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성경: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 마세요(욘1:1~16)

20160927

2016년 9월 27일
새벽을 깨우는 말씀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욘1:1-3)

오늘도 무거운 짐진자를 부르시고 위로하시는 주님(찬송528장)께 위로받고 힘내시는 하루 되길 바랍니다. 오늘부터 이 달말까지 같이 볼 말씀은 요나서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났기에 요나를 동화속 주인공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요나는 주전 8세기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에서 실제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사람들이 요나에게 붙여준 별명은 ‘요놈의 나’입니다. 부족한 요나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다지 좋은 별명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라 명하십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 동쪽 800km에 위치한 신흥 강대국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나라였기에 요나는 앗수르에 상당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 멸망하기를 요나는 바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거라는 소식’을 전하라 합니다. 미리 알려준다는 뜻은 돌이키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리라는 마음이 있으시기에 미리 알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미리 알려 그들이 회개하고 용서 받는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합니다.

다시스는 니느웨와 반대편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서쪽으로 40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한 니느웨와 반대편으로 그것도 5배나 더 먼곳으로 도망합니다.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대언하는 사람인데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싫어서 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뜻하는 상징성를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도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싫어서입니다. 싫어하던 앗수르가 망하는 기쁜 일을 미리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려 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심판을 면하게 될 사실이 싫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국수주의자였습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의 명령은 큰 갈등을 일으킵니다.

본문에 여호와의 얼굴(낯)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그 얼굴을 마주하면서 요나는 감을 잡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가 회개하면 용서하시리라는 분위기를 감지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관용어 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마주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 마음을 아는 영의 소유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된 요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마주치지 않으려고 도망합니다.(3절) 그러나 도망하다 풍랑만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얼굴’이란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얼굴은 우리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얼굴은 내 마음의 지문이라고 합니다. 나이들면 자기 자신의 얼굴에 책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마음인 얼굴이 성숙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랑과 관용과 넉넉함을 드러내는 얼굴로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고 감싸고 위로할 수있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나이들어서도 얼굴이 상대방과 싸우자는 얼굴이면 안됩니다. 얼굴값이 꼴값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얼굴은 얼(靈)이 깃든 영의 골짜기인 ‘얼골’이 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영성이 깃들 얼굴이 되야 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대하는 요나의 얼굴도 있습니다. 요나가 본 하나님의 얼굴은 용서의 얼굴입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니느웨를 용서하고자하는 사랑의 얼굴, 긍휼의 얼굴입니다. 요나서에는 죽은 사람이 한명도 안나옵니다. 이방 선원들도 풍랑속에 있었으나 안 죽었습니다. 요나도 물에 빠졌으나 안 죽었습니다. 니느웨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영성이 깃든 사랑의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요나의 얼굴은 어땠을까요? 아마 분노에 차있는 화난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풍랑맞은 선원들이 요나를 살리려고 애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애쓰는 이방인의 얼굴이 요나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본문9절에서 요나는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욘1:9) 그런데 어떻게 이같은 얼굴과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지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우리의 얼굴을 살펴봐야 합니다. 요나처럼 화난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얼굴은 사랑과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의 얼굴이어야 합니다. 넉넉한 얼굴이어야 합니다.

요나서는 신앙인의 배타성을 지적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도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위대한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살면서 내 마음에 안 맞는다고 배타적으로 피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내가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해 보라는, 구원해 보라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얼굴에서 하나님 영광의 광채가 나타나기를 축복드리고 축원드립니다 (정리: 김화영)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