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 주일설교: 거듭남, 내 삶의 터닝포인트(요3:1~13)


거듭남, 내 삶의 터닝포인트(요13:1~13) 

10월 첫 번째 귀한 주일 아침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10월 한 달은 요한복음 3장 말씀을 계속 보겠습니다. 교회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신앙의 주제들이 나옵니다. 거듭남, 심판, 지옥, 사랑, 영생, 믿음 등의 주제들이 나옵니다. 이 모두 주님의 입술을 통해 전해진 말씀들입니다. 10월 한 달간 살피며 신앙의 기초를 다지고, 심화시키시고 기뻐하시는 한 달 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존경받는 랍비입니다. 산헤드린공의회 의원입니다. 젊은 예수의 기적(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쫓아내는 엄청난 사건)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밤에 만나러 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놀란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 주님의 많은 행적을 보고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때 실제로 주님을 찾아온 사람은 니고데모가 처음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는 그 당시 자신의 삶에 대한 풀리지 않는 갈증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답답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껏 보지 못한 놀라운 일을 행한 예수를 보고 자신에게 있는 삶의 갈증에 대한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삶의 전환점을 찾고자 하는 갈망과 갈증이 컸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다보면, 뭔가 달라져야겠다는 삶의 전환점(Turning point)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도 절실하지만, 안정되고, 성공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허전하고, 갈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용기내어 직업도 바꿔봅니다. 직장도 바꿔봅니다. 이사도 해봅니다. 여유되는 사람은 여행도 갑니다. 이런 노력들은 훌륭한 시도들입니다. 그러나 허전함과 갈증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근원적인 삶의 전환은 어디서 찾을수 있습니까? 영적인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삶을 살던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우리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허전함에 대한 답이 얻어지고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증을 갖고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영이 거듭나서 하나님을 알고, 믿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온 몸으로 받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삶의 갈증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 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삶을 살던 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갈증에 대한 해결책 입니다. 새롭게 태어나서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야 우리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전환이 필요합니다. 즉 내 방식(my way)에서 하나님의 방식(God’s way)으로 변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 조용한 시간 계속 묵상하시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거듭남은 새로 탄생하여 완전히 존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는 세계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육신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내 존재가 사는 세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아직도 육신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세상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거듭남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7) 사람들은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2) 바울사도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2:14)’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배운 사람이 어떻게 교회에 다녀?하며 교회다니는 우리를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영적인 세계가 죽어있기 때문에 우리를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거듭나야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중생이 확실히 인지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가치가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영의 새로운 탄생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것은 이해 불가입니다.

니고데모를 보십시오. 지혜, 경험, 경륜, 인품 모든 것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주님이 영의 문제를 들고 나오니,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의 탄생에 대한 거듭남의 생생한 감각, 감동이 살아나지 않으면 살기에 바쁘고 급급하여,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으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물로 세례받아 예수님과 영적으로 결혼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부, 주님은 신랑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새로운 탄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영혼에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거듭나는 탄생의 신비한 과정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거듭난 사람들은 징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합니다. 그래서 완벽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거듭남의 흔적들을 모두 가지게 됩니다. 노자 도덕경에 ‘명백사달 능무지호'(明白四達, 能無知乎)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면서 모른척 할 수 있는가? 하는 성어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거듭남의 증표를 모두 가질수도 있고, 1개만 가질수도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계속 주일에 교회에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거듭났는가? 질문에 너무 매몰되어 헤메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약한 징표만 있어도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징표들을 더 확실하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거듭남을 고백했는데 거듭남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도리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새 생명인 영의 호흡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호흡이 없으면 생명은 미약해져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숨길 수 없는 거듭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듭난 내가 형편없이 사는 내모습을 보며 사는게 이게뭔가? 하는 이것이 회개입니다. 거듭난 자는 반드시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육의 삶과 차별되는 영의 삶은 어떤것입니까? 첫째, 하나님 뜻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씁니다. 사람은 이념적 존재입니다. 어떤 때는 이념에 사로잡혀, 이념에 끌려다니는 편협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면, 예수의 진리가 가장 중요한 이념이 됩니다. 그래서 편협한 이념을 뛰어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념을 초월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둘째, 관계가 변화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변화되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들이 내 안에서 여물어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밀어내고 거부하지 않습니다. 예수 사랑의 진리가 내 안에 있기에, 사람을 밀어내려 하지않고, 이해하려하고, 용납하고 끌어 안으려 애씁니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내면을 이해하려 애씀니다. 누구하고나 말이 통합니다. 이것은 오순절 다락방 사건과 같습니다. 언어가 다른데도 이해합니다! 즉 영혼이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삶입니까? 이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신비한 삶입니다. 거듭남의 인식이 희미하면 내 위주로 살려고 합니다.

육의 삶과 영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먼저 육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완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이기에 자기 중심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없기에 내가 최고입니다. 그래서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지면 상대를 판단하고,정죄하고, 비난하여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둘째, 과거에 철저히 지배받고 삽니다. 성공한 사람은 과거의 영광에 도취해서 삽니다. 내가 왕년에~~하면서 삽니다. 실패한 사람은 과거에 사로잡혀, 좌절과 상처속에 삽니다. 돌파구가 없습니다.

셋째, 육에 속한 사람의 미래는 두려움과 염려가 장악합니다. 그래서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노후대비, 장래대비라는 명목하에 돈에 과도하게 집중하고, 힘을 얻기위해, 학력을 쌓기위해 집착합니다. 육의 삶은 이렇게 과거와 미래를 왔다갔다하며, 현재를 깎아 먹고, 현재는 답답함으로 꽉차 있습니다.

영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영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내 삶을 봅니다. 내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는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더 멀리, 더 깊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삶이 염려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빨리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돌아오면, 과거의 상처도 툭툭 털어 낼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더 충실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 있기에 가정에 더욱 충실합니다. 이 영의 삶은 나를 살리고 가족을 살립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영적인 삶의 비밀을 깨달으며 그 축복을 누리기를 축원드립니다.

진실되게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정말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답답함 가운데 돌파구를 찾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영의 호흡을 하십시오. 진실된 영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욱 더 힘차게 거듭난 영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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