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9일
새벽을 깨우는 말씀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0~11)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을 책망하는 서신을 디도 편으로 보내고 나서 노심초사하며 디도를 기다립니다. 디도를 기다리며 편지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를 근심하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합니다. 그러나 디도가 돌아와 바울의 편지를 통해 이제는 고린도교회가 회개하고 바울을 사모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바울의 이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기쁨으로 본문을 쓰게 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린도교회와 디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교회와 바울 자신과의 오해가 풀리고 영접을 받도 디도가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을 넘어서,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복음으로 세운 교회가 어려움에 있었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회개하며 회복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8-13에서는 특별히 근심하는 모습을 주목하게 됩니다. 8절에서 편지를 보내놓고 근심하는 바울의 모습과, 11절에서 고린도교회의 근심이 나옵니다. 이 근심은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삶의 돌이킴’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보내고 나서 고린도교회를 하나님 마음을 가지고 근심합니다. 너무 심하게 책망해서 교회로 하여금 근심하게 해서 더 힘들어지지는 않는지 걱정합니다. 고린도교회도 근심합니다. 그러나 그 근심은 바울의 편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그 뜻 안에서 변화되어집니다. 11절에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생기게 되었고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의로운 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열심으로 헌신하려는 마음과 악에 대한 응징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 의지하며 변화되었습니다. 바울 안에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아파하는 마음이 교회를 움직여서 회개와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애통함을 하나님께서는 받으시고 구원하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 그분 바라보는 것이 구원을 이룹니다. 이것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위로와 기쁨과 자랑이었으며, 동일하게 우리의 위로와 기쁨과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으로 육신의 소욕에 머무르는 후회로 끝나며 애통과 회개와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후회하지만 애통과 회개가 없이 자기 생각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멸망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후회하며 통회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킵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삽니다.
걱정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을 해결하는 주체를 누구로 삼느냐에 따라 걱정이 구원으로 가기도 하고 사망으로 가기도 합니다. 우리의 근심은 어떤 근심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근심은 우리를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참 위로입니다. 기쁨입니다. 자랑입니다. 세상의 이성적인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근심이 하나님 뜻 안에서 위로와 기쁨과 자랑이 되는 삶을 계속 배워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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