 하늘처럼 맑고 드높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상은 어제 서울시에서 행한 불꽃놀이 영상입니다. 아름다운 불꽃들입니다. 저희의 마음도 이 불꽃들처럼 타올라서 어둠을 환히 밝혀 비추면 좋겠습니다.
지난주부터 요한복음3장 말씀 보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듣지 못하는 신앙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해하기도 힘든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고체계가 우리처럼 신앙적인 사고체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다루는 이 주제들이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입니다. 사람들은 상식과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받아들이는 사고체계를 가지고 삽니다. 그 사고체계에서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더 들으려 하지 않고 마음 문을 닫아 버립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여깁니다.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 못 하고 납득하기 힘들어 할 뿐만 아니고, 교회 안의 우리도 잘 이해 못하고 잘못 이해하고, 잘못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믿음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주제들은 거듭남, 십자가 (오늘 주제입니다), 영생, 심판 등입니다. 지금세상사람들이 가진 사고체계(심지어 일부 우리도)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고 알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잘 새기고, 잘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 주제들은 하나님께서 꼭 알려 주시고 싶어 하시는 소중한 이야기 들입니다.
지난주 니고데모를 봤습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이지만 풀리지 않는 인생의 갈증이 있었고, 삶의 전환점을 갖고자, 예수님을 밤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3:6)’라고 하십니다. 영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아들여야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아쉽게도 니고데모는 잘 못알아 듣습니다. 밤에 주님은 니고데모와 얼마간의 시간을 대화하셨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대화를 마치시며 구원의 기초를 다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3:14) ‘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입니다. 들려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뱀처럼 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랍비이기에 이 놋뱀 사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21:5-9)’
모세는 하나님의 분부하심대로 가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았습니다. 그리고 쳐다보는 자들은 뱀의 독이 해독되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놋뱀 사건은 신약시대의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미리 알려주시는 예표 (symbol)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땅으로 가는 광야생활에서 길이 험하고, 먹을 게 별로 없고, 물이 충분치 않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그 벌로 독뱀에 물리게 된 것입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시는 놋뱀 사건입니까? 인생은 광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또 알더라도 제대로 몰라 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놋뱀을 보기만 하면 해독된다는 가르침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 없어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르쳐주시는 사건입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굉장히 쉬운 방법임을 시사합니다. 상식선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나를 지성인이라고 자존심 세우는 사람들에게 이런 가르침은 먼 동화 같은 이야기,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놋뱀을 바라보지 않은 백성들은 독이 퍼져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놋뱀 사건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신 신약시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놋뱀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의 죄로 인한 독을 놋뱀을 바라봄(믿음)으로 해독되어 죽을 목숨이 살아나는 사건이라면, 십자가사건은 인류의 죄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봄 (믿음)으로 죄 사함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된다는 큰 상징성을 지닌 사건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사건을 말씀하신 것 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믿으면 구원이 있다는 말씀을 니고데모와의 마지막 대화에 주셨습니다. 해독시켜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너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말씀 하십니다. 우리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과 죄의 독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독의 무서움, 죄의 무서움과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충 넘기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뱀의 독은 사람의 죄입니다. 사람의 죄는 아주 깊숙이 자리하고 우리를 죽여 갑니다. 처참하게 죽여갑니다.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반발하실 것입니까?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바울 사도는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죄와 악이 인류가 진화하면서 생존을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이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말입니다. 이런 이론을 따르면 악을 삶을 위한 필요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정하고 합리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악을 합리화시킵니다. 악은 악입니다. 악이 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의 독이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선을 행하고자 애쓰나, 하루를 마치고 밤에 하루를 되돌아보면 탄식이 절로 납니다. 불완전은 우리 인간의 숙명입니다. 불완전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불완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종교와 다른 것은 행위에 근거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행위를 많이 해서 포인트 쌓듯이 선을 쌓아 올려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한 행위로 나를 구원할 정도로 착한 존재가 아닙니다. 선행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준은 구원받을 정도의 선행을 베풀 수 없는 자임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선행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죄성이 꽉 차있습니다. 선행함도 생색내기 위함인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자체가 완벽한 선행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선행과 노력과 실력만 믿어서는 그래서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고 진실하게 따를 때 독으로 죽을 수 밖에 없던 죄인이 구원받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구원의 신비한 비밀을 알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인간의 부족함과 죄성을 깨달을 때,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십자가 사건이 엄청난 은총의 사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길은 나를 포함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위해 십자가 희생 제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으며,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쓰는 삶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22)
우리는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바라보고 믿는 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모두 나의 선행, 노력만 의지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조건과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음이 내안에서 계속 생겨나서 나를 죽여가는 나의 죄로 인한 독들 (사랑하지 못하는 죄, 원망하는 죄…)을 주님 십자가 구원의 능력으로 해독시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나 우리는 자꾸 멈춥니다. 과거 관록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멈추면 안 됩니다. 지속해서 영적인 삶을 유지하려면 우리에게는 영적인 훈련이 계속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소홀히 하면 우리는 쓰러지고 맙니다. 목사님들도 쓰러집니다. 매일 매일의 영적인 삶과 훈련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삶이란 십자가를 바라보며 (신앙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정말 겸손하게 그분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세부지침으로 들어가기 전에 김유신의 애마(말) 사건을 이야기해드리려 합니다. 김유신은 젊었을 때 기방(기생집) 출입이 잦았습니다. 철들어 기생방 출입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하루는 너무 피곤해서 말을 탄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기방이었습니다. 기생들이 즐비한…. 김유신은 말에게 엄청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단칼에 애마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사실 말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말은 늘 주인이 하던 대로 했던 것뿐인데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우리도 훈련하지 않으면 육의 삶을 살던 그대로 자동으로 삽니다. 하던 대로 그대로 하는 삶은 안됩니다. 이제 세 가지 지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비는 신앙에서 배우는 신앙으로의 변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한 것을 빌며 구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구함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구하되 제대로 구해야 합니다. 잘못 구하게 되면 내 욕망과 결합해서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순서가 뒤바뀌면 기독교신앙은 무당종교가 됩니다. 비는 것도 필요할 때만 빌고, 배우는 것은 하지 않고. 십자가 주님을 배워야만 합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고 배워 그 성품이 내 성품이 되어 상대방이 나를 보면 힐링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보면 마음의 독이 힐링 되고, 아내도 남편을 보면 마음의 독이 힐링 되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그 길에 대해 배우시고 또 그 삶을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2. 기적을 바라는 신앙에서 성화의 신앙으로의 변화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시는 수단 중 하나입니다. 일상에서 늘 기적만을 바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늘 진실한 삶을 살고자 애쓰고 성화되어가는 삶을 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입으로만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사는 모습은 세상 사람과 똑같으면 어떡합니까? 이렇게 대박을 바라는 대박 신앙과 한탕주의 신앙은 절대로 안 됩니다.
3. 축복신앙에서 지복(至福)신앙으로의 변화
지복이란 내 일상의 삶에서 늘 행복하고 즐겁고 기쁨이 있는 상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복을 회복해야 합니다. 죄로 인한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것도 지복입니다. 성공, 출세, 부귀와 영화, 기적을 바라는 신앙, 축복만을 바라는 신앙은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축복만을 구하다 한국의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주시고자 하시는 복(지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누리는 이 지긋한 행복으로 죄로 인한 매일 매일의 독들을 해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십자가 바라보며 또 주님이 가신길 배우고 따라가며 주시는 능력으로 죄의 독들을 해독시키는 지복의 고귀한 삶을 사시기 축원드립니다. (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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